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브레스나 시점으로 생각하고 썼습니다.

2. 타이가 캐 해석이 몹시 느슨합니다. 캐붕 주의.

3. 사실 엑제 스토리 기억이 잘 안 나요. 다시 주행할 엄두는 안 나서 적당히 썼습니다.


공백 제외 3,016자




   그대가 플레이어인가?


   징그럽고 싫증이 나는 음성에 번뜩 눈이 뜨였다. 그래, 솔직한 말로 진저리가 나는 목소리였다. 그것이 금방이라도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몸을 기어에 일어나게 만들었다. 거창하게 말해 직업적인 소명 의식이든, 5년간의 싸움이 만든 습관이든, 그것도 아니면 몇 번이나 싸웠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끈질겼던 최후의 적에 대한 기억 때문이든, 어쨌거나 몸은 생리적으로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멋대로 움직였다.

   통성을 삼키며 몸을 굴리고 바라본 곳에는 족히 2m는 되어 보이는 몸체가 서 있었다. 몸 곳곳으로 뻗은 형광의 문양과 파츠만이 그 형상이 그림자가 아님을 알려 주었다. 그의 이름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손에 넣고자 하는 힘의 이름, 크로노스였다. 그리고 제게 말을 걸어 오던 그 목소리는 분명…….


   “단 마사무네……!”

   단 마사무네? 아, 전 플레이어의 이름인가.

   “뭐?”

   나의 이름은 크로노스. 이 세계의 시간을 주관하는 존재. 그대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상황 파악은 되지 않았어도 크로노스가 적의를 갖지 않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러고 나자 자연히 눈동자가 주변 환경을 훑기 시작했다. 공간이 이상했다. 배경과 오브젝트의 구분이 되지도 않을 만큼 ― 애초에 물체가 있을 만한 공간도 아닌 것 같지만 ― 온통 새까맣기만 한 공간에, 군데군데 액정이 깨진 화면처럼 노이즈가 끼어 있었다. 꼭 데이터의 편린 같았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 적지 않게 본 광경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나 정신이 다른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그랬다. 그러나 주어진 정보가 거의 없는 이 황량한 곳에서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 정도는 파악해야 했다.


   이곳 말인가? 글쎄……. 그대의 무의식과 게임 데이터가 혼재하여 만들어진 임시적인 공간이라고만 말해 두지.

   “내가 꾸고 있는 꿈에 크로니클의 데이터가 간섭해 만들어진 곳이라는 건가.”

   그러나 이 상태가 오래 유지되지는 않을 테지.

   “에러니까.”

   이해가 빨라 좋구나.


   그렇다면 크로노스가 단 마사무네의 목소리인 것도 납득이 되었다. 기억 속에서 저 모습에 익숙하게 매치되는 목소리가 그의 것이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만 꿈이라. 한번 눈이 감기면 정신을 잃은 채 시간을 얼마나 보낼지 몰라 의식은 끝까지 붙잡고 있으려 했지만, 아무래도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이 나은지도 모른다. 적어도 죽지는 않았다는 의미일 테니.

   얼추 상황이 파악되면서 머리카락 끝까지 퍼져 있던 긴장감이 누그러들자 다음으로 찾아온 것은 통증이었다. 지금 자신이 인식하는 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현실의 자신은 게임 드라이버를 차고 있을 위치, 단전쯤부터 전기처럼 온몸으로 퍼지는 감각이 선명하게 몸 구석구석을 난도질했다. 터지듯 내지를 뻔한 비명은 씹어 삼켰으나, 몸은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부딪히는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강렬한 통증에 미미한 감각이 가려져 버린 것인지, 그저 이곳이 무의식 속에 세워진 가상 공간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그래도 여유가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익숙하게 자조했다.

   어쨌든 이곳에서도 몸은 제 마음처럼 되어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래도 팔자 좋게 누워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부서뜨린 과거를 돌려놓아야 했다.


   조바심낼 것 없다. 이곳에서 그대가 느끼는 시간과 현실의 시간은 다르게 흐를 테니.

   “누가 조바심을 냈다고. 시간 낭비하는 게 싫을 뿐이야.”


   어딘가에서 줄곧 들려 오던 시계의 초침 소리가 멎었다. 은근하게 신경을 긁던 노이즈도 떨림이 그쳤다. PAUSE. 지금 여기에서는 의미 없는 능력이지만, 현실의 자신에게, 아니,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필요한 힘이었다. 역시, 크로노스와 꿈속에서 한가하게 대화나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지키고 싶은 게 있나 보구나.

   “쓸데없는 잡담은 됐어. 나는 그 힘을…….”

