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 제외 2,746자




   정신은 또렷했지만 상쾌한 아침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꿈자리도 뒤숭숭했을뿐더러 해가 떴음에도 어두컴컴한 방 안의 풍경도 영 찝찝했다. 거기에 뭔지 모르게 끈적거리는 공기도 만만치 않았다. 습한 공기를 크게 들이켰다가 짜증을 조금 섞어 토해냈다. 정말이지 담배가 당기는 아침이었다.

   츠쿠모의 손이 침대 옆의 탁상을 더듬었다. 비닐에 싸인 종이 갑이 부스럭거리며 손에 잡혔다. 하지만 담배를 끄집어내려 흔들던 손에 떨어진 것은 내용물이 없어 힘없이 구겨지는 담뱃갑과 연료가 얼마 남지 않은 500원짜리 라이터뿐이었다.


   “제길…….”


   아침부터 되는 일이 없었다.

   평소의 몇 배로 무기력한 기분이었으나, 침대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적어도 츠쿠모에게는 당장의 기분보다는 코하쿠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츠쿠모는 한참 병원에서 잠들어 있을 때, 제법 정이 들었을 야마토와 코브라에게조차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진 전적이 있는 인간이었다. 이젠 그러지 않겠거니 해도 불안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츠쿠모는 몸을 일으키기로 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기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거실과 주방 쪽에도 코하쿠는 없었다. 가볍게 혀를 차며 일단 텁텁한 목을 축이기 위해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냈다. 물컵을 들고 거실로 돌아오며 슬쩍 확인한 현관에는 신발이 한 켤레뿐이었다. 거실의 테이블에도, 주방의 식탁에도 메모 같은 건 없었다.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난 츠쿠모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팼다. 그래도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을 보면 아주 나가 버렸다거나 큰일이 있어 나간 건 아닌 듯했다. 담배나 술, 그것도 아니면 오늘 먹을 음식 재료를 사러 나갔으리라.

   긴 한숨 소리 끝에 이질적인 백색소음이 뒤따랐다. 집 안이 어둡더라니, 비가 와서 날씨가 우중충한 탓이었다. 소리를 듣자 하니 비가 제법 억수처럼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마침 오늘 밖에 나가야 할 일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근데 코하쿠 씨는?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츠쿠모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다시 현관을 향했다. 문 옆의 우산 걸이에는 평소처럼 우산이 걸려 있었다. 언제 나갔는지는 몰라도 뻔히 비가 오는데 우산을 챙기지 않을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온다는 건 갑작스러운 소나기인 거겠지. 우산이 없는 상황에 소나기를 맞닥뜨린 코하쿠의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보던 츠쿠모는 침실 한쪽에 걸려 있는 스카잔을 챙겼다. 쫄딱 젖어 집에 들어오는 코하쿠를 맞기는 싫었다.


*


   담배가 다 떨어졌었다. 텅 빈 냉장고에 음식이 될 만한 것들을 좀 채워 넣을 필요도 있었고, 냉장고를 채우는 김에 술도 몇 병 넣어 두면 좋을 것 같았다. 아무리 많이 걸려도 30분이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일이었다. 그 30분 사이에 비가 이렇게 올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마트에 들어설 때부터 한 방울 두 방울씩 툭툭 떨어지던 빗방울은 금세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내린 게 벌써 20분째였다. 느긋하게 장을 보며 비가 그칠 때 돌아갈 생각이었던 코하쿠는 꽤나 난감한 처지가 되어 있었다. 그런 게 코하쿠뿐만은 아니었는지, 마트에서 팔던 몇 개 안 되는 우산은 모두 팔려 버려 남은 게 없는 모양이었고, 실내는 자꾸만 바깥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데리러 와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로 평소보다 좀 더 요란스러웠다. 누군가에게 연락을 할 수 있을 만한 휴대폰조차 지금 코하쿠에게는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코하쿠는 비닐봉지를 꽉 묶었다. 내용물에 비해 다소 넉넉한 봉지를 받은 덕분에 밖으로 삐져나오는 물건 없이 잘 봉할 수는 있었다. 이제 빗속에 뛰어드는 일만 남았다. 비를 맞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까짓거, 샤워 한 번 더 하면 되지. 걷든 뛰든 온몸이 다 젖는 것은 매한가지였기에 코하쿠는 걷기를 택했다. 급하게 뛰다가 까딱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거야말로 낭패였다.

