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 제외 7,517자




   20여 년을 누구 하나 없이 홀로 살다 보면, 외로움 따위에는 무감각해지고 행복에 겨운 얼굴들에 부러움을 느끼는 게 싫어 아예 타인을 신경 쓰지 않게 된다. 그런 감정들에 휘둘리던 시기는 10년 전쯤에 일찍이 끝났다. 그러나 평소에 느끼지 않는 만큼 그것들이 고이고 고여서 한 번씩, 한꺼번에 찾아오는 날도 있었다. 일정한 주기라고 할 것도 없이 돌연 밀물처럼 들어오는 것들을 받아 내는 것은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역시나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그런 날에는 누군가를 흠씬 두드려 패 주거나 바이크를 타고 달리면 좀 나았다.

   그 날은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하필이면 그 날, 그렇게 추운 날, 묵혀 뒀던 잡념들이 울화처럼 치밀 것은 뭐였을까. 싸늘하다 못해 얼어 버릴 것 같은 날씨 덕분에 거리는 텅텅 비어 있었고, 이런 날에 바이크를 탔다가는 속이 풀리기 전에 얼어 죽든 언 길에 미끄러져 죽든 황천길 행은 면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뭐 미련이 있는 인생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시시하게 죽어 버릴 거였다면 진즉 끊어질 목숨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저분하고 좁아터진 방에 박혀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 건 츠쿠모의 성정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안 그래도 쓰린 속이 도리어 뒤집어질 게 뻔했다. 눈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정확히는 싫어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그런 이유로 츠쿠모는 칼바람을 맞아 가면서도 길거리를 배회해 보기로 했다.

   제대로 앞을 보며 걸으려 했다. 그러나 계속 그러기에는 바람이 너무 매웠다. 십여 분 정도 누구든 싸움을 걸 만한 녀석이 없을까 눈에 힘을 줘 가며 걷던 츠쿠모는 결국 그냥 바닥만 보고 걷기로 했다. 목적지를 정해 두고 나온 것도 아니었고 어디에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츠쿠모는 그저 발이 움직이는 대로, 눈이 조금이라도 덜 쌓인 방향으로, 어린애들의 웃음소리가 조금이라도 적은 곳으로, 그저 걷기를 반복했다. 머리 쓰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어도 바이크 타는 취미 때문인지 길을 외우는 데에는 꽤 도가 텄기에 굳이 온 길을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돌아가는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문득 츠쿠모가 멈춰 서서 고개를 든 곳은 생전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거리였다. 어느 지역의 무슨 이름의 거리인지는 몰라도, 분위기상 건전함과는 거리가 먼 곳이라는 것만큼은 알았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 번쩍번쩍 화려한 불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모텔이니 호텔이니 하는 간판만 잔뜩 늘어서 있는 곳이라면야 뻔했다.

   츠쿠모가 결코 건실한 인간상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런 쪽’으로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쪽으로 흥미를 느꼈던 지가 언제였는지, 아니, 애초에 그럴 때가 있긴 했는지조차 스스로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것을 꺼리느냐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관심이 없을 뿐이지, 거부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츠쿠모에게는 그곳에 오래 있을 이유가 없었다.

   두 손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다가 문득 손에 종이 갑이 잡히자 담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이런 날씨에 움직이며 담배를 피웠다간 온몸이 담뱃재로 범벅되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바람을 타고 달려드는 담뱃불이 얼굴을 지져 댈 게 뻔했다. 오래 있기에 좋은 거리는 아니었겠으나, 츠쿠모는 걷기를 멈추고 잠시 니코틴을 보충할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큰길―그래 봐야 자동차 두 대도 나란히 설 수 없는 정도의 폭이었다.―을 벗어나 담배꽁초가 잔뜩 버려져 있는 아무 골목 입구에 가 섰다.

   손에 잡히던 담뱃갑을 꺼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정확히 20개비의 담배를 담은 채 단정히 각이 잘 잡혀 있던 종이 갑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꾸깃꾸깃하게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런 것쯤이야 츠쿠모는 신경 쓸 사람이 아니긴 했으나, 담뱃갑 안에 한 개비의 담배밖에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거슬리는 일이었다. 쯧, 혀를 차며 츠쿠모는 그 마지막 개비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의 줄날 바퀴를 당기면서 츠쿠모는 길의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상점가를 훑었다. 대부분은 채도 짙은 분홍색이나 빨간색 간판을 달고 있는 가게뿐이었으나, 이런 거리라고 해도, 아니 이런 거리인 만큼 더더욱 담배를 살 곳 정도는 있을 것이었다. 츠쿠모의 예상대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편의점이 있었다. 돛대였지만 새 담배를 살 곳이 있다면 아까울 것도 없었다. 날씨가 상당히 매섭기도 했고, 허전한 주머니를 채우고 싶기도 했기에 츠쿠모는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담배를 피워 없앤 후 편의점으로 걸어 들어갔다.


