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 제외 2,340자




   마계 기사에게 밤낮의 시간 구분은 크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밤이 되면 호러의 출현 가능성이 높아지니 의미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다만, 휴식 시간을 결정하는 데에는 큰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다. 마계 기사에게 보장된 쉬는 시간이란 없었다. 억울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다리에 기대어 강 건너편의 야경을 보고 있자니 이 광경을 마음 놓고 감상할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다. 도가이 류우가는 오늘도 도시의 밤을 지키고 있었다.

   밤이 깊어도 도시는 조용해질 줄을 몰랐다. 세상의 뒤편에서 숨다시피 살아가야 하는 마계 기사로서는 그리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인간의 삶과 번영의 증거였으니, 류우가는 그게 싫지 않았다. 밤의 거리에는 피로해 보이는 인간이 많았지만, 의외로 웃고 있는 인간도 몹시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족과 통화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웃음이 가장 좋았다. 곁에 있지 않아도 소중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그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 웃음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마계 기사를 이끌어주는 등대 빛과 같았다. 적어도 도가이 류우가에게는 그랬다.

   류우가의 손가락 위에서 방울 소리가 울렸다. 자르바의 부름이었다. 검을 쥐고 있는 류우가의 손에도 조금 힘이 들어갔다. 일단 자르바 위를 덮고 있는 것부터 열어 주었다.


   “류우가.”

   “응. 알고 있어.”


   멀지 않은 곳에서 호러의 기척이 느껴졌다. 호러마다 느껴지는 기운이 다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할 것이었으나, 이 정도 크기의 기운이라면 류우가가 아는 한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야경 구경을 끝내야 한다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류우가는 다리를 따라 달렸다. 목적지는 하나였다.

   류우가가 도착한 곳은 문이 잠겨 있어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고층 건물의 옥상이었다. 그 옥상의 난간 위에 손을 얹은 채 서 있는 뒷모습은 류우가가 몹시도 잘 아는 존재였다. 검은 하늘과 달과 달빛에 드러나는 마천루를 배경으로, 남자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진가.”

   “왔나, 황금기사. 역시 빠르네.”


   여유가 넘치는 목소리였다. 류우가의 손이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눈앞의 등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니, 그건 류우가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여전히 류우가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남자는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투지나 살기는커녕 적대심조차도 드러내지 않았다. 류우가가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든 진가에게는 상관없었다. 마찬가지로, 진가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행동을 보이든 류우가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대치 아닌 대치 상태로 오랜 시간이 흐른 듯도 했지만, 사실 류우가의 검이 검집에서 뽑히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검을 겨누며 류우가가 진가에게 달려들었다. 내리찍듯 몸통 쪽으로 검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진가의 몸에는 닿지 못했다. 가로검에 닿은 것은 밤하늘보다 더 까만 가죽을 두른 검이었다.

   몇 차례 두 자루의 검이 맞부딪쳤다. 힘겨루기와 함께 합을 주고받은 것은 몇 번이었으나, 불과 몇 초밖에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제 몸을 향해 들어오는 칼날을 튕겨내고, 진가의 다리가 류우가의 복부를 가격했다. 가볍게 휘두른 듯 보였으나 힘에 밀린 류우가는 벌써 저만큼 날아가 있었다. 진가가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가까스로 착지한 류우가가 자세를 고쳐잡고 재차 달려들 기세로 정면을 바라보았으나, 웃음소리가 감돌던 자리에는 벌써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새카만 구두 굽은 조금 더 높은 위치에서 류우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잠시 바람을 쐬러 나온 것뿐이야.”

   “뭐?”

   “조급해할 것 없어. 어차피 머지않아 내 손에 없어질 순간이 올 테니까.”

   “웃기지 마!”