   그런데 그대의 시간은 다시 멈춘 것 같군. 아니,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가?


   크로노스의 목소리는 기어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나, 이미 인식된 언어와 의미는 무의식의 공간에 시각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광장의 거대한 시계 두 개가 크로노스의 양 날개처럼 솟아올랐다. 그리고 거대한 구조물의 사이, 크로노스의 등 뒤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의 형상에는 여러 실루엣이 겹쳐 있었으나, 누구의 모습인지는 뻔히 알았다. 고개를 돌렸다. 피했다는 표현이 더 걸맞은지도 모른다.

   두 시계의 바늘은 보란 듯이 멈춰 있었으나, 크로노스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그중 하나는 또 보란 듯이 역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 역시 2년 전 단 마사무네에게서 본 기억으로부터 온 행동이리라. 한마디로, 악취미라는 소리다.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크로노스의 손이 뻗은 자리에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데이터 조각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0과 1만으로 구성된 숫자의 무리는 순식간에 거대한 태엽의 모양을 형성했으나, 그렇게 만들어진 구조물이 혼자 움직이지는 않았다. 바닥에 굳게 박힌 채 그대로 멈춰 있을 뿐이었다. 태엽의 등장과 함께 시계의 움직임도 다시 멈췄다.

   크로노스는 팔을 내리지 않은 채 그대로 허공에 주먹을 쥐었다. 보이는 것은 없어도 분명 존재하고 있는 듯한 무언가를 쥔 채 그는 반시계 방향으로 손을 돌렸다. 드르륵. 기계 파츠의 소리가 마땅한 진원지 없이 공간 전체에서 울려 퍼졌다. 드르르륵. 거대한 소리는 크로노스의 움직임에 맞추어 이 좁은 세계를 흔들고 있었다.


   시계의 태엽이 감기는 동안에는 시간도 멈추지.

   “뭐?”

   힘을 거스르고 뒤로 돌아가는 게 꼭 과거로 회귀하려는 움직임 같기도 하지 않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그것참 느긋하게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플레이어군그래.

   “알면 본론을 말해.”

   그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또다시 시간이 멈춘, 과거로 돌아가려는 듯한 그대 말이지.

   “또 그 얘기냐…….”

   하지만 거꾸로 돌던 태엽은 결국 제자리를 찾아가려 하지.


   그렇게 말하고 크로노스는 무언가를 틀어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검은 바닥에 박혀 있던 태엽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경계를 알 수 없는 이 공간을 가득 채우던 태엽 소리는 멎고, 그 대신 시곗바늘 소리가 시작되었다. 크로노스의 뒤에 세워진 시계가 움직이면서 나는 소리였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는 작고 미약했으나, 말소리에 가려지지 않을 만큼 또렷했다.


   이렇게 현재가 되어 시곗바늘을 움직이지 않는가. 과거를 향하던 힘이 현재를 움직여 미래로 나아가는 힘이 된다고 생각하면 재미있지 않나?


   나 자신이 떠올린 이야기가 아니었다. 잃을 것이 모두 사라졌음을 깨달은 어느 날부터 과오를 고쳐야 한다는 생각만 했던 자신이 할 만한 말은 아니지 않은가. 마저 매듭짓지 못한 ― 2년 전에 끝난 것인 줄만 알았던 일이 다시 돌아왔다. 그렇기에 나는 아직 ‘지금’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내가 뒤돌아 있는 시간은 지금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시간으로 치환된다. 그것뿐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크로노스의 작품이다.


   말하지 않았나, 이곳은 그대의 무의식이 만든 곳이라고.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크로노스의 자아도 그대의 일부라는 것이지.

   “뭐?”

   바이러스에게는 숙주가 필요하듯, 게임의 캐릭터에게는 플레이어가 필요한 법이지. 내가 말하는 바는 곧 그대의 생각이기도 하다.

   “……시답잖은 소리를.”

   그러나 으레 꿈이라는 것이 그렇듯 깨어나고 나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지. 그대는 나를 잊어도 좋다. 지금 잊더라도 언젠가는 깨닫게 되겠지. 그때가 너무 늦게 찾아오지 않기를 빌겠네.


   어느새, 공간이 무너지고 있었다. 크로노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세상의 균열이 발밑까지 와 닿아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바라본 곳에서는, 이곳에서의 기억과 운명을 함께할 크로노스가 덤덤히 깨져 나가고 있었다. 초연하게 조각나고 있는 형상들 사이로, 시계와 함께 나타났던 실루엣이 보였다. 자신이 지켜야 할, 지키고 싶은.

   세계에 암전이 찾아왔다. 시계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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