원본 타래: https://twitter.com/snail_er/status/1176214167407058944

1. 본편 이후에 재회 후 마사무네가 일방적으로 바라서 꾸준히 만나는 마사카네 기반.

2. 본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 쓰면서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떠들었던 걸 그대로 옮겨 놓은 거라서 앞뒤 내용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말투도 왔다 갔다 함.







   카네츠구는 마사무네를 만나는 중에도 꾸준히 뭔가 일을 하고 있겠지. 여전히 愛 자가 쓰여 있는 노트북을 쓰고, 앞에 마사무네가 있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무표정하게 업무를 보는 날이 많을 것이다. 마사무네가 염려하던 것보다 카네츠구는 훨씬 괜찮아 보일 거다. 한번은 'SLPM 말고 다른 회사에 들어간 거야?' 하고 물은 적도 있겠지. 거기에 카네츠구는 '비슷해.' 정도로 대답했을 거야. 어차피 말해도 모르겠지 싶었을 테고 굳이 구구절절 설명해 주기에도 귀찮았을 테니까. 그 이후로도 종종 마사무네는 카네츠구가 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보이면서 물어보기도 했겠지. 카네츠구 옆에 나란히 앉을 때면 왠지 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일부러 노트북 화면이나 서류에서 눈을 피하는 편이지만, 한번은 "봐도 돼?" 하고 먼저 묻기도 했을 거야. 카네츠구는 마사무네가 있는 동안에는(비단 마사무네뿐 아니라 카페처럼 다른 사람이 있는 때면 언제든) 기밀 사항과 밀접한 업무는 일부러 안 꺼내 놓으니 상관없다 생각하겠지. 카네츠구가 "마음대로."라며 허락해 주면 마사무네는 테이블에 놓인 서류 중 아무것이나 하나 들고 읽어 볼 거야. 근데 온통 재미없거나 어려운 내용 투성이라서 한 페이지도 채 못 읽고 그대로 내려놓겠지. 그러다가 카네츠구 옆으로 조금 더 다가앉아서 카네츠구가 보고 있는 화면을 같이 볼 거야. 사업이나 프로젝트 계획서 같은 게 대부분이라 거기에도 흥미를 못 붙이고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려 버리겠지만. 그럴 때면 카네츠구는 종종 마사무네한테 "심심하면 돌아가지그래?" 하곤 하지만, 마사무네가 그대로 돌아가는 일은 많이 없을 거야. 대신, (카네츠구의 집이라면) "부엌 써도 돼?" 하고 묻겠지. 늘 그렇듯 카네츠구는 쉽게 허락해 주고, 마사무네는 부엌으로 가면서 시간을 확인해. 시간은 2시쯤 될까? 저녁 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야. 스위츠류도 만들려면야 만들 수 있겠지만 그것도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결국은 과일 주스 정도나 만들겠지. 빵 같은 게 있다면 설탕과 해서 달달한 간식을 만들 수도 있을 거고. 금방 만들어서 카네츠구가 마실 커피와 함께 내놓으면, 카네츠구는 고맙다는 인사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마사무네가 만든 걸 별다른 거부감 없이 쉽게 먹을 거야. 마사무네와 카네츠구는 그런 식으로 특별하다기엔 너무나 평온한 시간을 함께 보내겠지.


   그러던 어느 날 마사무네가 혼자 길을 걷고 있던 때였어. 카네츠구를 길에서 보게 됐지. 마사무네와 카네츠구는 첫 재회를 제외하고는 따로 약속을 잡아 외출을 하는 게 아닌 이상 밖에서 만날 일은 한 번도 없었어. 그래서 마사무네는 색다른 느낌이 들겠지. 그리고 당연히 반가웠을 거야. 마사무네는 꼭 주인을 다시 만난 강아지라도 되는 것처럼 활짝 웃으면서 카네츠구를 향해 달려가려고 하는데, 카네츠구 옆에 누가 있어. 회사 사람인가 싶었는데 그렇다기엔 복장이 묘해. 카네츠구는 제대로 정장을 갖춰 입은 반면, 카네츠구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리 봐도 회사원의 복장이 아니었거든.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에 익은 체형이었어. 분명히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이야. 마사무네는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그 자리에서 뒤돌지 못하고 카네츠구를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갔어. 몰래 지켜보려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들키면 안 될 것 같았어. 그럼에도 그날따라 길거리에는 주차되어 있는 차라든가 전봇대 같은 것도 없어서 마땅히 숨을 만한 곳도 없었어. 당연하게도, 어느 정도 이상 마사무네가 다가가서는 카네츠구도 마사무네가 있다는 걸 눈치챘지. 근데 마사무네는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카네츠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 왜냐하면 카네츠구 옆에 있던 사람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에야스였거든. 마사무네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어. 카네츠구가 한참 동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에야스도 카네츠구에게서 눈을 떼고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지. 곧, 이에야스도 마사무네를 발견했어. 그리고 웃었지.


   "반가운 얼굴이네."

   "이에야스…?"

   "오랜만이야, 마사무네 군."


   마사무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에야스를 계속 바라보다가 다시 카네츠구를 향해 눈을 돌렸어.


   "나오에 씨?"


   설명을 해 달라는 뜻이었어. 그렇지만 카네츠구는 말없이 그저 마사무네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 마사무네는 그 눈을 잘 알았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는 눈이었어. 그러니까, 종이 뭉치나 노트북이나 커피잔 같은 걸 바라보는 눈 말이야. 눈앞에 있기 때문에 시선을 줄 뿐인, 아무 의미도 감정도 없는 그런 눈빛이었어. 그리고 생각해 보면 카네츠구는 마사무네를 향해 시선을 준 적이 거의 없었지. 힐끔 보고 다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곤 했어. 다시 말하면 카네츠구는 마사무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어. 호불호의 감정을 할애할 관심조차 없었던 거야. 그걸, 마사무네는 지금 뒤늦게 깨닫고 있었어.