   검집이 검을 삼키기 무섭게 검집의 장식이 모양을 바꿨다. 류우가가 손잡이를 고쳐잡았다. 진가를 향해 검이 휘둘러지자, 검집의 양옆으로 튀어나와 있던 얄쌍한 모양새의 표창들이 제자리를 벗어나 표적을 향해 날아갔다. 제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는 날붙이를 쳐내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수고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 공격으로 무언가 대단한 결과를 낼 수 있다고는 류우가도 생각하지 않았다. 잠시 시선 뺏기일 뿐이었다. 단단한 땅을 박차고 류우가도 진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진가가 땅 위로 단단히 발을 디뎠다. 온몸을 던져 부딪쳐 오는 황금기사를 맞이할 준비였다. 새카맣게 뒤틀려 있는 검집이 은같이 빛나는 검을 뱉었다. 달빛을 담은 듯한 두 자루의 검이 부딪쳤다. 검을 사이에 둔 힘겨루기가 또 한 번 이어졌다.


   “정말 꽉 막힌 기사시군. 가끔씩은 달구경이라도 하면서 쉬는 게 어때?”


   류우가의 힘을 요령 좋게 받아넘기며 진가가 반 바퀴 돌았다. 그와 함께 류우가의 몸도 진가의 몸에 맞추어 돌아갔다. 진가의 눈에 담겼던 달이 류우가의 눈동자 속으로 옮겨 갔다. 류우가의 시야에는 하늘을 메운 달이 가득 들어찼다. 그런 달을 등에 지고 진가는 웃고 있었다.


   “자, 봐. 달이란 건 예쁘지 않나?”

   “호러와 노닥거릴 시간은 없어!”

   “황금기사는 참 바쁘시겠어.”


   잔뜩 얼굴을 구긴 채 진가를 노려보던 류우가가 포효하듯 소리쳤다. 그와 함께, 류우가의 검이 진가의 검을 밀어내듯 튕겨내고 크게 공기를 갈랐다. 어이쿠. 반쯤 장난기가 섞인 듯한 목소리를 내며, 진가는 검의 궤적을 피해 흘러가듯 류우가의 등 뒤로 옮겨 갔다. 그러나 류우가가 등 뒤로 검을 휘둘렀을 때 그 자리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검에 갈라지고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검은 연기 같은 기척만이 잠시 그 자리에 머물렀다 흩어질 뿐이었다.


   “곧 나의 왕국이 시작될 시간이 온다. 성에 초대 정도는 해 주지.”


   꼭 달로 사라진 듯 목소리는 달빛과도 같이 사방으로 내려앉는 듯했다. 길지 않은 목소리를 끝으로 진가의 기척은 완전히 사라졌다. 표적이 사라진 검은 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진가…….”


   투박한 손가락이 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그러쥐었다. 진가의 흔적을 쫓아가듯 달을 바라보는 눈동자와 칼날에 달그림자가 비쳤다. 그의 말마따나 아름다운 자태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달을 담던 검날은 검집으로 돌아갔다. 달을 뒤로하고 류우가는 다시 땅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그가 바라봐야 할 곳은 하늘이 아니었다. 류우가의 눈은 다시 지상을 향했다. 그가 지켜야 할, 인간들이 살아가는 땅이었다.


결말 1: 공백 제외 11,190자

결말 2: 공백 제외 10,232자




   처음 벨트를 찼던 날 이후로 미하라 슈지의 몸이 급변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의 형태가 바뀌거나 말단 부위의 피부가 회색 빛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온몸이 바뀌는 일은 거의 없었으나, 손가락 한 마디만 바뀌었다 해도 그게 무엇인지, 자신의 몸이 무엇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인지 미하라는 사무치도록 잘 알았다. 처음 변신을 했던 날 이후로 미하라가 어딘가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미하라 슈지의 몸은 오르페녹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오늘은 외출할 일이 없어야 했다. 늘 함께 다니곤 했던 리나도 오늘은 마리를 만나겠다고 했으니 미하라를 찾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리나는 미하라에게도 함께 가기를 권했지만, 밖에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불안했다는 말이 좀 더 정확했다. 언제 오르페녹으로 변할지 모르는 몸으로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설령 오르페녹으로 변한대도, 적어도 자신을 아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보이지만 않는다면, 미하라 슈지는 인간으로 있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누이 타쿠미가 그들에게 인간이었던 것처럼.

