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1. 마지막 화 이후 5년 정도 흐른 후의 이야기. 후반부의 스포일러가 약간 있습니다.

2. 유키카네 '밤', 우에스기 주종 '꿈'과 연작으로 생각하고 썼습니다. 염두에 두지 않고 각각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공백 제외 4,033자




   그 사람과 다시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저녁 장을 본 후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 몇 년이나 해 왔던 일상적인 일일 뿐이었다. 다만 그날은 사야 하는 책이 있었기에 장을 보기 전에 먼저 서점에 먼저 들르는 비일상이 끼어 있는 날이기도 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마트에 들어갔기에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귀가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평소에 비해서 늦어진 시간은 길어야 30여 분 정도였다.

   그 사람은 산책 중이었다고 했다. 산책이라고 했지만, 그저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던 것에 가까워 보였다. 어쨌든, 그때의 그 사람은 당시 내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직접 얼굴을 마주했던 것은 세 번가량밖에 되지 않았지만, 기억 속의 그는 늘 검은색 정장과 분홍빛이 도는 셔츠를 입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빌딩에서의 싸움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서야 다시 마주친 그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매가리가 없어 보였다. 그 사람은 네크라인이 깊게 파인 검은색 티 한 장만 입은 채 조금 구부정한 자세로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일상복이라고 해도 충분히 말끔한 모습이었지만, 아무튼 전연 다른 모습이었던 그 사람을 알아본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눈앞을 스쳐 가는 모습을 봤을 때, 그 사람의 손목을 잡은 것은 순수하게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갑자기 손을 잡혔던 사람보다도, 그 사람을 붙잡은 내가 더 놀라고 있었다. 의외로 그는 담담하게, 조금은 공허한 얼굴로 내 이름 글자를 또박또박 읊었다. ‘다테…… 마사무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한 거였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그날은, 절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지 못했다.

   의외로 그 사람은 멋대로 다가오는 어린애를 밀어내지 않았다. 생각이나 마음을 읽어내기는 어려웠지만, 자신에게 건네는 손길을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았다. 거만하고 위압적인 분위기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누그러들어 있었어도 여전히 자존심은 강해 보였기에 꽤나 의외인 면이었더랬다. 말하자면, 타인에게 먼저 손을 뻗지는 않지만 다가오는 손을 쳐내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굳이 거절해야 할 필요가 있나?’ 언젠가 그것에 대해 물어봤을 때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날은 오전 강의 하나뿐이었고, 여느 때처럼 일정이 끝나자마자 그의 집으로 향했던 날이었다. SLPM 사가 무너진 때부터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어도 줄곧 일을 쉬고 있다고 했던 그는 평소처럼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열어 주었다. 그 사람은 편한 옷을 입더라도 늘 말끔하고 단정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그것은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조금 쌀쌀했는지 검은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던 것이 조금 다르다면 다른 일이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면 세세하지만 여러 가지 이상한 점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종종 펼쳐 놓고 들여다보던 서류는 한 장도 보이지 않았고, 항상 테이블 위에 올려 두던 노트북 ― 제법 큼지막한 글자로 장식되어 있는 ― 도 없었다. 사실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가 손에 쥐고 있던 페트병이었다. 굳이 밖에서 사 온 듯한 500mL짜리 물병은 그 사람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위화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확실히, 그것은 나오에 카네츠구의 것이 아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가 먼저 내민 손을 잡았던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아니, 사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용물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물병을 손에 쥔 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모습을 타인에게 보였다는 사실을, 도움을 바라고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멋대로 그렇게 판단했고, 멋대로 그 사람의 몸을 끌어안았다. 두 팔 안에 들어온 몸은 미동이 없었으나, 두근거리는 고동만큼은 선명히 느껴졌다. 울림의 진원지는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어디를,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남의 눈치를 본다는 뜻은 아니고, 분위기나 생각 따위를 잘 읽는다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과 제대로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랬다. 꼭 사람에 대한 설명서라도 있는 것처럼, 숨기려고 했던 것까지 쉽게 알아 버리곤 했다.