   혼란스러워하는 마사무네를 여전히 바라보면서, 이에야스가 말했어.


   "당초 예정보다는 빠르지만……. 나오에 씨, 갑작스러지만 지금 당장 해 주셔야 하는 일이 있어요."

   "알고 있어."

   "도와드릴까요?"

   "필요 없어."

   "혼자서는 힘드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네가 있으면 오히려 방해만 돼."

   "그러시다면."


   이에야스가 빙긋 웃으며 한 발 물러서자, 그 자리에서 카네츠구는 망설임 없이 현현했어. 그 힘이 향하는 곳은 마사무네였지. 언제나 마사무네를 향하지 않던 눈이 이 순간만큼은 뚜렷하게 마사무네를 바라보고 있었어. 다만 그 눈에는 마사무네가 원하던 감정이라곤 조금도 없었지. 허한 눈동자에 담긴 것은 목표물을 노리는 사냥꾼의 태도였어. 마사무네는 현현도 하지 못한 채 반사신경에만 의지해 카네츠구의 공격을 피했어. 몇 번인가 맞으면서도 마사무네는 카네츠구를 공격할 수가 없었어. 그렇지만 그런 마사무네의 태도는 카네츠구한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지. 도망치고 공격을 막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주변은 어딘지 모를 곳으로 바뀌어 있었어. 이에야스의 모습은 한참 전부터 보이지 않고, 폐 건물 같은 게 남아 있는 곳에는 인적도 무척 드물었어. 덕분에 마사무네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어. 카네츠구에게 목이 죄일 뻔한 것을, 겨우 손으로 막고 있던 참이었지.


   "나오에 씨, 왜 당신이 이에야스와…!"

   "이유가 필요한가?"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 이상은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역시 당신 아직도……. 근데 어째서 이에야스 같은 녀석과 함께하고 있는 거야!"


   마사무네의 목소리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어. 카네츠구는 마사무네의 말에 대답하기를 멈추고 더욱 마사무네의 목을 조이겠지.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을 것 같던 마사무네는 카네츠구의 팔을 붙아 그대로 앞으로 메쳤어. 마사무네의 힘에 넘겨진 카네츠구는 능숙하게 몸을 굴려 충격을 완화하곤 금방 일어나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어. 마사무네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했지만 카네츠구는 마사무네의 이해 따위는 필요치 않않겠지. 사실 그대로 다시 입을 닫을 생각이었지만, 왠지 카네츠구는 한마디를 더 얹고 싶어졌어.


   "네 음식을 못 먹게 되는 건 조금 아쉽군."


   무슨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 한마디는 마사무네를 흔들어 놓기에는 충분했지. 그리고 카네츠구의 말에 흔들리고 있던 찰나 마사무네의 뒤에 돌연 그림자가 나타났어. 발소리도 없이 나타난 그림자는 손쉽게 마사무네를 기절시킬 수 있었어. 카네츠구가 표정을 조금 구기며 혀를 찼어.


   "쓸데없는 짓을."

   "기다려 드릴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지루해서요. 그나저나 나오에 씨가 마사무네 군과 만나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미리 알았다면 계획이 훨씬 더 앞당겨졌을 텐데."

   "공사 구분은 확실히 지키고 싶었을 뿐이야."

   "그건 우에스기 씨 일 때문인가요?"

   "……."

   "하하, 화내지 마세요. 그럼 갈까요?"


   이에야스가 정신을 잃은 마사무네를 짊어진 채 먼저 나아가고, 카네츠구는 대답 없이 그 뒤를 따라 걸었어.


   마사무네가 눈을 뜬 곳은 사방이 어두운 방이겠지. 몸은 움직일 수 없을 거야. 시간이 좀 지나 눈이 어둠에 적응하고 나서 고개만 겨우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작은 방이었어. 쿰쿰한 곰팡내도 나겠지. 벽지도 발려 있지 않은 컴컴한 곳이니까 지하인 것 같아. 마사무네가 누워 있는 곳은 딱딱한 침상이었어. 매트리스나 쿠션은커녕 베개도 없었지. 아무래도 자려고 만들어 놓은 건 아닌 것 같아. 몸은 팔다리는 물론이고 몸통까지도 튼튼한 가죽 벨트에 묶여 있었어. 아무튼 마사무네 본인한테 좋은 상황은 결코 아닌 것 같아. 그래서 현현으로 끊어내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무슨 일인지 현현을 할 수가 없네. 마사무네가 당황스러워하며 무작정 바둥거리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어. 이에야스와 카네츠구였지.

   카네츠구는 이에야스를 따르는 게 아니라 이에야스와 함께 노부나가를 따르고 있는 거였다. 미츠나리와 우에스기가 서로 사이가 안 좋았음에도 같이 일하던 것처럼, 지금 카네츠구는 이에야스랑 그렇게 일하고 있을 뿐이지. 길을 잃었던 카네츠구는 우에스기(정확히는 히데요시지만)가 따르던 사람을 따르기로 한 거겠지. 이걸 알게 되는 건 카네츠구가 죽고 난 다음이었으면 좋겠네. 이에야스한테 듣겠지.

   노부나가가 마사무네를 노리는 이유는 검은 갑옷을 다시 만들어내고, 혼노지를 계기로 잃었던 진성 현현의 힘을 다시 얻기 위해서가 아닐까? 노부나가는 카네츠구에게는 다시 현현의 힘을 줬지만 이에야스한테는 주지 않았을 것 같다. 이에야스는 워낙 야망도 크고 예측할 수 없게 움직이는 부분이 있어서 노부나가 자신이 현현할 수 있을 때까지는 현현시킬 생각이 없었던 거겠지. 카네츠구는 업무 범위 내에서만 움직이는 인간인 데다 우에스기의 일을 이어받았다는 자각이 있어서 배신 같은 건 안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 같다. 우에스기에게 헌신했던 것만큼 일해 주지는 않을 테지만, 이 정도만도 충분하다는 느낌이겠지.