   여하튼 오늘만큼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걱정이든, 벨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든 다 접어 둘 수 있는 날이었다. 앞으로는 좀처럼 없을지 모르는 이런 날에 울리는 전화기의 벨 소리는 달갑지 않았다. 좋아하는 노래로 설정해 둔 노래가 이토록 듣기 싫은 적이 없었다.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이름 역시 반가울 수 없는 이름이었다. 시끄러운 물건 따위는 어디든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던져 버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으며 누워 버리고 싶었으나, 전화를 건 사람은 그런 어쭙잖은 짓을 그냥 넘어갈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미하라도 잘 알고 있었다. 여차하면 리나에게 미하라의 상태를 확인해 보라고 할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모처럼 얻은 하루간의 자유가 통째로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선택지는 없었다.


   “여보세…….”

   “××× 다리로 와. 오르페녹이다.”

   “쿠사카, 나는……!”


   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다는 듯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는 제 할 말만을 던지고 전화를 끊었다. 물론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런 것까지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도망치고 싶어 하는 미하라의 발목을 잡아 사건의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눈앞에 닥친 소용돌이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강인함 따위는 미하라에게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뿌리칠 강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몸을 내던질 만한 일말의 정의감이 있을지는 몰라도, 어찌 됐든 미하라는 늘 휩쓸리는 쪽이었다. 이미 통화가 끊어진 휴대폰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미하라가 결국 SMART BRAIN의 로고가 새겨진 은색의 가방으로 손을 뻗은 것은 유목이 주변의 물결에 쓸려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쿠사카가 그를 불러낸 장소에서는 이미 살벌한 싸움이 한창이었다. 늘 쿠사카와 함께 싸우고는 하던 이누이 타쿠미는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쿠사카와 대치하고 있는 오르페녹은 온몸이 잔뜩 뒤틀려 있어 유독 무섭고 소름 끼치는 생김새였다. 다리를 받치고 있는 콘크리트 기둥을 두세 번의 공격만으로 파내듯 부수는 비상식적인 힘도 미하라가 움츠러들 이유로는 충분했다.


   ‘저런 거랑 싸우라고……?’


   쿠사카의 이름을 부르려던 생각은 애저녁에 사라졌다. 강가를 향해 내려오는 계단 중간쯤에서 굳어 버린 몸은 좀처럼 마음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유약한 마음이 애써 눈앞의 상황을 모면하려 변명을 시작했다. 쿠사카는 누군가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서 오르페녹과 싸울 수 있을 만큼 강했다. 미하라가 끼어들어서는 괜히 방해만 될 것이 뻔했다. 아니, 뻔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일단 미하라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실제로 쿠사카는 혼자서도 오르페녹을 잘 상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르페녹이니 벨트니 하는 것들과 얽히기 시작하면서부터 미하라는 상당히 불운해졌다. 동창생을 죽이겠다며 나타나는 오르페녹이나 어디를 가도 이틀에 한 번씩은 미하라 자신과는 별 상관도 없는 오르페녹과 꼭 마주치게 되는 상황도 그랬지만, 일상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꼭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영 운이 따라 주지를 않는 것이다. 장애물 하나 없는 평지를 걷다가 혼자 자빠지는 것은 예사였고 아예 없다시피 하는 문지방에 발가락을 찧는 일도 적지 않았다. 눈앞에서 오르페녹이 설치는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자리를 피해 버리려 했던 미하라의 발치에 있던 제법 크기가 되는 돌멩이가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지면서 시선을 끌고 만 것이었다.


   “미하라!”


   이제야 그를 발견한 쿠사카가 재촉하듯 미하라의 이름을 외쳤으나, 미하라의 몸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못 했다. 오르페녹의 주의가 자신을 향해 옮겨 올 때, 인간의 형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얼굴에서 미하라는 꼭 먹이가 될 무언가를 발견한 포식자의 눈동자를 보는 것만 같았다. 공포심 탓에 꽤 과장된 것이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틀리지는 않았다. 마침 쿠사카에게 애를 먹고 있던 오르페녹은 보잘것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는 미하라를, 이용하기에 딱 좋은 물건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미하라가 느낀 부정적인 예감은 잘 틀리지를 않았다. 쿠사카와 검을 맞대고 있던 오르페녹은 요령 좋게 그를 떨쳐 내고 곧장 미하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이저와 일면식이 있는 인간에게 적당히 상처를 입혀 시선을 빼앗아 놓고 도망을 치든 공격을 하든 할 속셈인 듯했다. 미하라가 아니라 이누이 타쿠미였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작전이었겠으나, 쿠사카에게는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인간’인 ‘미하라 슈지’였다.


