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썰 많음. 지뢰, 날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 네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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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계 법사의 마을, 칸타이에도 호러는 나타났다. 칸타이를 관할하는 마계 기사가 있는 것은 마계 법사의 마을 주변에 유독 자주 출몰하곤 하는 마수들 때문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이곳의 마계 기사가 호러를 전혀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계 법사도 인간이었고, 인간이기에 사심이 있다. 그렇기에 마계 법사도 얼마든지 호러가 될 수 있다.

   속세와 단절되어 있는 칸타이는 땅은 넓었어도 무척이나 좁았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츠바사를 모르는 사람은 칸타이에 없었고, 마찬가지로 츠바사가 모르는 칸타이의 사람 역시 없었다. 그렇기에 츠바사는 정을 버려야 했으며, 타인에 대한 정과 함께 감정도 잘라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호러를 벨 수 없었다. 칸타이는 좁디좁은 마을이었기에.

   세 명의 기사가 천마항복의 의식을 함께했던, 몹시도 드문 일 다른 기사의 관할을 침범하는 일은 금기되어 있기에 마계 기사의 세계에 있어서도 낯선 일이었고마계 법사의 마을인 칸타이에 기사가 셋이나 있었던 시간이었기에 칸타이에 있어서도 낯선 일이었다. 이 있었던 후로 츠바사는 한 번 버렸던, 가족에 대한 정을 다시 품에 안았었다. 그럼에도 츠바사는 호러를 베어야 했기에, 타인에게 정을 붙이지 않는 일은 일종의 관성처럼 계속되었다. 자신을 보살펴줘 왔던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이 지켜 왔던 사람이라고 해도, 호러가 된다면 얼마든지 베어낼 수 있다. 다짐처럼, 자기 암시처럼 언제나 되뇌는 말이었다. 그러나 한 명, 그러니까 유일한 혈육인 린을 제외하고서도 단 한 명에게만큼은 정을 떼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너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힘을 빌려줄게.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칸타이에 마계 법사라면 당연히 많았고, 그러니 어린 시절부터 몇 번이나 츠바사를 도와주었던 마계 법사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제일 인연이 짧았던 쟈비가, 관습과 규칙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성벽을 자꾸만 흔들고 있었다. 태양같이 빛나던 친우가 어둠에 떨어졌을 때 도움을 구했던 일이 시작이었다. 자신의 태양을 잃은 후 물밀 듯 몰아쳐 오는 감정을 그녀의 품 안에서 쏟아내던 일, 그리고 도심의 한가운데에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던 일로, 견고한 줄만 알았던 마음의 벽은 차례로 무너져 내렸다. 그 사실을 못내 인정할 수가 없었다. 츠바사는 말하자면 선택의 기로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계 기사로서의 사명과 그럼에도 그 역시 인간이었기에 막을 수 없었던 마음, 융통성 없는 츠바사였기에 하게 되는 고민이었다.

   그런 성정을 잘 알고 있던 쟈비는 어떤 종용도 하지 않고 그저 츠바사를 기다려 주었으나, 그 역시 참을성이 좋지는 않았다. 그들이 칸타이로 돌아온 지 딱 15일째 되는 날 밤, 쟈비가 언질 없이 츠바사의 거처를 찾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마침 하얗게 빛나는 달이 아름다웠으니 술잔을 기울이기에도 좋은 날이었다.


   츠바사.”

   쟈비?”


   츠바사의 이름을 담은 그 담담한 부름은, 다시금 필사적으로 쌓아 올렸던, 몇 겹이나 되는 벽을 너무도 쉽게 뚫고 들어왔다. 이렇게 될 것이 두려워 피하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으나, 몹시도 그리워 매일 밤을 지새우게 했던 목소리이기도 했다. 꼭 화난 것 같았던 낮은 음성과는 달리, 츠바사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달빛을 닮은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쟈비의 까만 눈동자는 올곧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자신의 눈동자보다 훨씬 더 마계 기사다운 눈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눈에 익은 병이 들려 있었다. 적주였다. 사실 규율이 엄격한 칸타이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었지만, 칸타이에 남은 그녀가 마계 법사답지 않게 애주가였던 탓에 스승인 아몬 법사에게서 법술과 함께 기호까지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봐 왔던 것이었다.


   마실까?”


   늦은 시간이었다. 문 너머의 린은 잠이 든 지 오래였다. 이렇게 늦은 밤, 아무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장소에서 단둘이 만나는 것은 안 된다.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리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대답과는 상관없이 마루에 걸터앉아 조그만 잔 두 개를 내려놓는 쟈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모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직 꼿꼿하게 서 있는 츠바사를 보며 쟈비가 병을 흔들어 보였다. 대나무 숲에 안겨 있는 고요한 집 주위로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울렸다.


   ……난 술은 마시지 않아.”


   쟈비의 옆으로 츠바사가 자리를 잡았다. 소리 없는 웃음과 함께 붉은 술이 잔을 채웠다. 또 한 겹, 벽이 사라졌다.