   마사무네가 현현하지 못했던 건 일시적인 현상일 거야. 약물로 현현자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걸 역으로 이용해서 현현을 막는 방법을 찾은 거겠지. 가성 현현자는 완전히 힘을 잃게 되지만 마사무네는 진성이라서 일시적으로밖에 막을 수 없는 거였으면 좋겠다. 방으로 들어온 이에야스와 이야기하는 사이에 마사무네는 다시 현현의 힘이 돌아오고 결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물론 그것도 노부나가의 예상대로였겠지만. 마사무네를 붙잡아 놓은 건 그 약물을 테스트하기 위함도 있었을 거야. 마사무네는 가죽 벨트를 끊어버리자마자 이에야스한테 달려들겠지. 이에야스는 마사무네한테 맞고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치는데, 그 뒤에서 카네츠구가 주사기를 꺼내 마사무네의 등에 박아 넣고 약을 주입하겠지. 마사무네가 한 번 맞은 적 있는 그 약물이었어. 마사무네의 현현은 맥없이 풀려 버리겠지. 주사기가 꽂혔던 어깨쯤을 감싸쥐고 마사무네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으면 좋겠다. 막으려면야 막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에야스와 카네츠구는 굳이 막거나 쫓아가지 않았어. 진성 현현의 힘을 옮기는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대로 놔 주기로 한 거겠지. 이대로 약물을 쓰면서 계속 가둬 놓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거야. 비용 문제도 있고 혹시나 거듭된 약물 주입으로 완전히 현현을 잃어 버리면 그것도 곤란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네츠구는 마사무네가 다시 자기를 찾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겠지.


   카네츠구의 예상대로 마사무네는 며칠 후 카네츠구를 찾아왔어. 아무런 거리낌없이 카네츠구는 문을 열어 줬지. 꼭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였어. 카네츠구가 보여온 일련의 행동들을 마사무네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 오늘 찾아온 것도 그걸 알고 싶어서였지. 카네츠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카네츠구는 자기의 생활 반경 안으로 자신을 들인 것인지, 받아들였다고 생각한 자신을 어떻게 그리도 쉽게 공격할 수 있는지, 자신은 카네츠구한테 뭐였는지 그런 것들을 마사무네는 묻고 싶었어.


   "묻고 싶은 게 많아."

   "말해 봐."


   마사무네는 여러 가지를 물었어. 그에 대한 카네츠구의 대답은 길지 않았어. 결론은 하나였지. '일이니까.' 다만 한 가지, 당신에게 있어 나는 뭐였냐는 질문에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어.


   "그건 아무 의미 없어."


   답을 회피한 거였지만, 마사무네는 자신이 카네츠구한테 의미 없는 존재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겠지. 대답을 들을수록 배신감을 느낀 끝에 마사무네는 말해.


   "역시 당신은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야."


   사실 마사무네는 카네츠구를 싫어했어. 미츠나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었거든. 기본적으로 SLPM이란 곳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사무네와 함께할 수 없는 인간상이었어. 그런 맥락으로 카네츠구를 믿지 못하고 싫어했지. 그런 마사무네가 카네츠구를 받아들인 건 작은 등불같이 마음 한 켠에 피어 올랐던 동정심이 시작이었겠지. 다시 만난 카네츠구는 늘 무언가를 붙잡고 있지만 어딘가 기운이 없는 듯했고 외로워 보였어. 사람들 챙기길 잘하는 마사무네가 지나치기에는 너무 위태로워 보였지. 더군다나 마사무네는 카네츠구가 오열하던 순간을 본 사람이잖아. 신경을 끄기 어려운 성격이 카네츠구에게 손을 뻗게 했고, 그렇게 관계가 시작되고 이어졌지. 그리고 관계가 이어질수록 그 위에 쌓이는 감정은 깊어졌어. 전한 적은 없었어도 카네츠구는 알고 있었고, 카네츠구가 알고 있음에도 답해 주지 않는다는 걸 마사무네도 알고 있었어. 그리고 마사무네가 알고 있다는 것을 카네츠구도 알아. 그런데 그런 미묘한 감정을 사이에 두고도 카네츠구는 마사무네를 밀어내지 않았거든. 그건 자기가 품고 있는 감정과는 달라도 정이라는 것이 생겼기 때문일 거라고 마사무네는 생각하고 있었어. 그 믿음이 이번 일을 계기로 깨지게 되어 버렸지만. 마사무네는 그대로 돌아가 버렸어.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카네츠구는 덤덤하게 하고 있던 일을 이어서 했어.


   마사무네가 카네츠구와 다시 만나게 된 건 그날로부터 보름~한 달쯤 뒤였어. 카네츠구는 정장을 입고 있었어. 그게 뭘 의미하는지 마사무네는 잘 알고 있었지. 카네츠구는 '일'을 하러 온 거야. 카네츠구는 이미 현현을 한 상태였어.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만큼은 마사무네도 망설임 없이 현현했어. 카네츠구와 마사무네 사이의 공방이 시작됐어. 사실 마사무네가 진심으로 상대한다면 싸움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마사무네는 아직 마음을 완전히 접지 못했거든. 카네츠구를 공격해야 할 순간마다 멈칫거리는 자신이 있었어. 그리고 카네츠구를 공격하고 나서 울컥하는 마음이 드는 자신이 있었지. 마음을 다스리려고 해도 좀처럼 잘 안 돼. 그렇지만 자기만의 의지로는 이 싸움을 멈출 수는 없었기에 마사무네는 계속 싸워야 했어. 셀 수 없을 만큼 합을 주고받으며, 시간은 계속 흘렀지. 카네츠구가 마사무네 위에 올라타 팔로 목을 내리 누르며 제압하는 양상이 되었어. 마사무네는 카네츠구의 팔을 붙잡은 채 버티다가, 견디지 못하고 외쳤어.


