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 제외 5,555자




   새까만 밤이 내려앉았다. 동네가 동네다 보니 가로등의 수는 많지도 않았고, 그나마 길거리에 서 있는 가로등의 불빛들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떨리고 있었다. 시커먼 아스팔트 도로는 밤의 어둠에 파묻혀 있었으나, 이 거리에 이골이 난 코하쿠는 한쪽뿐인 눈으로도 헤매는 일 한번 없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코하쿠가 통과한 문 위로 ‘Bar ODAKE’라고 쓰인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서 와.”

   “보드카로.”

   “, .”


   리드미컬하고 가벼운 마담의 대답과 함께 무겐 딱지가 붙은 투명한 병 하나와 작은 유리잔 하나가 스탠드 위에 올라왔다. 이곳에 온 걸 보면 또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하고많은 술집 중에서 굳이 바에 와서 스탠드 앞에 자리한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니겠는가.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일 테다. 아니, 정확히는 이야기를 곳이 필요했다는 게 맞을 터다.


   “웬일로 혼자 왔네?”

   “‘파트너는 어쨌어?”


   마담의 은근한 질문에 히사코가 말을 보탰다. 남은 밤은 긴데 벌써부터 히사코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꼭 어린아이의 것 같은 호기심이 술기운에 섞여서는 두 눈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코하쿠는 두 여인의 말에 대답을 하는 대신 쯧, 하고 혀를 차며 잔에 술을 따랐다.


   “흐음…… 둘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진 않은데.”

   “그치? 바보들이라 싸웠다가도 금방 풀려 버리잖아.”


   당사자를 앞에 두고 못 하는 말이 없네. 말로 내뱉지는 않았으나 자신들을 보는 코하쿠의 표정만으로도 마담과 히사코에게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린아이가 귀여워 놀려 주는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서로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는 어른들의 짓궂은 놀림에 무어라 토를 달까 입술을 달싹이던 그 어린아이는 방금 막 채워 놓은 술잔을 비우는 것으로 반응을 대신했다.


   “근데 말이야. 너희들, 언제까지 계속 같이 다니는 거야?”

   “?”

   “그렇잖아? ‘무겐은 이제 없는걸.”

   언제까지고 따라오겠다고 한 건 그 녀석이에요.”

   하지만 너도 떼어낼 생각은 없는 거잖아?”

   고집 있는 녀석이니까, 그걸 설득하느니 내가 포기하는 게 나아요.”

   역시 바보가 맞잖아, 그치?”


   흐음, 하는 콧소리와 함께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제 쪽을 바라보는 마담을 애써 무시하며 코하쿠는 다시 잔을 채웠다.

   자신을 잘 아는 연상들과의 대작은 꼭 고양이 앞의 털실 뭉치가 된 듯한 기분이라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즐겁기는 했다. 대화를 잘 이끌어 나가는 사람과의 술자리는 확실히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코하쿠 자신이 말을 하지 않아도 두 여인은 코하쿠를 비롯한 아이들에 대한 것이든, 그것도 아니면 자기 자신들에 대한 것이든 이야기가 끊이질 않아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오다케 마담의 바는 그렇게 실없이 웃다가도 조금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코하쿠가 오기 전부터 취기가 올라 있던 히사코는 금세 테이블 위로 머리를 내려놓았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오다케는 야마토에게 연락을 하는 대신 히사코의 어깨 위로 담요를 덮어 주었다. 히사코가 쓰러지자 바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차분해져 있었다. 코하쿠의 얼굴에도 제법 취기가 올라온 기색이 만연했다. 마담은 언제나 그랬듯, 손님의 이야기를 가만히 기다려 주고 있었다.


   언젠가는 자기 길을 가겠죠, 그 녀석도. 산왕 녀석들이나 오타와 코니시처럼.”

   그럴까?”

   그 녀석에게도 자기의 인생이 있을 테니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을 보내며 겨우 떠나 보내는 법을 배운 코하쿠였다. 그렇다고 비어 버린 옆자리에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예정된 이별이 씁쓸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한 입 머금은 술 때문에 입안이 쓰고 목구멍이 타는 것 같았다. 술 때문일 것이다.


   확 결혼해 버리면 좋을 텐데. 그치?”


   오다케의 농에 코하쿠는 힘없이 웃었다.