*


   눈을 뜨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의외로 익숙한 풍경이었다. 미하라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집은 아니었으나,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방이었다. 눈을 뜬 직후에는, 그러니까 아직 초점이 흐려서 방의 모습이 정확히 분간되지 않았던 때는 그토록 원하던 소박한 평화가 드디어 찾아왔나, 아니 사실은 그저 지독한 악몽을 꾸었을 뿐이 아닌가 싶기도 했었다. 침대 옆 조금 멀찍이 자리 하고 있는 테이블 위에 날카로운 쇳빛으로 빛나는 가방은 친절히도 그런 꿈을 깨워 주었다. 날은 이미 저물고 있었다.

   얼마 후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이 리나와 마리와 쿠사카였기에 미하라는 이곳이 어딘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마리가 복층 건물에 살면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은 다시 유성 학원의 동창생들과 연락이 닿았던 때부터 알고 있었다. 제일 먼저 방으로 들어온 리나와 마리는 바로 조금 전까지는 밖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이 뺨이나 목덜미에 지저분하게 붙어 있는 게 아무래도 이곳까지는 뛰어온 것 같았다.


   “미하라! 몸은 괜찮아?”

   “어…… 으응. 그런 것 같아.”


   반사적으로 미하라의 손에 복부 언저리로 향했다. 옷 위로 슬슬 문질러 보니 피부가 아린 것 외에는 크게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그게 묘하게 위화감이 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힘이 풀린 듯 이불 위로 머리를 떨구는 리나와 마리에게 어색하게 웃어 주며, 미하라는 힐끔 문 쪽을 보았다. 쿠사카는 모든 게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미하라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쿠사카의 태도야 항상 그런 식이었지만, 미하라는 그 표정을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쿠사카의 눈은 미하라에 대한 메시지를 조금도 거르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미하라가 자신의 몸에서 느끼고 있는 위화감과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아니, 그것 자체나 다름없었다.

   리나와 마리가 자리를 비켜 주기까지는 생각 이상으로 시간이 걸렸다. 리나의 잔소리가 끝날 즈음에 케타로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웃을 만한 일로 모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온종일 걱정의 말이나 나무람만을 말할 수는 없었다. 미하라와 쿠사카를 제외한 세 사람은 의외라고 할 것도 없이 이야기가 잘 통했고, 그들이 모인 이유였던 미하라는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 있었다. 시끄러운 분위기에는 어울릴 생각도 없고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던 쿠사카는 일찍이 방을 떠났다. 케타로까지 올라와 있는 이상 세탁소를 누가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웃으며 말했지만, 적어도 미하라는 그저 쿠사카 본인이 이 자리를 뜨고 싶어 할 뿐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런 쿠사카가 다시 방으로 들어온 것은 한 시간이나 지나서였다.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고, 방해꾼들이 사라졌기에 돌아온 것뿐이었다. 리나의 잔소리도,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하는 사건에 깊게 얽혀 있는 인물들이 자기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드는 모습도 결코 좋아하는 것들은 아니었지만, 지금만큼은 누구 한 명이라도 방문을 열고 들어와 줬으면 좋겠다고 미하라는 생각했다. 물론 늘 그랬듯 행운의 여신은 미하라를 봐 주지 않았다.


   “……오르페녹은 어떻게 됐어?”

   “내가 왜 왔는지 너도 알지 않을까나?”


   어렴풋이 느꼈던 나쁜 예감도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입을 다물어 버리는 상대에게 콧방귀를 뀌어 보이던 쿠사카는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미하라에게 던졌다. 언뜻 잔뜩 구겨져 있는 면 재질의 옷―티셔츠에 불과해 보였으나, 묘하게 무기질 같은 느낌이 있었다. 셔츠를 굳이 다 펴 보지는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아도 구김새 사이사이에 배어 있는 시커먼 얼룩이, 손끝에 닿는 묘한 감각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알려 주었다. 제가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미하라가 인지함과 동시에, 이제는 넝마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천 쪼가리가 방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벽에 부딪혀 떨어진 옷 주변으로 거뭇거뭇한 가루가 부스러지며 떨어졌다.