   "역시 납득할 수 없어! 당신은… 나오에 씨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나만의 착각이었던 거야? 나오에 씨가 나를 받아들여 줬다고, 내가 착각했던 것뿐이야?"

   "무르군. 말했잖아, 그런 건 의미 없다고."

   "나오에 카네츠구!"


   그 순간이었어. 겪어 본 적 없는 고통이 퍼졌어. 떨리는 눈동자를 굴려 통증의 근원지를 내려다본 곳에는 기다란 검날이 배를 꿰뚫고 있었어. 그런데 자기가 찔렸다는 것보다도 마사무네를 당혹스럽게 한 건 자기 위에 올라타 있는 카네츠구의 모습이었어. 마사무네를 찌른 검은 카네츠구의 몸을 꿰뚫고 들어온 거였거든. 마사무네는 자기를 짓누르고 있던 팔에 힘이 빠지고 있음을 느꼈어. 곧 이어 카네츠구와 마사무네의 몸을 관통했던 검이 빠져나갔어. 그와 함께 카네츠구의 몸은 검이 빠져나가는 방향을 따라 쓰러졌어. 카네츠구의 배에서 왈칵거리며 쏟아져 나오는 피가 분홍색 셔츠를 흥건히 적시며 바닥으로 퍼져 나갔어.

   쓰러지는 카네츠구의 몸 뒤에 서 있던 건 이에야스였어. 두 사람을 찌르고도 이에야스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어. 강한 열망이 고여 있는 눈이었어. 마사무네는 배의 상처를 감싸쥐고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고 이에야스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어. 현현을 하지 않은 이에야스의 몸은 쉽게 나가떨어졌지만 기절하지는 않았나 봐. 이에야스는 비틀거리면서 다시 일어섰어. 그 짧은 사이에 부쩍 퀭해진 듯한 카네츠구의 눈이 이에야스를 향했어.


   "이에야스……."


   기침과 함께 작은 목소리로 카네츠구가 이름을 부르자, 이에야스는 검을 고쳐 잡으며 입을 열었어.


   "아무래도 노부나가 씨의 계획에는 마사무네 외에도 꽤나 강한 가성 현현자 한 명 정도 필요한 모양이라서요. 노부나가 씨는 저를 다시 현현시켜서 재료로 쓸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그럴 수는 없죠."


   이에야스는 어딘가 핀트가 나간 듯한 모습이었어. 아무래도 카네츠구와 마사무네가 있는 곳으로 오기 전에 무슨 일을 당한 건가 봐.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는 몸으로 이에야스는 다시 카네츠구에게 달려들 모양새였어. 그 앞을 막아서고 있는 마사무네도 이에야스의 목표물이기는 마찬가지였어. 이에야스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어. 마사무네는 아슬아슬하게 피하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칼에 찔린 곳 때문에 몸을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어. 머리 위로 들리는 검에 마사무네가 꼼짝없이 베이게 생겼을 때, 이에야스는 그 자리에서 갑자기 쓰러져 버렸어. 앞으로 고꾸라진 이에야스의 목덜미에는 주삿바늘 자국 같은 게 여럿 있었어. 한조 남매가 없으니 약물을 써서 다시 현현시키려고 했던 흔적이었을 거야. 그런데 약물만으로는 한조 남매가 현현시키는 것만큼 완벽하고 강하게 성과가 나지 않으니 약물을 과다 투입한 거겠지. 실험의 의미도 있었을 거야.

   어쨌든 가까스로 살아남은 마사무네는 카네츠구를 향해 기어갔어. 카네츠구의 숨은 벌써 미약해져 있었어. 카네츠구는 마사무네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어. 그리고 속삭이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어.


   "난 말이야,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건 이제 질색이야."

   "뭐?"

   "그런 건 그때 한 번으로 족해."


   마사무네는 카네츠구가 말하는 게 언제인지 바로 알 수 있었어. 과거 마사무네와 싸웠던 그 폐건물, 그리고 세키가하라를 말하는 거겠지. 그리고 마사무네는 곧 지난번에 카네츠구가 이에야스와 하던 대화를 떠올렸어. 공사 구분을 확실히 하고 싶다던 그 말 말이야. 마사무네의 질문에 의미 없다고 대답했던 것과도 이어지는 거였어. 마사무네는 그걸 지금에서야 깨달았지. 카네츠구의 그런 말과 태도는 일종의 포기였어. 마음속 무언가를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에야스 옆에 있을 수 있었고, 마사무네를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받아들인 마사쿠네를 거리낌 없이 제거하려고 할 수 있었어.


   "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역시 이에야스는 증오스럽군."


   카네츠구에게 있어 남은 삶은 어떻게 해도 후회를 떠안고 살 수밖에는 없었겠지만, 이에야스와 함께하는 건 꼭 우에스기를 배신하게 된 느낌이었겠지. 자조하듯 힘없이 픽 웃는 소리는 숨에 섞여 생명이 빠져나가는 소리 같았어. 마사무네는 다급해졌어. 119든 경찰이든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를 않았어. 이렇게나 필사적으로 움직이는데도 말이야.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나오에 씨!"


   마사무네는 축 늘어진 카네츠구의 손을 붙잡으며 외쳤어. 하지만 카네츠구는 마사무네의 손을 맞잡아 주지 않았어.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았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카네츠구는 자기가 이 자리에서 생이 끝날 걸 잘 알고 있었어. 더 살아가고 싶은 마음도 그다지 없겠지. 이런 순간에도 카네츠구는 포기하고 있었어. 마사무네도 그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카네츠구의 이름을 불렀는지도 몰라.