   우리는 그럴 인연은 아니니까요.”


   오다케는 코하쿠의 말에 무어라 토를 다는 대신 보드카 하나를 새로 따서 투명한 글라스를 채워 주었다.


   위로주.”


   격려의 의미가 담긴이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고개를 슬쩍 끄덕여 보이는 것으로 감사 인사를 대신한 코하쿠는 잔을 손에 들고 잠시 찰랑거리는 술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비추기에는 빛이 미약해 그저 투명하기만 한 액체가 글라스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고, 그것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마지막 잔이었고, 여전히 술은 썼다.


   갈게요.”


   스탠드 위로 지폐 한 장이 떨어졌다. 코하쿠가 마신 것 치고는 조금 많은 액수였다.


   히사코 분까지?”

   어울려 준 답례요. 그럼.”


   조금 비틀거리며 코하쿠가 몸을 일으켰다. 항상 고마워, 하는 마담의 인사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섰다. 거리는 여전히 어두웠다.

 

*

 

   조금 전에 시작했던 것 같은 하루가 벌써 끝났다. 늘 걷던 길, 가로등 두어 개가 나간 어둑한 거리였다. 오늘은 유독 더 어두운 게 왜 그런가 하고 보니 바의 입구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빛나던 가로등 하나가 더 나간 탓인 모양이었다. 어둡긴 어두웠으나 네온사인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으므로 길을 헤맬 염려는 없었다. 오늘도 Bar ODAKE에 손님이 찾아왔다.


   어서 와.”

   어라?”


   마담의 인사 뒤에 히사코가 엉뚱한 목소리로 손님을 맞았다. 오늘도 발갛게 물든 얼굴이었다. 바에 들어와 스탠드 앞에 앉은 손님이야 마담뿐만 아니라 히사코에게도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타이밍이 묘했다.


   오랜만이네. 그나저나 혼자야?”

   코하쿠 씨, 좀처럼 술을 못 마시게 한다니까요. 어린애도 아닌데, 과보호예요.”

   몰래 온 거구나?”

   코하쿠 씨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 사람 잔소리 무서우니까.”


   그러면서 자기는 좋을 대로 마시고 말이야. 연장자들의 눈에는 그저 귀여운 투정이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얼굴의 상처들을 보아하니 코하쿠의 마음을 알 만도 했다. 성인이라지만 어린애는 어린애인 모양이었다.

   마담은 굳이 주문을 듣지 않고도 익숙하게 무겐 로고 스티커가 붙어 있는 병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땡큐.’ 하고 잔을 채우는 츠쿠모의 옆으로 히사코가 자리를 옮겼다. 그 움직임에 스탠드가 흔들린 덕에 유리잔 밖에 쏟아 버린 술을 보며 츠쿠모는 안타까움에 인상을 구겼다.


   아아, 아깝게…….”

   있지, 너희들 지금 같이 사는 거야?”

   ? , 그런데.”

   언제까지?”

   언제까지?”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답이 너무도 확실히 정해져 있던 것이었기에 굳이 스스로 그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었다. 히사코의 질문을 바보같이 반복했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츠쿠모는 금세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제까지고.”

   그 애 말이 맞긴 하네. 고집불통.”


   히사코의 말에 오다케가 소리 내어 웃었다. 무슨 말인지, 왜 웃는지는 몰라도 뻔히 본인의 이야기인 것을 알아챌 눈치는 있던 츠쿠모는 부루퉁한 얼굴을 숨기지도 않고 뭔데, 무슨 얘긴데?’라는 소리만 반복했다. 그러나 여인들은 그에게 친절히 설명해 줄 생각은 없는 듯 웃을 뿐이었다. 뭔지는 몰라도 자신을 놀리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츠쿠모는 생각했다.


   성격 나쁜 아줌마들…….”

   그런 소리 할 거면 외상값부터 내 줄래?”

   미안합니다.”


   실없는 대화와 함께 술이 한 잔 두 잔 막힘없이 넘어갔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서도 꼿꼿이 서 있던 허리는 이야기들이 오가면서 차츰 앞으로 굽어 갔다. 한껏 기분이 고양된 히사코는 한 번씩 오늘은 내가 쏠게!’라며빠칭코에서 제법 딴 모양이었다.크게 웃다가 스탠드에 엎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더니, 결국은 또 마담을 향해 절하는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그런 히사코를 챙기는 것은 늘 그렇듯 오다케의 몫이었다.