   츠바사의 앞에 놓인 술잔에는 여전히 달을 머금은 적주가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 자신의 말대로 츠바사는 술잔에 조금도 입을 대지 않았다. 술을 가득 담고 있던 호리병이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술이 많지는 않았어도 꽤나 독주였기에 술병이 허해지는 데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아니, 사실 적어도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정도 술은 문제가 못되었다. 홀로 한 병을 다 마시고도 쟈비는 취한 기색이 없었다. 적당히 기분을 고양하기에도 한 병은 턱없이 모자란 양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 시간은 술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이만큼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둘 사이에는 이렇다 할 대화조차도 없었다. 목소리를 듣는 일이 싫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으나, 굳이 불필요한 말을 나누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바람이 쓸리는 대나무의 소리뿐인 술자리에, 챙겨온 술은 주량을 한참 밑돌았어도, 달빛과 제법 잘 어울리는 얼굴을 보며 마시는 술은 꽤 맛이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쟈비.”


   쟈비가 병에 남은 마지막 술 한 모금을 잔에 털어 넣을 때였다. 마침 바람이 멎어 숲에 적막이 내려앉는 때이기도 했다. 쟈비는 별다른 말 없이 병을 내려놓고 츠바사를 바라봤다. 츠바사는 처음부터 줄곧 정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마계 기사로서 인간을 지켜야 한다. 나에게 그것 외에 다른 삶은 없어.”

   .”

   그걸 위해서 나는 인간으로서의 정을, 감정을 잘라내 왔어.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다.”


   대답을 대신해 쟈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쟈비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어도,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소리며 옷이 스치는 소리는 츠바사의 눈앞에는 그 모습을 선명하게 그려 주었다. 늘 그렇듯 무척이나 덤덤하게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츠바사의 손이 마계 창을 조금 더 단단히 쥐었다.

   츠바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알았다.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감정을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그게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쟈비는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은 함께 저울에 올릴 필요는 없는 것이었으나, 그 꽉 막힌 성격 탓에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 모든 것에 대한 이해하고 쟈비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것이다.


   있지.”


   조금의 텀을 두고 쟈비가 입을 열었다. 이해는 했어도, 공감은 다른 문제였다.


   나도 마찬가지야.”


   밤이 지나가는 내내 쟈비를 향하지 않았던 눈이 겨우 방향을 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당한 목소리에 걸맞게 그녀는 처음 츠바사를 찾아왔던 그때처럼 또렷한 눈으로 츠바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도 사명이 있어. 마계 기사가 아니더라도 나는 인간을 지키는 자. 그것 이외의 삶을 바란 적도 없어.”

   …….”

   하지만 나는 인간을 지키는 '인간'이지. 누군가에게 정을 주고, 때로는 정을 바라기도 하는, 감정을 느끼는 게 당연한 인간이야.”

   쟈비…….”

   "난 인간을 지킬 거야. 그리고 너도 지킬 거고."

   "쟈비!"

   "그리고 만약 네가 호러가 된다면, 그땐 내 손으로 널 봉인해 줄게."

   "……?"

   "너를 위해서."

   "……."

   "너도 그렇게 해 주겠지? 나를 위해서."


   흔들리는 눈동자에 쟈비의 미소가 비쳤다. 부드럽게 웃으면서도 그녀의 눈은 흔들릴 줄 몰랐다. 쟈비는 강했다. 기사로서 태어나 기사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보다도, 갑주가 없는 그녀가 더욱 강했다. 잠시 칸타이를 떠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그 시간 동안 이만큼이나 강해진 것인가. 아니, 어쩌면 자신이 미숙했던 탓에 인제야 쟈비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마계 기사를 지키는 마계 법사라. 적어도 칸타이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마계 법사가 지키는 백야 기사는 더더욱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계 기사로서 자긍심이 높은 츠바사에게 그것은 일종의 무시나 모욕에 가까울 법도 했으나, 무슨 일인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츠바사가 쟈비에게서 눈을 돌렸다. 다시 불기 시작한 바람이 댓잎의 향을 싣고 왔다. . 꼭 기침처럼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나지막하고 조용하게 술잔 위로 떨어졌다. 소리를 내어 웃는 것이 무척 오랜만이었기에 웃는다는 행위 자체가 어색하기도 했으나, 기분만큼은 좋았다. 쟈비는 꽤나 놀라운 듯 그를 보고 있었다. 우는 것만큼, 아니, 우는 것보다 더 웃는 게 어울리지 않는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보니 의외로 웃는 얼굴이 가장 보기 좋았다.


   좋아.”


   웃음이 그친 츠바사가 쟈비를 돌아보며 조금 늦은 대답을 건넸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어딘가 시원한 미소가 꼭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의 것 같았다. 그 무거운 무언가를 대신해, 츠바사는 좀체 손을 대지 않던 술잔을 들었다.


   칸타이의 기사는 술을 안 마시는 거 아니었어?”


   조금 짓궂은 말을 하면서도 쟈비 역시 잔을 들었다. 마지막 한 모금의 적주가 두 사람의 목을 넘어갔다. 독한 술이었으나, 하얀 달을 품은 술은 달기만 했다. 마침내 꼭 한 병의 술이 동났다. 대작은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술 따위로 구실을 만드는 것도 마지막일 것이다. 굳은살 박인 투박한 손 위로, 손톱을 붉게 칠한 손이 올라앉았다. 어느 쪽의 손도 예쁘고 부드럽지는 않았으나, 그것이 수호자였다. 인간을 지킬, 그리고 나를 지켜 줄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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