   "나오에 씨. 카네, 카네츠구 씨…. 카네츠구…!"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카네츠구'라고 불릴 때 잠깐이나마 그 손이 움직였던 것 같아서, 마사무네는 계속 카네츠구의 이름을 불렀어. 부르고 부르다가 속마음까지 뱉어 버렸지.


   "좋아해. 나 카네츠구를 좋아해.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싫어하고 싶은데, 그런데 내 생각대로 안 돼. 그러니까 죽지 마. 죽지 말아 줘…."


   마사무네는 흐느끼고 있었어. 아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거야. 카네츠구를 세상에 붙잡아 놓고 싶어서 되는 대로 막 말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카네츠구의 손가락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어. 마사무네의 정신이 흐려지는 것처럼, 카네츠구의 생명도 꺼져 갔어.


   마사무네가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어. 이에야스가 도검을 든 채 거리를 뛰어가던 걸 어느 시민이 신고했었거든. 이에야스가 향한 곳으로 경찰이 출동했고, 그곳에 쓰려져 있는 세 사람을 발견해서 병원으로 옮겼던 거였어. 미리 말하자면 카네츠구는 죽었어. 애초에 본인에게 살 의지가 없었던 데다, 상처가 너무 깊었거든. 피도 많이 흘린 채 시간을 오래 보냈고.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건 마사무네와 이에야스뿐이었어. 카네츠구의 죽음을 마사무네에게 전한 건, 급하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다테 일파와 아이겠지. 카네츠구의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분위기는 싸해졌을 거야. 마사무네는 자기가 겪었던 일을 친구들에게 말해 줬고, 혹시 또 마사무네를 노리고 오는 사람이 있을까 다테 일파는 입원한 마사무네를 열심히 지켜줬어. 같은 병원으로 실려 왔던 이에야스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었어. 아마 노부나가 쪽에서 데려갔겠지.

   상처의 크기에 비해서는 비교적 빠르게 회복한 마사무네가 퇴원하고 바로 찾아간 곳은 카네츠구가 있는 곳이겠지. 묘지든 납골당이든 카네츠구는 우에스기와 함께 있을 거야. 우에스기 옆에 놓인 카네츠구의 이름을 보면서 마사무네는 조용히 그 이름을 불러 보겠지. 자기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던 목소리에 끝내 대답해 주지 않던 카네츠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거기서는 더 이상 무언가를 포기할 필요 없이 편하게 무언가를 바라고 욕심 내면서 잘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리고 돌아서서 나오겠지 "다음에 또 올게." 하면서.


   사실 마사무네가 정신을 완전히 잃었을 때 카네츠구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였어. 마사무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 카네츠구는 정장 재킷의 안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꺼냈겠지. 짤막하게 무어라 적혀 있는 그 종이를 마사무네의 손에 쥐여 줬을 거야. 그래서 현장에 경찰이 도착했을 때에는 카네츠구가 마사무네의 주먹 쥔 손을 감싸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겠지. 그 쪽지는 아마 마사무네가 병원으로 실려오던 날 입고 있던 옷 주머니에 있었을 거야. 손에 쥐고 있던 걸 구급대원이든 의사든 누군가가 주머니에 넣어 놓은 거겠지. 그 쪽지는 다테 일파와 아이가 처음 마사무네의 병문안을 왔을 때 아이가 발견했을 거야. 마사무네의 옷을 챙겨 가고 새 옷을 가지고 오던 날이었겠지. 주머니에 있는 물건들을 꺼내 놓던 중에 발견했어. 마사무네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쪽지는 아이가 잠깐 보관하고 있었겠지. 그리고 마사무네가 처음 깨어나던 날 쪽지를 건네줬을 거야. 마사무네는 종이에 쓰여 있는 게 뭔지는커녕 쪽지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종이에 쓰인 글자가 카네츠구의 글씨체라는 건 알고 있었어. 카네츠구가 일하던 모습을 옆에서 많이 지켜봤었거든. 그러다가 문득 비밀번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카네츠구가 암호를 쓰는 곳이 있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노트북밖에는 없는 것 같았을 거야. 그래서 곧장 카네츠구의 집으로 가겠지.

   카네츠구의 집은 주인이 없어졌는데도 그대로였어. 카네츠구는 가족이 없으니까 아마 명의는 유키무라한테 넘어가도록 해 놨을 거야. 유키무라는 카네츠구의 소식을 듣고 한번쯤 집에 찾아온 적은 있었겠지만, 물건을 건드리지는 않았던 모양이야. 아무튼 마사무네는 조심스레 카네츠구의 침실로 들어섰어. 이 집은 많이 들락거렸지만 침실을 들어가 본 건 처음이라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됐지. 침대 옆의 협탁에 카네츠구의 노트북이 보였어. 마사무네의 예상은 정확히 맞았어. 쪽지에 쓰여 있던 의미 모를 문자들은 카네츠구의 노트북 비밀번호였던 거야. 암호를 풀고 폴더를 이리저리 뒤져보자 여러 가지 문서와 정보들이 나왔어. 그리고 그중에는 카네츠구가 마사무네에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문서들도 많았지. 예컨대 노부나가의 계획에 관한 것들 말이야. 마사무네는 카네츠구가 남겨 놓은 그 문서들을 통해 노부나가의 계획과 그 계획 내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었어. 노트북을 덮으면서 마사무네는 다시금 카네츠구를 떠올리겠지. 돌이켜 생각해 봐도 카네츠구는 마사무네한테 너무 어려운 사람이었어. 그럼에도 카네츠구는 분명 자신을 생각해 주고 있었다고, 결이 다른 감정일지라도 카네츠구 역시 자신을 좋아해 줬을지도 모른다고, 마사무네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문득, 노트북에 새겨진 愛 자가 눈에 들어왔어. 그 위를 손가락으로 쓸면서 마사무네는 조용히 말했어.


   "고마워. 역시 나는 카네츠구가 좋아."