   히사코 씨랑 같이 마시면 역시 페이스 빨라지네.”

   취했나 봐?”

   조금요. 코하쿠 씨한테 걸리면 안 되니까 슬슬 그만 마셔야 할 것 같은데……. 조금 더 있어도 되죠?”

   물론이지.”


   여느 때의, 어린애 어르는 듯한 느낌이 아닌 그저 상냥한 목소리였다. 아슬아슬하게 오른 취기와 그 상냥함에 조금 긴장이 풀렸는지도 모르겠다. 답지 않게 츠쿠모는 먼저 마담을 불렀다.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언제까지고라고 했지만,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거겠지?”

   글쎄.”

   코하쿠 씨가 혼자서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언젠가는 내가 방해가 되는 날이 올 거예요.”

   그럴까나.”


   마담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해 주었다. 츠쿠모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이나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 같은 것은 아니었기에, 마담은 츠쿠모가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있을 정도의 반응만 보여줄 뿐이었다. 오랜 시간 바를 운영하며 얻은, 말하자면 노하우 같은 것이었으며, 모르긴 몰라도 효과는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아직 길을 찾고 있는 아이에게는 조금 부족한 모양이었다.


   “‘는 어때?”

   …….”


   가게에 침묵이 깔렸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던 오다케 취향의 음악도 마침 한 곡이 끝나면서 다음 노래를 재생하기 위해 준비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낯선 고요함 속에서도 오다케는 미소를 지은 채 츠쿠모의 대답을 기다렸다.

   괴로운 것은 당연히 싫다. 비참해지고 싶은 것도 물론 아니다. 될 수 있다면 그의 옆을 계속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코하쿠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더더욱 츠쿠모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역시 복잡한 것은 싫었다.


   코하쿠 씨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어요, 저는.”

   욕심 없는 애네. 재미없어.”

   그 사람한테 받은 인생이니까요.”


   가벼운 웃음과 함께 나온 가벼운 대답이었다. 오다케의 표정에 짧게 스쳐 간 안타까움을 츠쿠모는 보지 못했겠지만, 그 나무라는 듯한 말이 정말로 자신을 비난하는 말은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못마땅한 눈으로 츠쿠모를 바라보던 오다케는 또 술을 한 병 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어른 같아졌다고 멋있는 척하고 말이야.”


   새로운 글라스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보드카를 따를 잔치고는 꽤 높은 편이었다.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는 가벼웠으나, 새롭게 술이 채워진 유리잔은 제법 묵직했다. 츠쿠모가 난감한 눈으로 오다케를 바라봤다.


   응원의 의미로 주는 서비스. 남기면 안 돼? 비싼 술이니까.”


   병을 닫으며 오다케가 츠쿠모를 향해 짓궂게 웃었다. 아직도 어질어질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츠쿠모였다. 저 잔을 비우면 어떻게 되든 간에 틀림없이 아침에 코하쿠에게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다. 코하쿠에게 혼나는 건 상당히 귀찮고도 무서운 일이긴 했으나, 눈앞의 비싼 술을 마다할 정도의 절제력이 츠쿠모에게는 없었다.


   무서운 사람이잖아마담.”

   서비스를 이렇게나 주는데 무섭다니?”

   , . 고맙습니다.”


   질렸다는 듯 표정을 짓고 있으나, 술을 즐기는 그 성정은 어디 가지 않는지 츠쿠모는 웃으며 잔을 들었다. 제법 많은 양이었음에도 기어이 술잔은 바닥을 드러냈다. 스탠드에 엎어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던 츠쿠모는 동거하고 있는 사람이 어지간히도 신경 쓰이는 모양인지 불안 불안한 걸음걸이로도 집에 들어가야겠다며 가게를 나섰다. 츠쿠모가 지불한 금액은 응원 주를 제외하더라도 좀 모자랐지만, 어제 히사코의 술값을 함께 계산하고도 남았던 코하쿠의 돈으로 충당이 되는 수준이었기에, 마담은 굳이 츠쿠모를 잡지 않았다. 또 와, 하는 인사를 받으며 츠쿠모는 문을 통과했다.


   웃겨, 정말.”