   “쓸데없이 일찍 나와 있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서 늘 이런 식이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나무라는 말을 던지고 있기는 했으나 불쾌한 감정이 섞여 있지는 않았다. 언제나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말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곳에는, 네이비색 셔츠를 걸친 채 이쪽을 내려다보는 그 사람이 있었다. 어두운 계열의 셔츠를 좀처럼 입지 않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굳이 말하는 것도 새삼스럽지만 언제나 그렇듯 위쪽 단추 두 개는 풀어 헤치고 있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40분이나 남아 있었다.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따로 볼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더 일찍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약속 시간을 억지로 바꿀 생각은 없었다. 여유롭게 준비를 하려고 해도 늘 몇십 분이나 일찍 도착하게 되곤 했다. 언제 도착했다느니 얼마나 기다렸다느니 하는 것을 떠벌린 적은 없었으나, 어른에게는 그런 것이 모두 보이는 것일까. 처음 두어 번을 빼고는 그를 오래 기다린 기억이 없었다.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고 보이자, 그는 더 이상의 나무람 없이 작게 한숨을 뱉으며 카운터로 향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는 않았으나, 달달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니 오늘도 분명.


   “오늘도 아메리카노?”

   “일일이 묻지 마.”


   다소 퉁명스러운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던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손에 일회용 컵이 들려 있었다. 주문을 하고서 줄곧 카운터 쪽에서 기다렸다가 음료를 받아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빨리 나오는 메뉴이니 번거롭게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는 그 자리에서 받아 오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리라. 솔직히 조금은 아쉬웠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시간, 애매하네.”

   “그러니까 너무 일찍 나오지 말라고 매번 말하잖아.”

   “하하, 미안. 아, 표는 내가 미리 받아 놨어.”


   말을 돌린다고 해도 통하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는 늘 그렇듯 더 깊이 추궁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미간의 주름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은 항상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시 만난 후로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마주한 일도 몇 번 없기는 했으나, 더 예전에는, 그러니까 나는 아직 학생이었고 그는 SLPM의 사원이었던 시절에는, 제법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이었다.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표정이라고는 빈말로도 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때는 지금처럼 무미건조한 얼굴은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뜸 들이지 말고 해.”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동안, 어느새 그는 눈을 똑바로 맞춘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어?’ 하고 얼빠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흘기듯 던지는 시선은 불편한 심기를 굳이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 아니, 하려는 말이 있는 건 아니었어. 그냥, 나오에 씨는 언제나 미간을 찌푸리고 있구나 해서.”

   “…….”

   “싫다는 게 아니고! 어떤 얼굴이든 나는 좋아하니까…….”

   “흥.”


   시시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이야기가 이렇게 흐를 때면 그는 으레 눈을 돌려 버리곤 했다. 불필요한 말을 대화에서 치워 버리는 듯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머쓱함이나 민망함을 느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익숙한 패턴 중 하나였다. 제대로 된 답을 준 적은 한 번도 없었어도,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것만은 알았다. 지금은 그것으로 족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난다고 해서 그만큼 대화가 많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그랬다. 대화 없이 보내는 시간이 길었지만, 그는 한 번도 이런 것에 어색함이나 불편한 기류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말을 섞지 않는 시간이 그에게는 몹시도 익숙한 것인 모양이었다. 대신 나도, 이 사람도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는 보통 서류나 노트북의 화면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고 ― 지금은 일할 거리를 가져오지 않은 것 같지만 ―, 나는 그의 옆에서 과제 따위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사실은, 모르는 부분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이런 관계가 계속 이어지다 보면 언젠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터다.