   “네 옷이다.”

   “쿠사카…….”

   “설명해 주실까.”


   정신을 잃기 전까지의 기억은 차라리 잊는 게 좋았을 만큼 생생했다. 사실 기억이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짧은 내용이었다. 일단 쿠사카와 대치하던 오르페녹의 계획의 첫 단계는 제대로 성공했다. 제대로, 확실히 말이다. 인간성을 잃은 오르페녹이 위기의 상황에서 평범한 인간의 안위를 걱정할 리는 만무했다. 더 설명할 것도 없이, 미하라의 몸은 두꺼운 쇠붙이에 꿰뚫렸다. 피 웅덩이에 푹 담긴 듯한 그의 셔츠가 그 증거였다. 마리를 제외한 이들에게는 좀처럼 정을 주지 않는 쿠사카도, 그런 미하라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항상 자신을 몰아세우기만 하던 인물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미하라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미하라의 기억에는 없었지만, 그를 공격했던 오르페녹은 손에 죽었다. 말하자면, 자리를 피할 시간을 벌고자 오르페녹은 방법을 잘못 선택했었다. 그게 잘못될 거라는 사실은 그 자리에 있던 쿠사카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미하라조차 알 수 없던 것이었으니, 그저 운이 나빴다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 누가 있었어도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종족적으로도 아직 미하라는 인간인 부분이 남아 있었다. 물론, 회복 불능이었던 몸이 반나절도 안 되어 수복되었으니, 이것도 그저 반나절 전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인간으로서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이 하필 그때였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죽어 가는 몸을 살리려는 기호의 발악이었을 수도 있고, 외부에서 들어온 오르페녹의 에너지가 마지막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아주 우연히, 마침 그 타이밍이 애초부터 오르페녹으로서 완전히 각성하게 되는 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제 와서 그런 이유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긴 했다. 미하라 슈지는 오르페녹이 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쿠사카가 본 시점에서, 미하라는 더 이상 알량한 자기 합리화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살고 싶었다.


   “나, 나는 인간으로 살 거야.”

   “웃기지 마. 너는 그저 ‘이 싸움’에 끼고 싶지 않은 거잖아?”

   “아니야! 나는 인간이고 싶은 거라고!”

   “그렇다면 인간의 편에 서서 ‘싸워’ 주는 걸까나?”

   “…….”

   “하.”


   명백하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웃음소리가 미하라의 귓전에 들어와 박혔다. 미하라의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종족이 바뀌었어도 그 유약한 성격만큼은 바뀌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인간이었으니 델타 벨트를 사용하고도 그 힘을 욕심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일 테다. 미하라가 더는 인간이 아닌 지금에 와서야 쿠사카에게는 의미 없는 사실이었다.


   “신변 정리, 해 두는 게 좋을 거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쿠사카는 방을 나섰다. 미하라는 쿠사카의 적이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이 원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랬다. 아직 ‘인간’의 적은 아니었어도 어쨌거나 미하라의 위치가 쿠사카의 정반대에 있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적으로 인식한 존재를 쿠사카가 어떻게 대하는지는, 그와 오랜 시간을 보내진 않았어도 잘 알았다. 여태까지 그의 손에 재로 변해 날아간 오르페녹의 수가 몇이었던가. 쿠사카의 앞에 선 자신의 미래는 뻔했다. 그리고 그에 대응한다며, 벨트를 가지고 있는 ‘인간’인 쿠사카를 적대한다면, 결국 인간의 반대에 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었다.

   세상은 자꾸만 선택을 강요했다. 몸의 변화를 숨기고 있을 때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것 하나만 결론을 내리면 끝날 고민이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인간과 오르페녹의 싸움에 가장 깊게 관여하고 있는 인물이 미하라에 대해 알아채면서 그는 그 싸움 안에서의 위치 역시 선택해야만 했다. 주어진 선택지들에는 미하라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선택을 하는 데에는 치열한 고민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것도 미하라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선택하고 싶지 않았고,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하라는 고민하고 싶지가 않았다.