   동이 트려면 그래도 시간이 제법 남았다. 웬일로 길에는 그 흔한 주정뱅이 한 명 없었다. 하기야 가로등도 나가 버린 이런 으슥한 길은 무서워서라도 인사불성으로는 다닐 곳이 못 되었다. 길 위로 츠쿠모의 발자국이 나아갔다. 마담의 인사와 술기운으로 얼굴에 옅게 깔려 있던 웃음기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면서 사라졌다.


   욕심…….”


   욕심이 없다. 너무도 뻔히 느껴지는 이 감정이 욕심 덩어리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욕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욕심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츠쿠모가 무겐이 되었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욕심나지 않던 날이 없었다. 그러나 츠쿠모가 욕심내는 그 자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원한다고 뺏을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어쭙잖은 짓으로 타츠야가 맡긴 역할을 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파트너로 족하다. 파트너로만 남고 싶다.

   제멋대로 살던 과거의 자신이 보면 틀림없이 비웃었을 거다. 그래도, 파트너로, 남고 싶다.

   담배 연기가 밤공기에 섞여 들었다.

 

*

 

   밤거리를 수놓은 네온사인들은 애저녁에 꺼졌었다. 손님이 모두 떠난 바에는 마담의, 아니 오다케의 절친한 친구만이 남았다. 히사코의 등 위에는 오늘도, 오다케가 몇 번이고 고쳐 잡아 준 담요가 덮여 있었다. 오다케는 가게를 정리하며 뒤척이는 히사코 쪽을 바라보았다. 곧 깨어날 시간이었다.


   으응…… 배고파…….”


   잠에서 깨어난 히사코의 단골 멘트였다.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을 생각도 하지 않고 히사코는 엎드려 있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오다케를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친 두 여인이 서로 웃었다.


   밥 먹으러 갈까?”

   .”


   숙취에 절은 몸이 무거웠지만 히사코에게는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오다케가 먼저 히사코의 가방을 챙겨 일어섰고, 히사코는 그런 오다케의 팔을 감싸 잡으며 일어났다.


   , 맞다!”


   불현듯 무엇인가 떠오른 듯 히사코는 고개를 확 들어 올려 오다케를 바라봤다.


   그 아이들 어떻게 될까?”


   무척이나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원래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심각할지언정 뻔히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저 귀엽고 즐거운 일인 법이었다. 물론 늘 중간에 엎어져 버리고 마는 히사코는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말이다.


   역시 언젠가는 떨어지게 될까?”

   글쎄에?”


   흐음……. 의심 어린 눈빛이 오다케의 얼굴에 콕콕 박혔다. 알고 있으면서. 호기심 어린 볼멘소리를 하며 히사코는 조를 작정으로 오다케의 팔을 더욱 힘주어 잡았지만, 오다케는 그저 즐겁다는 얼굴로 가게를 나설 뿐이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오다케 바의 셔터가 내려갔다.

   아침의 공기는 여전히 밤의 찬 기운이 남아 있어 쌀쌀했다. 하나둘씩 가게를 열리기 시작한 아침의 거리는 유난히 부산스러웠다. 옷을 여미는 히사코는 여전히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었다.


   너 말야, 다 알면서 일부러 구경만 하다간 언젠간 벌 받을걸.”

   서로 행복의 열쇠를 쥐고 있으면서 헤매는 게 귀엽잖아.”


   오다케가 히사코에게 주는 힌트였다. 코하쿠와 츠쿠모의 관계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표현이면 충분했다. 히사코는 여전히 알쏭달쏭한 모양이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원하는 답은 얻었는지 이내 만족스러운 얼굴로 오다케의 팔을 잡아끌었다.


   됐어! 라멘 먹으러 가자!”


   저쪽 길에 새로 생긴 집 꼭 가 보고 싶었거든. 가볍고 톡톡 튀는 발걸음이 길을 따라 사라졌다. 높은 하늘 가운데 뭉쳐 있는 구름이 흐르며 부드러운 햇살이 거리 위로 쏟아졌다. 아침의 찬 기운이 햇볕에 따스하게 녹아 갔다.