   생각해 보면 그와는 무척이나 이상한 관계가 되었다. 단순히 지인 사이라고 하기에는 연락도 만남도 무척이나 잦았다. 그리고 이런 시간도 그랬다. 어딘가 나다니거나 영화를 보는 시간을 매 주말마다 함께하는 것은 절친한 친구와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일은 보통……. 자연스레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그런 사이는 아니다. 그는 자신의 곁을 쉽게 내어 주곤 했지만, 다른 사람의 곁으로 다가서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답을 주지 않았다.

   말로 전하지 않아도 그라면 충분히 눈치 챘을 테지만, 굳이 말로 마음을 전한 적이 있었다. 그를 처음 껴안았던 그날에서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채 정리하지 못한 채 아무렇게나 내뱉었던 말 뒤로는 긴 정적이 따랐던 것 같다. 그는 거절의 말조차 내지 않았다. 말을 고르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꼭,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정적 속에서 입을 뗐던 건 그 침묵을 견딜 수 없는 쪽이었다.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괜찮지만…… 지금까지처럼, 계속 와도 괜찮을까?’

   ‘마음대로.’


   애써 마음을 전했던 것이 허무할 만큼 그 뒤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이런 관계였다. 그가 미안함이나 동정을 느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자신에게 오는 호의를 과하지 않은 선에서 받아들였을 뿐이리라. 그렇지만 밀어내지 않았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입이 쓰기는 했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 족했다. 적어도 아직은, 주는 것만으로 괜찮았다.

   몇 차례 시계를 들여다보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퍼뜩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영화 시작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와 있을 때면 이상하리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 버리곤 했다. 나름 적응력이 좋다고 생각했음에도 이것만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매번 약속 시간을 앞당기게 되는 것도 이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억지로 시간을 당기려고 했던 것은 절대 아니지만…….


   “언제까지 뭉그적거릴 거야?”

   “아, 미안. 갈게, 갈게!”


   걸음이 빠른 그는 벌써 몇 발짝이나 앞서 나아가 있었다. 답답한 듯 뒤를 돌아보며 던지는 말에 사과의 말을 돌려주며, 익숙하게 그의 뒤를 향해 가볍게 달음질했다. 그는 마저 기다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옆이라기에는 반 발자국 정도 모자란 자리에서 그와 함께 걸었다.

잡썰 많음. 지뢰, 날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 네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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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1. 권력을 이용한 강제적인 성관계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백 제외 1,835자




   “야, 아리타.”

   “네.”

   “너한테도 공포란 게 있나?”

   “…….”

   “너도 죽는 건 무섭나?”

   “…….”


   아리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대라는 집단에서 상관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런 시간만큼은 예외였다. 대장은 며칠에 한 번씩은 꼭 아리타를 찾았고, 멋대로 몸을 취했다. 그리고 매번 질리지도 않고 시시한 것들을 묻고, 떠들었다. 몸을 섞는 과정에는 분명히 강압과 명령이 있었지만, 부질없는 질문에 대답할 것까지 강요하지는 않았다. 대장은 질문에 대한 답을 바라지도, 제 말을 들어주는 것을 바라지도 않는 듯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으나, 아리타는 스테이시 앞의 자신과 비슷한 상태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편했다. 감정도 마음도 없고, 타인과 말을 섞는 일도 없으며, 몸을 요구하면 요구하는 대로 따른다. 편리한 스테이시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누가 스테이시에게 죽었다고 했다. 오늘의 화제는 분명 그 일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아리타는 결론을 내렸다. 아리타는 학자였다. 스테이시 도륙이라는 취미 탓에 일반 부대원과 비슷한 일도 겸하고 있기는 했으나, 그는 부대 구성원들과 부대끼며 지내는 위치는 아니었다. 얼굴을 외운 인물은 눈앞의 부대장과, 취미를 겸한 연구를 위해 스테이시를 빼 오는 창고의 창고지기뿐이었다. 대장은 종종 자신의 이름을 부를 것을 강요하곤 했기에 이름까지 알고 있었으나, 창고지기 쪽은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연구를 비롯한 일과 일상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죽음에 무언가를 느낄 리가 만무했다. 죽음은 일상이었다. 사람의 죽음도, 이미 죽은 것의 죽음도 모두 일상이었다.