*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숨이 폐로 빨려 들어가자마자 토하듯 뱉어내기를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미하라의 바이크는 애저녁에 찢어지듯 박살이 나서 그가 달려온 길 어딘가에서 활활 타고 있었다. 그마저도 더 이상 미하라의 맨눈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인간일 적보다는 월등히 체력이 좋아졌겠으나, 겁에 질린 지금은 그런 진화조차도 미하라를 진정시키지는 못했다.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뜀박질을 했어도 몸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오르페녹의 몸이라는 게 원래 이런 것인지, 자신을 쫓는 카이저에 대한 공포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까맣던 하늘에는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으나, 지평선에서는 아직도 해가 떠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도는 애초에 끊어졌기에, 미하라나 쿠사카나 도로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었다. 밤이라기에도 새벽이라기에도 어중간한 시간에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차 한 대조차 지나다니지 않았기에 귀찮은 문제는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누구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도 아무도 알 수 없을 시간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시체조차 남지 않을 경우라면 더욱 뻔했다.

   길 너머로 터널이 보였다. 총을 든 상대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터널로 들어가는 것은 결코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으나, 거기까지 생각할 경황은 없었다. 미하라는 터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쿠사카도 그를 따라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터널 안은 바깥과는 다른 세상인 듯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난색의 조명 때문에 시야가 뿌예지니 어지럼증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그러던 찰나, 결국 미하라의 몸이 바닥에 나뒹굴며, 작은 마찰음이 넓은 터널을 미약하게 울렸다. 혹사당한 다리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꺾여 버린 탓이었다. 그가 엎어져 있는 자리에서 몇 발짝 뒤에서 꾀죄죄한 운동화 한 짝이 굴러갔다. 아스팔트에 쓸린 옷이며 몸은, 그 모습을 본 사람이 있었다면 몹시도 안타까워했을 만큼 상했어도, 일어서야 했다. 인간으로서 살고 싶은 것이었지, 죽더라도 인간으로 남고 싶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한계까지 내몰리던 온몸의 근육에 긴장이 한번 풀어지니, 다시 힘을 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미하라가 바닥에서 주춤거리는 동안 쿠사카는 또 그 시간만큼 거리를 좁혀 왔다. 당장 방아쇠를 당겨도 맞히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인간이었던 때와 같은 모습, 같은 행동을 보이는 그에게 쿠사카가 인간인 미하라 슈지를 봐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그런 자비를 기대하느니 차라리 한 발자국이라도 더 도망치는 게 더 나았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도망하는 짓이나 쿠사카의 인간적인 부분에 호소하는 일이나, 희망이 보이지 않기로는 똑같다는 것을 미하라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됐든 미하라는 전자를 택했다. 쿠사카와 미하라의 거리는 성큼 좁아졌다.


   “이런 순간까지도 너는 왜 도망만 치는 걸까나.”


   줄곧 미하라를 향해 총구를 겨누던 손이 잠시 내려갔다.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기어서라도 자기에게서 조금 더 멀어지려는 발버둥을 비웃기라도 하듯, 쿠사카는 미하라의 옆을 지나쳐 그의 눈앞에 멈춰 섰다. 미하라의 시선은 제 앞에 멈춰선 두 발에서만 맴돌았다.

   쿠사카의 목소리가 끝나자 동굴 같은 터널 속에는 미하라의 가쁜 숨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숨을 가다듬고는 싶었으나, 좀처럼 마음같이 되지가 않았다. 미하라에게 세상은 항상 그랬다. 마음처럼 되어 주지를 않았다.


   “나는…….”


   미하라가 겨우 입을 뗐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미하라를 내려다보던 쿠사카는 미하라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기울였다.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려 주는 듯은 했으나, 그 내용이 자신에게 쓸 만한 내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쿠사카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인간으로…… 인간으로서 살고 싶었을 뿐이야.”

   “하지만 넌 인간이 아니지.”