   그 뒤로는 다테 일파에게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겠지. 이번 싸움의 적은 노부나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싸움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던 사람이야.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제거되었지만, 마사무네를 얻을 수 없었던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와 이에야스가 가져온 마사무네의 피(일종의 샘플)을 통해 반쪽짜리 진성 현현자가 됐겠지. 하지만 다테 일파는 어떻게든 이겨낼 거야. 이 싸움에는 유키무라도 끼어들 거고, 미츠히데한테 이용당한 전적이 있는 우지나오도 참전했으면 좋겠네.

   카네츠구가 마사무네 앞에 나타나 싸웠던 그날, 노부나가는 검은 갑옷도 이미 완성했고 진성 현현의 힘을 완전히 빼앗을 방법도 찾았었어. 그래서 카네츠구를 보냈지. 마사무네를 얻는 데는 실패했지만 말이야. 어쨌든 검은 감옷은 완성되어 있는 상태였고, 다테 일파에 의해 궁지에 몰린 노부나가는 불완전한 현현의 힘으로 검은 갑옷을 사용하기로 했어. 처음에는 십여 년 전 못지않은 힘을 보여 주었지만 역시 한계가 왔겠지. 결국 노부나가는 자멸하는 결말을 맞게 될 거야. 그리고 다테 일파와 유키무라는 이런 비인간적인 실험과 그로 인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노부나가의 아지트에 있던 모든 자료를 말소하겠지. 새로운 현현자를 만드는 방법은 더 이상 없고 진성 현현자라고 해도 세상에 묻혀 함께 살아가는, 그런 엔딩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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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레스나 시점으로 생각하고 썼습니다.

2. 타이가 캐 해석이 몹시 느슨합니다. 캐붕 주의.

3. 사실 엑제 스토리 기억이 잘 안 나요. 다시 주행할 엄두는 안 나서 적당히 썼습니다.


공백 제외 3,016자




   그대가 플레이어인가?


   징그럽고 싫증이 나는 음성에 번뜩 눈이 뜨였다. 그래, 솔직한 말로 진저리가 나는 목소리였다. 그것이 금방이라도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몸을 기어에 일어나게 만들었다. 거창하게 말해 직업적인 소명 의식이든, 5년간의 싸움이 만든 습관이든, 그것도 아니면 몇 번이나 싸웠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끈질겼던 최후의 적에 대한 기억 때문이든, 어쨌거나 몸은 생리적으로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멋대로 움직였다.

   통성을 삼키며 몸을 굴리고 바라본 곳에는 족히 2m는 되어 보이는 몸체가 서 있었다. 몸 곳곳으로 뻗은 형광의 문양과 파츠만이 그 형상이 그림자가 아님을 알려 주었다. 그의 이름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손에 넣고자 하는 힘의 이름, 크로노스였다. 그리고 제게 말을 걸어 오던 그 목소리는 분명…….


   “단 마사무네……!”

   단 마사무네? 아, 전 플레이어의 이름인가.

   “뭐?”

   나의 이름은 크로노스. 이 세계의 시간을 주관하는 존재. 그대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상황 파악은 되지 않았어도 크로노스가 적의를 갖지 않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러고 나자 자연히 눈동자가 주변 환경을 훑기 시작했다. 공간이 이상했다. 배경과 오브젝트의 구분이 되지도 않을 만큼 ― 애초에 물체가 있을 만한 공간도 아닌 것 같지만 ― 온통 새까맣기만 한 공간에, 군데군데 액정이 깨진 화면처럼 노이즈가 끼어 있었다. 꼭 데이터의 편린 같았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 적지 않게 본 광경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나 정신이 다른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그랬다. 그러나 주어진 정보가 거의 없는 이 황량한 곳에서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 정도는 파악해야 했다.


   이곳 말인가? 글쎄……. 그대의 무의식과 게임 데이터가 혼재하여 만들어진 임시적인 공간이라고만 말해 두지.

   “내가 꾸고 있는 꿈에 크로니클의 데이터가 간섭해 만들어진 곳이라는 건가.”

   그러나 이 상태가 오래 유지되지는 않을 테지.

   “에러니까.”

   이해가 빨라 좋구나.


   그렇다면 크로노스가 단 마사무네의 목소리인 것도 납득이 되었다. 기억 속에서 저 모습에 익숙하게 매치되는 목소리가 그의 것이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만 꿈이라. 한번 눈이 감기면 정신을 잃은 채 시간을 얼마나 보낼지 몰라 의식은 끝까지 붙잡고 있으려 했지만, 아무래도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이 나은지도 모른다. 적어도 죽지는 않았다는 의미일 테니.

   얼추 상황이 파악되면서 머리카락 끝까지 퍼져 있던 긴장감이 누그러들자 다음으로 찾아온 것은 통증이었다. 지금 자신이 인식하는 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현실의 자신은 게임 드라이버를 차고 있을 위치, 단전쯤부터 전기처럼 온몸으로 퍼지는 감각이 선명하게 몸 구석구석을 난도질했다. 터지듯 내지를 뻔한 비명은 씹어 삼켰으나, 몸은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부딪히는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강렬한 통증에 미미한 감각이 가려져 버린 것인지, 그저 이곳이 무의식 속에 세워진 가상 공간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그래도 여유가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익숙하게 자조했다.

   어쨌든 이곳에서도 몸은 제 마음처럼 되어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래도 팔자 좋게 누워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부서뜨린 과거를 돌려놓아야 했다.


   조바심낼 것 없다. 이곳에서 그대가 느끼는 시간과 현실의 시간은 다르게 흐를 테니.

   “누가 조바심을 냈다고. 시간 낭비하는 게 싫을 뿐이야.”


   어딘가에서 줄곧 들려 오던 시계의 초침 소리가 멎었다. 은근하게 신경을 긁던 노이즈도 떨림이 그쳤다. PAUSE. 지금 여기에서는 의미 없는 능력이지만, 현실의 자신에게, 아니,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필요한 힘이었다. 역시, 크로노스와 꿈속에서 한가하게 대화나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지키고 싶은 게 있나 보구나.

