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조명이 반사되어 꼭 스스로 빛을 내는 듯한 인영 하나가 뉘어 있는 곳을 바라보며, 고우는 생각했다. 침대라고 하기에는 너무 단단하고 허전한 자리에 인영은 불편하지도 않은지 미동조차 없이 누워 있었다. 놓여 있었다.
콜라를 마셨던가. 뭔가를 빨대로 먹었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음. 뭐든 상관 없겠지.
찬장이 열린다. 뭘 준비해야 할까 고민했던 조금 전의 자신을 고우는 조금 비웃었다. 컵 몇 개와 그릇 몇 개 옆으로 빼곡하게 자리한 것은 온통 커피뿐이었다. 할리 박사를 떠나 혼자서 연구하고 개발을 시작하면서부터 하루도 떨어진 적 없는 친구였다. 주방에 놔 두었던 쓰레기통에도 커피 봉지만 가득했다. 그래도, 녀석이라면 뭐든 게의치 않을 거다.
몇 년이나 지났더라. 날짜를 세지 않은 날도 많았으나, 지금이 20년대라는 것만은 기억이 났다. 10년 전쯤에는 엉뚱한 녀석을 되살리는 바람에 겪었던 헤프닝도 있었던 것 같았다. 그 뒤로는 이렇다 할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실패만 겪었지만, 오늘은 다르다. 동력을 공급해 줄 날씨, 할리 박사와 린나의 도움을 받아 가며 몇 번이나 검토하고 손 봤던 몸체, 실패를 거듭하며 얻었던 데이터 베이스를 토대로 문제가 된, 문제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모두 제거하고 개선했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고 자부한다. 모두 했다. 그러니 오늘은 달라야 한다.
고우의 손에 머그컵 두 개가 들려 나온다. 커피 봉지를 뜯어 머그컵에 하나씩 쏟아넣는다. 뜨거운 물이 컵을 채워 간다. 습관적으로 커피 봉지로 저으려다 우뚝 손이 멈췄다. 뜨거운 물에 담글 뻔한 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린 후에, 고우는 짧지는 않은 시간을 주방에서 서성인 끝에야 찻숟가락을 찾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건데 적어도 이 정도는 신경을 써 줘야 할 것 같았다. 얇은 쇠막대는 제 할 일을 끝낸 후 싱크대에 툭 던져졌다.
양손에 따뜻한 잔을 든 채 고우는 다시 인영의 앞으로 향했다. 그 몸체에 연결되어 있는 선은 복잡한 식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는 수 개의 모니터로 이어져 있었다. 온기 없는 손 옆에 머그잔을 내려놓고, 고우는 몇 개의 모니터와 창 밖을 번갈아 본다. 시간이 됐다. 다른 화면에 비해 바빠 보이지 않는 모니터 앞으로 고우의 몸이 옮겨 간다. 고우가 짧게 숨을 토하자, 키보드 위에 올라간 열 손가락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머릿속을 하나씩 되짚어 가며 차근차근 식이 완성되어 갔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시작된다. 그 녀석이 돌아온다. 길은 내가 만들어 줄게.
창밖이 소란스러워진다. 유리창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빗소리와 함께 고우의 시선이 소리를 따라 간다.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