   어떤 희망을 품고 입을 연 것은 아니었지만, 단호한 쿠사카의 목소리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희망마저 사그라뜨렸다.

   다시 도망질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미하라에게 겨누고 있던 총을 잠시 내리고 있기는 했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을 지나쳐 가려는 움직임이 보인다면 쿠사카가 보일 행동은 뻔했다. 자기의 적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만큼 쿠사카의 마음은 여리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해받을 수 있는 길이란 없었다. 쿠사카 본인이 오르페녹이 되기라도 하지 않는다면.


   “…….”


   그의 의도가 어떠했든, 쿠사카가 자기의 말 이후로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미하라를 기다려 준 것은 미하라로서는 의외인 일이었다. 그 덕분인지, 주체할 수 없는 떨림과 함께 급하게 숨을 내뱉고 삼키던 미하라도 아주 조금씩은 안정을 되찾아 갔다. 좀체 조절하기가 힘들었던 호흡의 주기도 심호흡을 하며 가다듬었고, 크게 오르내리던 두 어깨의 들썩임도 점차 사라져 갔다. 온몸이 얼어붙은 듯 옥죄던 긴장감도 누그러진 듯했다. 땅을 짚고 있던 손이, 이마에 맺혀 흐르던 땀을 닦았다. 쿠사카의 앞에 무릎을 꿇은 듯한 자세도 바뀌었다. 처절하게 앞으로 나아가려던 탓에 무릎이며 손바닥이며 거친 아스팔트에 쓸리고 긁혀 생채기투성이었으나, 그 정도 생채기는 금방 회복될 것이다. 실제로 그의 피부에 남은 상처는 몇 개 되지 않았고, 눈에 띄게 남은 것이라야 카이저의 총에 쓸린 뺨의 상처뿐이었다.


   “나는, 인간이야.”


   시종 바닥만을 보고 있던 미하라의 고개가 들렸다. 헬멧의 너머에 있는 쿠사카의 눈을 직접 볼 수는 없었어도, 미하라는 쿠사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쿠사카의 앞에서만큼은 항상 위축되어 있어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미하라였다. 그게 아니었어도 미하라의 분위기가 급변했음을 눈치채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바닥을 찧듯 꿇고 있던 무릎이 올라갔다. 바지뿐만 아니라 옷 전부가 엉망이었으나, 옷매무새를 정리할 생각도, 먼지를 털 생각 같은 것도 없었다. 어차피 정리해 봐야 찢어지고 꾀죄죄한 옷에는 의미가 없었지만.


   “너만 이해해 준다면…….”

   “‘나’한테 이해를 바라는 걸까나.”


   매일 눈치만 보고 있던 미하라가 쿠사카를 그렇게 모르지는 않았다. 어림도 없는 소리라는 건 잘 알았다. 쿠사카가 콧방귀를 뀌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혹은…… 쿠사카, 너만 모른다면.”


   자신을 올려다보던 두 눈에는 어떤 결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에 와서 다시 보니 그것은 결심이라기보다는 독기에 가까워 보였다. 반사적으로 쿠사카가 미하라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땅을 바라보고 있던 무기도 다시 미하라를 향해 겨누어졌다.

   미하라가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주먹을 쥐고 있던 손에도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와 함께, 손도 발도 이목구비도 기괴한 형상으로 뒤틀리며 색을 잃기 시작했다. 그 과정이 끝나고 난 후 쿠사카의 앞에 서 있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는 오르페녹이었다. 유채색의 옷도, 빨갛게 달아올라 있던 상처 부위도, 그리고 볕에 타서 조금 까매졌던 피부빛도 모두 하얗게 변해 버리고 없었다. 인간으로서의 형상이 남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스스로 오르페녹의 모습을 취한 것은 처음이었고 이런 모습이 되고자 했던 때는 결코 없었으나, 자기의 의지로 조절하지 못했던 때보다는 불안할 것이 없다는 점에서 그나마 나았다. 인간의 몸에는 없는 기관을 움직이는 기분도 낯설기는 했지만 싫은 것은 아니었다.


   “네 놈…….”

   “네가 나를 이해해 주는 결말이었으면 좋겠어.”