   “쓸데없는 잡담은 됐어. 나는 그 힘을…….”

   그런데 그대의 시간은 다시 멈춘 것 같군. 아니,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가?


   크로노스의 목소리는 기어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나, 이미 인식된 언어와 의미는 무의식의 공간에 시각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광장의 거대한 시계 두 개가 크로노스의 양 날개처럼 솟아올랐다. 그리고 거대한 구조물의 사이, 크로노스의 등 뒤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의 형상에는 여러 실루엣이 겹쳐 있었으나, 누구의 모습인지는 뻔히 알았다. 고개를 돌렸다. 피했다는 표현이 더 걸맞은지도 모른다.

   두 시계의 바늘은 보란 듯이 멈춰 있었으나, 크로노스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그중 하나는 또 보란 듯이 역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 역시 2년 전 단 마사무네에게서 본 기억으로부터 온 행동이리라. 한마디로, 악취미라는 소리다.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크로노스의 손이 뻗은 자리에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데이터 조각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0과 1만으로 구성된 숫자의 무리는 순식간에 거대한 태엽의 모양을 형성했으나, 그렇게 만들어진 구조물이 혼자 움직이지는 않았다. 바닥에 굳게 박힌 채 그대로 멈춰 있을 뿐이었다. 태엽의 등장과 함께 시계의 움직임도 다시 멈췄다.

   크로노스는 팔을 내리지 않은 채 그대로 허공에 주먹을 쥐었다. 보이는 것은 없어도 분명 존재하고 있는 듯한 무언가를 쥔 채 그는 반시계 방향으로 손을 돌렸다. 드르륵. 기계 파츠의 소리가 마땅한 진원지 없이 공간 전체에서 울려 퍼졌다. 드르르륵. 거대한 소리는 크로노스의 움직임에 맞추어 이 좁은 세계를 흔들고 있었다.


   시계의 태엽이 감기는 동안에는 시간도 멈추지.

   “뭐?”

   힘을 거스르고 뒤로 돌아가는 게 꼭 과거로 회귀하려는 움직임 같기도 하지 않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그것참 느긋하게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플레이어군그래.

   “알면 본론을 말해.”

   그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또다시 시간이 멈춘, 과거로 돌아가려는 듯한 그대 말이지.

   “또 그 얘기냐…….”

   하지만 거꾸로 돌던 태엽은 결국 제자리를 찾아가려 하지.


   그렇게 말하고 크로노스는 무언가를 틀어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검은 바닥에 박혀 있던 태엽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경계를 알 수 없는 이 공간을 가득 채우던 태엽 소리는 멎고, 그 대신 시곗바늘 소리가 시작되었다. 크로노스의 뒤에 세워진 시계가 움직이면서 나는 소리였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는 작고 미약했으나, 말소리에 가려지지 않을 만큼 또렷했다.


   이렇게 현재가 되어 시곗바늘을 움직이지 않는가. 과거를 향하던 힘이 현재를 움직여 미래로 나아가는 힘이 된다고 생각하면 재미있지 않나?


   나 자신이 떠올린 이야기가 아니었다. 잃을 것이 모두 사라졌음을 깨달은 어느 날부터 과오를 고쳐야 한다는 생각만 했던 자신이 할 만한 말은 아니지 않은가. 마저 매듭짓지 못한 ― 2년 전에 끝난 것인 줄만 알았던 일이 다시 돌아왔다. 그렇기에 나는 아직 ‘지금’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내가 뒤돌아 있는 시간은 지금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시간으로 치환된다. 그것뿐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크로노스의 작품이다.


   말하지 않았나, 이곳은 그대의 무의식이 만든 곳이라고.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크로노스의 자아도 그대의 일부라는 것이지.

   “뭐?”

   바이러스에게는 숙주가 필요하듯, 게임의 캐릭터에게는 플레이어가 필요한 법이지. 내가 말하는 바는 곧 그대의 생각이기도 하다.

   “……시답잖은 소리를.”

   그러나 으레 꿈이라는 것이 그렇듯 깨어나고 나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지. 그대는 나를 잊어도 좋다. 지금 잊더라도 언젠가는 깨닫게 되겠지. 그때가 너무 늦게 찾아오지 않기를 빌겠네.


   어느새, 공간이 무너지고 있었다. 크로노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세상의 균열이 발밑까지 와 닿아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바라본 곳에서는, 이곳에서의 기억과 운명을 함께할 크로노스가 덤덤히 깨져 나가고 있었다. 초연하게 조각나고 있는 형상들 사이로, 시계와 함께 나타났던 실루엣이 보였다. 자신이 지켜야 할, 지키고 싶은.

   세계에 암전이 찾아왔다. 시계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1. 본편 후반부의 if 루트라고 생각합시다. 사실 저도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서 이렇게 됐는지 정확히 생각을 안 해 놨어요.


공백 제외 2,318자




   새로운 보금자리가 된 집은 한 달이 다 되었음에도 좀처럼 온기가 머물지를 않았다. 부족한 것은 없었다. 사용한 흔적이 있는 물건은 충분했고, 가구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되었다. 집의 주인들도 집을 반나절 이상 비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집은 꼭 몇 달은 방치된 것처럼 싸늘했다. 미오는 문을 열기 전 제 손을 그러쥐어 보았다. 쇠로 된 문고리와 같이 온기가 없는 손이었다.

   거실을 비추는 조명의 빛깔은 따뜻해 보였으나, 그리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바깥보다는 따스할 테지만, 그것도 그저 사람 사는 집의 흉내일 뿐이었다. 미오가 외출을 마치고 돌아왔다. 카디건을 벗기엔 쌀쌀한 집이었어도, 그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없을 터다.

