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교정을 나선다. 사람이 없는 학교는 낮의 학교와는 전혀 다른 장소 같았다. 정규 수업이 끝난 후 있을 곳을 잃은 미츠자네에게 학교는 그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도피처였다. 교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현실의 시간은 시작된다. 오늘도 그는 잠시 멈추어 두었던 시계를 다시 돌려야만 했다. 어김없이 타카토라는 교문 앞에 서 있었다.


- 언제까지 도망칠 셈이냐, 미츠자네.


언제나처럼, 미츠자네는 그를 스쳐 지나갔다. 등 뒤에 있어야 할 타카토라의 영상은 항상 발소리 하나 없이 그의 시야 안으로 돌아왔다.

달은 보이지 않았다. 짙게 깔려 있는 구름이 달빛까지도 삼켜 버린 듯했다. 몇 걸음 벗어나지도 않았을 때에 내리기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줄기가 현실로의 복귀를 환영해 준다. 세상의 반김 속에서 미츠자네는 그를 거부하지도 않은 채 걸음을 계속했다.


- 밋치!


익숙하고도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만 같았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조차도 잡지 못한 발목을 현실인지조차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멈춰 세웠다. 진짜일 리 없다는 사고의 외침도 돌아서는 몸을 막을 수 없었다. 의식을 거치지 않은 채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이름은 갑작스럽게 시야를 가리는 무언가에 가로막혀 흐트러졌다.

까매진 시야로 놀라기도 전에 어깨 위로 걸리는 딱딱한 무언가로 시선이 돌아간다. 그와 함께, 몸을 때리던 빗줄기가 무언가에 부딪혀 튕겨져 나가는 소리가 감각을 사로잡는다.


"우산......?"


달조차 빛을 잃은 밤이었지만, 멀리서 뻗어오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 덕에 제 손에 잡혀 있는 것이 제법 밝은 색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대체 누가'라는 의문은, 빗소리에 묻혀버린 찰박이는 발소리를 뒤따르는 인위적인 지퍼 소리에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모든 것을 잃었던 그 날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들을 일이 없었을 소리였다. 미츠자네가 그 음성에 반응해 우산을 고쳐 잡았을 때에는 회색빛 도심에 위화되는 푸른 잎 몇 개만이 바닥에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 그렇게 비 맞고 다니다간 감기 걸릴지도 몰라.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하나뿐인 우산을 성큼 내어주고 자신은 빗속으로 뛰어드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지금에 와서는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어느 비 오던 날에 건넸던 말이었다.

기억 속에서 끌려나와 재생된 것일까.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삶은 오감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무너뜨린 지 오래였다. 손에 쥐어져 있는 이 우산도, 이 무게감마저도 만들어진 환상에 불과할까. 꿈에서조차 만남을 허락받지 못했던 당신이 나타났던 이 시간마저도?


- 순진하구나, 미츠자네. 설마 이제 와서 구원이라도 바라는 거냐. 너에게 그런 것이 허락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텅 빈 공간을 쥐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진다. 어느새 옷은 빈틈 하나 없이 젖어 있었다. 차가운 목소리 뒤로는 세상을 향한 빗줄기의 두드림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도 알고 있어.”


자조의 웃음이 빗물과 함께 미츠자네의 몸 위로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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