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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편 후반부의 if 루트라고 생각합시다. 사실 저도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서 이렇게 됐는지 정확히 생각을 안 해 놨어요.
공백 제외 2,318자
새로운 보금자리가 된 집은 한 달이 다 되었음에도 좀처럼 온기가 머물지를 않았다. 부족한 것은 없었다. 사용한 흔적이 있는 물건은 충분했고, 가구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되었다. 집의 주인들도 집을 반나절 이상 비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집은 꼭 몇 달은 방치된 것처럼 싸늘했다. 미오는 문을 열기 전 제 손을 그러쥐어 보았다. 쇠로 된 문고리와 같이 온기가 없는 손이었다.
거실을 비추는 조명의 빛깔은 따뜻해 보였으나, 그리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바깥보다는 따스할 테지만, 그것도 그저 사람 사는 집의 흉내일 뿐이었다. 미오가 외출을 마치고 돌아왔다. 카디건을 벗기엔 쌀쌀한 집이었어도, 그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없을 터다.
집은 비어 있지 않았다. 이 집의 주인은 미오뿐이 아니었다.
“왔어? 미오.”
“네…. 아, 응.”
거실에는 남편이, 타이가가 있었다. 일찍 귀가하는 날이면 그는 일부러 거실에서 제 아내를 기다리곤 했다. 급히 처리할 일이 있을 땐 회사의 서류를 읽을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물잔을 앞에 두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도 그의 앞에는 반쯤 빈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컵에 담긴 것은 언제나 그렇듯 투명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됐는데.”
“내가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부담 느낄 필요 없어.”
벽에 걸린 시계는 2시를 훌쩍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귀가가 늦는 날은 으레 몸이 지치기 마련이니 기다려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런 시간까지 밖에 있어야 했던 것도 결국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가 이어가기로 한 종족과 운명의 굴레 탓이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깨져 나가는 색색의 유리 조각이 찬란하게 빛났다. 빛났었다.
“미오?”
“아, 으응, 조금 피곤해서……. 씻고 올게요.”
“응. 수고 많았어.”
미오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고민이라도 하듯 잠시 머뭇거리던 손은 온수를 틀고 나서야 옷가지를 하나씩 벗겨 내기 시작했다. 깨끗하고 하얀 몸에 새겨진 검은 문양은 그의 것이 아닌 것처럼 위화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좁은 곳에 따뜻한 물줄기가 뿌려지고서야 생기 없는 공간에는 조금이나마 온기가 돌았다. 가늘게 뻗은 손가락이 허공에 피어나는 수증기를 그러쥐었다. 그 안에 잡히는 것은 손바닥의 상징에 차갑게 식은 물기뿐이었다.
이 집에 따스함이란 없었다. 주인이 있는 집임에도 생기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살도 피도 없는 무기질적인 존재의 보금자리에는 그와 닮은 무기질적인 공기만 남을 뿐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물소리가 그쳤다. 달빛을 닮은 향을 머금은 몸이 부드러운 천에 감싸였다. 조용히 열린 문틈으로 온기는 도망이라도 치듯 빠르게도 달아났다. 풀어지는 수증기의 덩어리 너머로 낯선 음성이 들려 왔다. 이 집에 살게 된 이래 가장 많이 들은 목소리면서도,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음색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목소리가 그리는 악보는 또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스스로 되뇌듯 중얼거림에 가깝게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였다.
“타이가?”
“나왔어?”
“응. 그보다, 방금…….”
“아, 들렸구나.”
타이가는 실없이 웃으며 짐짓 앉은 자세를 고치다가, 이내 조금 불그스름해진 듯한 제 볼을 긁적였다. 그러고 보면 미오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타이가와 함께 보내면서도, 그가 흥얼거리는 모습 한 번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생소하고 놀라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능하면 다시 한번 듣고 싶었다. 그가 부르던 노래를.
“타이가가 노래하는 거 처음 봐요.”
“응, 즐겨 부르는 편은 아니니까.”
“그러고 보면 음악을 듣는 것도 본 적 없네요.”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그래서인지 아는 음악도 거의 없어. 근데 왜일까, 이 노래는 어릴 적부터 줄곧 기억에 남아 있어서 한 번씩 흥얼거리게 돼.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 누가 들려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데.”
기억에 없는 추억의 흔적을 더듬으며, 타이가는 어느새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웃음 짓고 있었다. 그의 어깨 위로 미오가 비스듬히 기대었다. 젖은 머리칼에 젖어 가는 옷이 미오의 향기에 물들어 갔다. 부부의 눈앞으로는 달빛이 창을 넘어 쏟아져 오고 있었다. 인위적인 조명보다는 따뜻한 빛이었다.
“타이가.”
“응?”
“그 노래, 더 불러 줄 수 있어?”
“……응.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미오의 미소가 타이가의 어깨를 간질였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던 타이가는, 이번만큼은 머뭇거림도 망설임도 없이 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오직 미오에게만 부드럽고 상냥할 수 있는 음성이 허전한 집 안을 채워 갔다. 미오는 그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덮인 시야로 나무 집의 영상이 떠올랐다. 분명 몇십 년은 된 건물일 터였다. 사람이 살고 있을까 싶을 만큼 부실하게 관리된 그 가옥에서는 굳게 닫힌 창틈으로 종종 바이올린의 연주 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오곤 했다. 자신감보다는 되려 고민과 무서움이 느껴지는 그 연주를, 미오는 좋아했다. 그 음악의 주인이 종종 저도 모르게 들려주고는 하던 흥얼거림을 사랑했다. 늘 입속으로 부르던 그 노래를 이제는 그의 목소리로 들을 수는 없겠지만, 그 악보가 이 집에도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타이가의 입으로 연주되고 있었다.
한 바퀴가 다 돌고 난 후, 노래는 멈췄다. 기나긴 삶 앞에서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으나, 아직 귓가를 맴도는 멜로디는 미오의 웃음을 잠시나마 이어 가기에는 충분했다. 감기려는 눈을 떠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지금도 이 집의 공기를 차갑게 식히고 있는 몸의 일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포근한 눈동자였다. 상념이 일었다. 온기를 머금은 노랫소리에 잠시간 데워진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 의미 없는 생각을, 타이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밀어낸다.
“미오.”
“응.”
“침실로 갈까.”
“…응.”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걸음을 뗐다. 맨발의 걸음걸음이 떠난 곳에는 차게 식은 공기밖에는 남지 않을 테지만, 오늘은 사람이 없는 이 집에도 미지근하게나마 온기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 새파란 피가 흐르는 이들은 느끼지 못할 온기가, 그럼에도 그들을 위해 아주 잠시라도 머물다 갈지도 모른다.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사는 그들을 스쳐 갔던 노래처럼, 기나긴 잔상을 남길 온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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