   집은 비어 있지 않았다. 이 집의 주인은 미오뿐이 아니었다.


   “왔어? 미오.”

   “네…. 아, 응.”


   거실에는 남편이, 타이가가 있었다. 일찍 귀가하는 날이면 그는 일부러 거실에서 제 아내를 기다리곤 했다. 급히 처리할 일이 있을 땐 회사의 서류를 읽을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물잔을 앞에 두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도 그의 앞에는 반쯤 빈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컵에 담긴 것은 언제나 그렇듯 투명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됐는데.”

   “내가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부담 느낄 필요 없어.”


   벽에 걸린 시계는 2시를 훌쩍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귀가가 늦는 날은 으레 몸이 지치기 마련이니 기다려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런 시간까지 밖에 있어야 했던 것도 결국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가 이어가기로 한 종족과 운명의 굴레 탓이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깨져 나가는 색색의 유리 조각이 찬란하게 빛났다. 빛났었다.


   “미오?”

   “아, 으응, 조금 피곤해서……. 씻고 올게요.”

   “응. 수고 많았어.”


   미오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고민이라도 하듯 잠시 머뭇거리던 손은 온수를 틀고 나서야 옷가지를 하나씩 벗겨 내기 시작했다. 깨끗하고 하얀 몸에 새겨진 검은 문양은 그의 것이 아닌 것처럼 위화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좁은 곳에 따뜻한 물줄기가 뿌려지고서야 생기 없는 공간에는 조금이나마 온기가 돌았다. 가늘게 뻗은 손가락이 허공에 피어나는 수증기를 그러쥐었다. 그 안에 잡히는 것은 손바닥의 상징에 차갑게 식은 물기뿐이었다.

   이 집에 따스함이란 없었다. 주인이 있는 집임에도 생기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살도 피도 없는 무기질적인 존재의 보금자리에는 그와 닮은 무기질적인 공기만 남을 뿐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물소리가 그쳤다. 달빛을 닮은 향을 머금은 몸이 부드러운 천에 감싸였다. 조용히 열린 문틈으로 온기는 도망이라도 치듯 빠르게도 달아났다. 풀어지는 수증기의 덩어리 너머로 낯선 음성이 들려 왔다. 이 집에 살게 된 이래 가장 많이 들은 목소리면서도,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음색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목소리가 그리는 악보는 또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스스로 되뇌듯 중얼거림에 가깝게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였다.


   “타이가?”

   “나왔어?”

   “응. 그보다, 방금…….”

   “아, 들렸구나.”


   타이가는 실없이 웃으며 짐짓 앉은 자세를 고치다가, 이내 조금 불그스름해진 듯한 제 볼을 긁적였다. 그러고 보면 미오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타이가와 함께 보내면서도, 그가 흥얼거리는 모습 한 번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생소하고 놀라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능하면 다시 한번 듣고 싶었다. 그가 부르던 노래를. 


   “타이가가 노래하는 거 처음 봐요.”

   “응, 즐겨 부르는 편은 아니니까.”

   “그러고 보면 음악을 듣는 것도 본 적 없네요.”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그래서인지 아는 음악도 거의 없어. 근데 왜일까, 이 노래는 어릴 적부터 줄곧 기억에 남아 있어서 한 번씩 흥얼거리게 돼.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 누가 들려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데.”


   기억에 없는 추억의 흔적을 더듬으며, 타이가는 어느새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웃음 짓고 있었다. 그의 어깨 위로 미오가 비스듬히 기대었다. 젖은 머리칼에 젖어 가는 옷이 미오의 향기에 물들어 갔다. 부부의 눈앞으로는 달빛이 창을 넘어 쏟아져 오고 있었다. 인위적인 조명보다는 따뜻한 빛이었다.


   “타이가.”

   “응?”

   “그 노래, 더 불러 줄 수 있어?”

   “……응.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미오의 미소가 타이가의 어깨를 간질였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던 타이가는, 이번만큼은 머뭇거림도 망설임도 없이 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오직 미오에게만 부드럽고 상냥할 수 있는 음성이 허전한 집 안을 채워 갔다. 미오는 그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덮인 시야로 나무 집의 영상이 떠올랐다. 분명 몇십 년은 된 건물일 터였다. 사람이 살고 있을까 싶을 만큼 부실하게 관리된 그 가옥에서는 굳게 닫힌 창틈으로 종종 바이올린의 연주 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오곤 했다. 자신감보다는 되려 고민과 무서움이 느껴지는 그 연주를, 미오는 좋아했다. 그 음악의 주인이 종종 저도 모르게 들려주고는 하던 흥얼거림을 사랑했다. 늘 입속으로 부르던 그 노래를 이제는 그의 목소리로 들을 수는 없겠지만, 그 악보가 이 집에도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타이가의 입으로 연주되고 있었다.

   한 바퀴가 다 돌고 난 후, 노래는 멈췄다. 기나긴 삶 앞에서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으나, 아직 귓가를 맴도는 멜로디는 미오의 웃음을 잠시나마 이어 가기에는 충분했다. 감기려는 눈을 떠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지금도 이 집의 공기를 차갑게 식히고 있는 몸의 일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포근한 눈동자였다. 상념이 일었다. 온기를 머금은 노랫소리에 잠시간 데워진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 의미 없는 생각을, 타이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밀어낸다.


   “미오.”

   “응.”

   “침실로 갈까.”

   “…응.”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걸음을 뗐다. 맨발의 걸음걸음이 떠난 곳에는 차게 식은 공기밖에는 남지 않을 테지만, 오늘은 사람이 없는 이 집에도 미지근하게나마 온기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 새파란 피가 흐르는 이들은 느끼지 못할 온기가, 그럼에도 그들을 위해 아주 잠시라도 머물다 갈지도 모른다.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사는 그들을 스쳐 갔던 노래처럼, 기나긴 잔상을 남길 온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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