   새하얀 발이 땅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카이저의 손에 들려 있던 총에 불이 발했다. 그가 의도했던 바대로 총알은 정확히 미하라의 몸에 닿았으나, 관통하기는커녕 박히지도 못한 채 튕겨 나왔다. 혀를 차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불편한 심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쿠사카가 블레이건의 모양을 전환했다. 노란빛의 날이 길게 뻗어 나왔다. 쉽게 끝내고 싶었지만, 여의치는 않을 것 같았다.

   카이저의 검에 잿빛의 날이 부딪혔다. 쿠사카가 언제든 한 손에 잡을 수 있었던 손목에는 기괴한 모양의 날이 돋쳐 있었다. 벼려진 듯 예리한 날과 함께 검을 짓눌러 오는 무게에 카이저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쿠사카도 여유를 부릴 틈은 없었다. 오르페녹의 무게를 버티며 숨을 고르던 카이저가 포효 같은 기합과 함께 커다란 곡선을 그리듯 검을 휘둘렀다. 그 기세에 전력으로 부딪쳐 오던 미하라도 튕겨 나가듯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오르페녹의 무기질적인 피부를 베는 느낌은 분명히 있었으나, 팔뿐만 아니라 그 기괴한 모양새의 날에도 상처는 하나도 없었다.


   “그 모습의 어디가 인간이라는 걸까나.”

   “…….”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쿠사카를 이해시킬 수는 없으리라. 미하라가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또 한 번 변형한 팔에는 흡사 방패와 같은 판이 돋아나 있었다. 방패를 내밀며 발돋움질을 하던 몸이 순식간에 쿠사카와의 거리를 좁혀 왔다. 검으로도 흠집 하나 나지 않던 몸이었으니, 방패라면 경도가 높으면 높았지 떨어지지는 않을 게 뻔했다.

   거기까지 상황을 파악한 것은 좋았으나, 무겁고 단단해 보이던 몸은 생각보다 더 재빨랐다. 돌진해 오는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그는 벌써 코앞까지 와 있었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어깨의 수트가 방패에 부딪히며 스파크가 튀었다. 몸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바닥을 구르는 것은 덤이었다. 날아가듯 구른 카이저는 등 뒤에 터널의 벽에 부딪히듯 닿아서야 멈출 수 있었다. 유약해서 눈앞의 싸움조차 외면하기 바쁘던 미하라가 이렇게까지 변하는 것은 상정하지 못한 일이었다. 좀 더 철저하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을 책망해 봤지만, 인제 와서야 늦은 일이었다.

   카이저를 치고서도 얼마만큼 더 달려가서야 다리를 멈춘 미하라는 몸을 돌려서 또 한 번 달려들 태세였다. 미하라가 팔을 앞으로 내밀자, 몸을 가리고 있던 거대한 방패가 마치 참마도처럼 쿠사카를 향해 겨누어졌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쿠사카를 향해 내리찍을 모양이었다. 미하라가 발을 떼면서 또다시 땅이 울렸다. 모르긴 몰라도 저 방패에 찍힌다면 회복할 수도 없을 게 뻔했다. 아직 자세조차 가다듬지도 못한 쿠사카에게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다행인 일이 있다면, 어깨가 나갈 정도의 부상을 입었음에도 무기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었다.

   블레이건의 모드가 또 한 번 전환됐다. 길게 뻗은 날이 사라지고 다시 십자 모양으로 돌아온 총이 저를 향해 달려오는 다리를 향해 겨누어졌다. 먹힐지는 몰랐지만, 이대로 저 방패에 무력하게 두 동강 나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이었다. 도박 비슷한 것이었지만, 운이 좋았다. 타격이 커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다리에 상처를 낼 수는 있었고, 미하라의 무릎은 꺾였다. 몸이 바닥을 향해 무너지면서 방패도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금세 사라졌다. 온통 잿빛인 몸에 난 상처는 티가 거의 나지 않았지만, 다리를 부여잡고 좀처럼 일어서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제법 타격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괴로워하는 사이에 쿠사카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몸을 일으켰다. 쿠사카가 제 앞에 설 때까지도 미하라는 움직이지 못했다. 카이저의 손에는 다시 검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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