공백 제외 2,746자




   정신은 또렷했지만 상쾌한 아침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꿈자리도 뒤숭숭했을뿐더러 해가 떴음에도 어두컴컴한 방 안의 풍경도 영 찝찝했다. 거기에 뭔지 모르게 끈적거리는 공기도 만만치 않았다. 습한 공기를 크게 들이켰다가 짜증을 조금 섞어 토해냈다. 정말이지 담배가 당기는 아침이었다.

   츠쿠모의 손이 침대 옆의 탁상을 더듬었다. 비닐에 싸인 종이 갑이 부스럭거리며 손에 잡혔다. 하지만 담배를 끄집어내려 흔들던 손에 떨어진 것은 내용물이 없어 힘없이 구겨지는 담뱃갑과 연료가 얼마 남지 않은 500원짜리 라이터뿐이었다.


   “제길…….”


   아침부터 되는 일이 없었다.

   평소의 몇 배로 무기력한 기분이었으나, 침대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적어도 츠쿠모에게는 당장의 기분보다는 코하쿠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츠쿠모는 한참 병원에서 잠들어 있을 때, 제법 정이 들었을 야마토와 코브라에게조차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진 전적이 있는 인간이었다. 이젠 그러지 않겠거니 해도 불안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츠쿠모는 몸을 일으키기로 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기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거실과 주방 쪽에도 코하쿠는 없었다. 가볍게 혀를 차며 일단 텁텁한 목을 축이기 위해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냈다. 물컵을 들고 거실로 돌아오며 슬쩍 확인한 현관에는 신발이 한 켤레뿐이었다. 거실의 테이블에도, 주방의 식탁에도 메모 같은 건 없었다.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난 츠쿠모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팼다. 그래도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을 보면 아주 나가 버렸다거나 큰일이 있어 나간 건 아닌 듯했다. 담배나 술, 그것도 아니면 오늘 먹을 음식 재료를 사러 나갔으리라.

   긴 한숨 소리 끝에 이질적인 백색소음이 뒤따랐다. 집 안이 어둡더라니, 비가 와서 날씨가 우중충한 탓이었다. 소리를 듣자 하니 비가 제법 억수처럼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마침 오늘 밖에 나가야 할 일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근데 코하쿠 씨는?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츠쿠모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다시 현관을 향했다. 문 옆의 우산 걸이에는 평소처럼 우산이 걸려 있었다. 언제 나갔는지는 몰라도 뻔히 비가 오는데 우산을 챙기지 않을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온다는 건 갑작스러운 소나기인 거겠지. 우산이 없는 상황에 소나기를 맞닥뜨린 코하쿠의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보던 츠쿠모는 침실 한쪽에 걸려 있는 스카잔을 챙겼다. 쫄딱 젖어 집에 들어오는 코하쿠를 맞기는 싫었다.


*


   담배가 다 떨어졌었다. 텅 빈 냉장고에 음식이 될 만한 것들을 좀 채워 넣을 필요도 있었고, 냉장고를 채우는 김에 술도 몇 병 넣어 두면 좋을 것 같았다. 아무리 많이 걸려도 30분이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일이었다. 그 30분 사이에 비가 이렇게 올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마트에 들어설 때부터 한 방울 두 방울씩 툭툭 떨어지던 빗방울은 금세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내린 게 벌써 20분째였다. 느긋하게 장을 보며 비가 그칠 때 돌아갈 생각이었던 코하쿠는 꽤나 난감한 처지가 되어 있었다. 그런 게 코하쿠뿐만은 아니었는지, 마트에서 팔던 몇 개 안 되는 우산은 모두 팔려 버려 남은 게 없는 모양이었고, 실내는 자꾸만 바깥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데리러 와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로 평소보다 좀 더 요란스러웠다. 누군가에게 연락을 할 수 있을 만한 휴대폰조차 지금 코하쿠에게는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코하쿠는 비닐봉지를 꽉 묶었다. 내용물에 비해 다소 넉넉한 봉지를 받은 덕분에 밖으로 삐져나오는 물건 없이 잘 봉할 수는 있었다. 이제 빗속에 뛰어드는 일만 남았다. 비를 맞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까짓거, 샤워 한 번 더 하면 되지. 걷든 뛰든 온몸이 다 젖는 것은 매한가지였기에 코하쿠는 걷기를 택했다. 급하게 뛰다가 까딱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거야말로 낭패였다.