   빗줄기가 꽤 매워서 앞을 똑바로 바라보기도 힘들었다. 푹 젖어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아예 넘겨 버리며, 코하쿠는 바닥을 보며 걸었다. 쫄딱 젖은 자신의 꼴을 상상해 보자니 담배가 당겼다. 아침에 일어나 우중충한 하늘을 봐 놓고도 우산을 챙기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우산을 챙겼어야 했는데. 몸에 튕기는 빗방울의 개수만큼 시답잖은 생각도 잇따랐다.

   

   “몰골 장난 아닌데, 코하쿠 씨.”


   얼추 횡단보도가 코하쿠의 흐릿한 시야에 들어왔을 때였다. 자동차가 물웅덩이를 쓸고 지나가는 소리들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방금까지도 아프게 살을 때리던 빗방울이 그치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다시 쓸어올리며 코하쿠가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어느새 제 옆에 자리 잡고 우산을 씌워 주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츠쿠모?”

   “우산 정도는 알아서 챙겨 다녀.”


   감기라도 걸리면 내가 귀찮아진다고, 하며 툴툴거리는 츠쿠모는 ‘어떻게’라는 코하쿠의 질문이 채 나오기도 전에 ‘감기 걸린다니까.’ 하는 말로 코하쿠의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걷지 않아 횡단보도에 다다랐다. 조금 전 츠쿠모가 건너왔을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다시 빨간불을 밝히고 있었다.

   제법 큰 우산이었지만 180cm는 거뜬히 넘는 남자 둘이 나란히 서서 쓰기에는 역시 지름이 많이 모자랐다. 우산이 꽤나 코하쿠의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음에도 우산의 바깥쪽에 위치한 어깨에는 여전히 빗줄기에 젖고 있었다. 츠쿠모 역시 왼쪽 어깨가 젖다 못해 스카잔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의 목 부분까지도 젖어 색이 탁하게 변해 있었다.


   “코하쿠 씨, 손 줘 봐.”

   “응? 손은 왜…….”

   “얼른.”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내민 손에는 우산이 쥐어졌다. 츠쿠모는 어느새 우산 밖에 나가 있었다. 길이가 좀 되는 머리카락이 억센 빗살에 빠르게 젖어 내렸다.


   “나, 담배가 다 떨어져서. 먼저 들어가.”

   “뭐?”

   “금방 따라갈게.”


   두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으며 가볍게 웃어 보인 츠쿠모가 뒤돌아 걸었다. 때마침 횡단보도의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졌다. 얕은 한숨을 내쉬며 코하쿠도 조금 빠른 템포로 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면 되지.”


   츠쿠모의 위로 장막이 드리웠다. 츠쿠모의 어깨에는 코하쿠의 한 손이 자연스럽게 올라가 있었다. 츠쿠모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모양인지 코하쿠를 마주 보는 표정에 놀란 듯한 감은 없었다. 대신, 다시 비를 맞기 시작한 어깨를 슬쩍 보곤 코하쿠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감기 걸린다니까.”

   “이 정도로는 안 걸려.”

   “……비, 다 맞고 있는데.”

   “그럼 좀 더 딱 붙든가.”


   코하쿠가 츠쿠모의 어깨를 힘주어 당겼다. 불만 가득한 츠쿠모의 얼굴을 부러 못 본 체하며, 츠쿠모의 몸을 이끌었다. 그러나 몇 걸음 가기도 전에 쳇, 츠쿠모가 조용히 혀를 차며 우뚝 멈춰 섰다.


   “아, 정말. 돌아가자.”

   “담배는?”

   “필요 없어.”


   커다란 남자 둘이 사이좋게 우산 쓰고 걷다가 아는 녀석 만나는 게 금단 현상보다 더 무서워. 구구절절 붙이는 핑계에 그러냐, 하고 대답해 주며 돌아섰다. 여전히 코하쿠의 팔은 츠쿠모를 감싸 안고 있었다.


   “뭣하면 코하쿠 씨 거 빌리면 되고.”

   “맡겨 놨냐.”

   “맡겨 놨지. 그 무슨 정글인가 하는 데에서.”


   코하쿠의 시선이 급하게 정면을 향했다. 킬킬 웃는 목소리가 코하쿠의 뺨을 향해 부딪쳤다. 파란불이 들어왔다. 꽤 오랜만에 코하쿠의 옆에 서서 걷는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길을 건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