   빛이 들지 않아 어둑하게 물들어 있는, 원래라면 새하얀 색이었을 천장을 보던 아리타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제 것임에도 제 것 같지 않은 몸뚱아리는 움직이지 말라며 아우성을 쳤지만, 그런 신체에 움직임을 강제하는 것도 일상적인 일이었다. 대장은 아리타를 힐끔 보다가 다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시선은 조금 전까지 아리타가 바라보고 있던 그 천장이었다.


   “가 보겠습니다, 대장님.”


   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관계를 끝낸 후 자리를 뜨려는 아리타를 종종 붙잡은 일도 있었으나 오늘은 그럴 기분은 아닌 모양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미처 끝내지 못한 분할 작업이 남아 있었다. 체육관에서 짐승 같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을 스테이시 몇몇을 떠올리니 손이 근질거렸다. 이런 몸으로는 스테이시에게 물려도 이상하지 않다고는 생각하지만, 스테이시란 지능 없이 달려드는 것이 전부인 시체일 뿐이니 괜찮을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오, 아리타. 웃는 거냐?”


   천장을 보고 있던 대장은 어느새 아리타를 향해 시선을 주고 있었다. 나는 웃고 있었던가. 흥미롭다는 듯 눈에 불을 밝히고 있는 대장에게 아리타가 다시 눈을 돌렸을 때는 이미 표정 같은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곧 그 얼굴에는 또 다른 표정이 만들어질 것임을 아리타는 알았다. 어떤 얼굴인지 자신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으니 알 수 없었으나, 대장이 그런 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 가학적으로 군다는 것도 알았다. 역시나 이해할 수는 없는 성향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스테이시 앞의 자신과 같으리라 생각하기로 한다. 여하튼 그런 이유로 오늘 계획해 두었던 스테이시들과의 오붓한 시간은 뒤로 미뤄야 한다. 대장에게 다시 한번 잡히는 날은 온종일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이리 와.”

   “네.”


   자신의 것이 아닌 시트 위에 익숙하게 엎드리는 아리타의 목덜미로 대장의 뭉툭한 이빨이 파고들었다. 예고 없이 습격해 오는 통증에 퍼뜩 뛰는 몸을, 대장은 우악스러운 힘으로 내리눌렀다. 지금 아리타를 누르고 있는 손은 스테이시를 맨손으로 제압할 때의 그것과 비슷했다. 총도 칼도 라이더맨의 오른손도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대의 누구나 배워야만 하는, 말하자면 호신술 같은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써먹을 것은 아니었으나. 

   베개를 쥐어뜯고 있는 손을 보던 아리타의 머릿속에 문득 대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죽는 게 무섭나?’ 그의 목소리는 마중물이 되어 시시하고 부질없는 생각들을 속에서 끌어올리고 있었다. 생살이 씹히고 있음에도 고통은 멀어져 가고 있었고, 잡스러운 생각들이 의식을 침범해 와도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죽음에 두려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일단 살아 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떤가. 165조각으로 토막나기까지 끊임없이 달려들기만을 반복하는 스테이시처럼, 몸이 비틀거려도 스테이시를 향해 달려들던 자신은 살아 있는 것인가? 동료가 죽어 나가도, 자신의 몸이 훼손되어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이 상태를 살아 있음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아하하하, 아리타, 이렇게 보니 꼭 스테이시 같구나.”


   허브티의 향 대신 지독한 피비린내와 송장 냄새를, 은빛으로 반짝이는 인분(鱗粉) 대신 퀴퀴한 먼지와 시커먼 핏물을 뒤집어쓴 스테이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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