   빗줄기가 꽤 매워서 앞을 똑바로 바라보기도 힘들었다. 푹 젖어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아예 넘겨 버리며, 코하쿠는 바닥을 보며 걸었다. 쫄딱 젖은 자신의 꼴을 상상해 보자니 담배가 당겼다. 아침에 일어나 우중충한 하늘을 봐 놓고도 우산을 챙기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우산을 챙겼어야 했는데. 몸에 튕기는 빗방울의 개수만큼 시답잖은 생각도 잇따랐다.

   

   “몰골 장난 아닌데, 코하쿠 씨.”


   얼추 횡단보도가 코하쿠의 흐릿한 시야에 들어왔을 때였다. 자동차가 물웅덩이를 쓸고 지나가는 소리들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방금까지도 아프게 살을 때리던 빗방울이 그치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다시 쓸어올리며 코하쿠가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어느새 제 옆에 자리 잡고 우산을 씌워 주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츠쿠모?”

   “우산 정도는 알아서 챙겨 다녀.”


   감기라도 걸리면 내가 귀찮아진다고, 하며 툴툴거리는 츠쿠모는 ‘어떻게’라는 코하쿠의 질문이 채 나오기도 전에 ‘감기 걸린다니까.’ 하는 말로 코하쿠의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걷지 않아 횡단보도에 다다랐다. 조금 전 츠쿠모가 건너왔을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다시 빨간불을 밝히고 있었다.

   제법 큰 우산이었지만 180cm는 거뜬히 넘는 남자 둘이 나란히 서서 쓰기에는 역시 지름이 많이 모자랐다. 우산이 꽤나 코하쿠의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음에도 우산의 바깥쪽에 위치한 어깨에는 여전히 빗줄기에 젖고 있었다. 츠쿠모 역시 왼쪽 어깨가 젖다 못해 스카잔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의 목 부분까지도 젖어 색이 탁하게 변해 있었다.


   “코하쿠 씨, 손 줘 봐.”

   “응? 손은 왜…….”

   “얼른.”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내민 손에는 우산이 쥐어졌다. 츠쿠모는 어느새 우산 밖에 나가 있었다. 길이가 좀 되는 머리카락이 억센 빗살에 빠르게 젖어 내렸다.


   “나, 담배가 다 떨어져서. 먼저 들어가.”

   “뭐?”

   “금방 따라갈게.”


   두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으며 가볍게 웃어 보인 츠쿠모가 뒤돌아 걸었다. 때마침 횡단보도의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졌다. 얕은 한숨을 내쉬며 코하쿠도 조금 빠른 템포로 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면 되지.”


   츠쿠모의 위로 장막이 드리웠다. 츠쿠모의 어깨에는 코하쿠의 한 손이 자연스럽게 올라가 있었다. 츠쿠모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모양인지 코하쿠를 마주 보는 표정에 놀란 듯한 감은 없었다. 대신, 다시 비를 맞기 시작한 어깨를 슬쩍 보곤 코하쿠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감기 걸린다니까.”

   “이 정도로는 안 걸려.”

   “……비, 다 맞고 있는데.”

   “그럼 좀 더 딱 붙든가.”


   코하쿠가 츠쿠모의 어깨를 힘주어 당겼다. 불만 가득한 츠쿠모의 얼굴을 부러 못 본 체하며, 츠쿠모의 몸을 이끌었다. 그러나 몇 걸음 가기도 전에 쳇, 츠쿠모가 조용히 혀를 차며 우뚝 멈춰 섰다.


   “아, 정말. 돌아가자.”

   “담배는?”

   “필요 없어.”


   커다란 남자 둘이 사이좋게 우산 쓰고 걷다가 아는 녀석 만나는 게 금단 현상보다 더 무서워. 구구절절 붙이는 핑계에 그러냐, 하고 대답해 주며 돌아섰다. 여전히 코하쿠의 팔은 츠쿠모를 감싸 안고 있었다.


   “뭣하면 코하쿠 씨 거 빌리면 되고.”

   “맡겨 놨냐.”

   “맡겨 놨지. 그 무슨 정글인가 하는 데에서.”


   코하쿠의 시선이 급하게 정면을 향했다. 킬킬 웃는 목소리가 코하쿠의 뺨을 향해 부딪쳤다. 파란불이 들어왔다. 꽤 오랜만에 코하쿠의 옆에 서서 걷는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길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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