   “××× 8밀리.”


   말이 영 짧았으나 신경 쓰지 않는 듯 직원은 ‘네.’ 하는 대답과 함께 금방 담배를 찾아 건넸다. 서비스업 특유의 웃음도 빼먹지 않았다. 지갑에 남은 돈이 많지는 않았지만 ―지갑 사정이 여유로웠던 적이 있기는 할까.― 츠쿠모는 불만스럽게 혀를 차면서도 기어이 1000엔짜리 지폐를 꺼냈다. 거스름돈을 받아 챙기고 담뱃갑을 포장하고 있던 비닐을 벗겨 내며 계산대 앞에서 물러나자, 어느새 뒤에 줄 서 있던 남자가 무어라 말을 했다. 츠쿠모와 마찬가지로 담배 이름을 대는 모양이었다. 거기까지는 신경 쓰일 거리 하나 없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츠쿠모가 막 뜯어낸 비닐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던 때였다.


   “와, 눈물점이 한쪽에만 두 개야?”

   “허?”


   명백히 자신을 향한 말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았던 츠쿠모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다갈색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고, 그다음에는 보기 좋게 휘어 있는 입꼬리가 보였다. 츠쿠모보다 조금 키가 작은 웬 낯선 남자가 츠쿠모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싸움을 거는 놈은 처음이다 싶었다. 사실, 누가 봐도 시비를 거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조금 떨어져 그 모양새를 지켜보는 편의점 직원의 눈에는 오히려 츠쿠모 쪽에서 먼저 시비를 거는 모양새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츠쿠모의 딴에는 남자의 의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거지 같은 기분을 견디며 벼르고 있던 주먹을 휘두를 기회였다. 츠쿠모는 여느 때처럼 가시를 잔뜩 세우며 남자를 깔아 보았다. 적대감을 가득 담고 노려보는 눈은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는 데 충분했다. 그런데 남자는 츠쿠모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면서도 그다지 신경 쓰이는 기색이 없었다. 잔뜩 인상 쓴 얼굴을 보며 도리어 더욱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기분 상했다면 미안. 근데 좀 신기해서.”

   “지금 시비 거는 거냐?”

   “어? 시비라니. 너한테 관심이 있다는 얘긴데.”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에 츠쿠모의 미간이 조금 더 구겨졌다. 남자는 소리 내어 웃었다.


   “저기, 안 갈래?”


   남자의 엄지손가락 끝이 편의점의 유리문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유리문 밖의 아무 건물이었다. 이 거리에서 거의 유일하게 멀쩡한 상가란 지금 츠쿠모와 남자가 들어와 있는 편의점 정도였으니, 남자가 가리키는 곳이야 뻔했다.

   츠쿠모의 얼굴이 풀어지는 듯하면서도 오묘하게 구겨졌다. 남자의 의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데서 오는 표정이었다. 같은 말을 쓰는데도 해석할 수가 없다는 것은 정말이지 답답한 일이었다. 남자는 제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츠쿠모를 보면서도 답답한 기색 없이 웃고 있었다. 좋지 못한 머리로 남자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던 츠쿠모는 ―사실 이것조차도 츠쿠모에게는 대단히 일상적이지 못한 일이었다.― 이내 신경질적으로 팔을 휘두르며 도리질을 치고는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를 말로 남자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츠쿠모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죽여 버린다, 이 자식.”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으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얄쌍한 남자의 몸은 츠쿠모의 악력에 금방이라도 몸이 공중에 뜰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자는 겁을 먹기는커녕 불쾌한 기색조차 없었다. 그게 츠쿠모를 더 짜증스럽게 했다. 금방이라도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을 듯한 츠쿠모에게, 남자는 화를 내는 대신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제 옷깃을 잡아 뜯을 것 같은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나도 나지만, 일단 아르바이트생이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알 게 뭐야.”

   “경찰이라도 부르면 너도 곤란하지 않을까?”


   남자의 말에 츠쿠모는 고개를 돌려 카운터를 바라봤다. 확실히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애꿎은 편의점 직원은 혹여나 매장이 싸움질로 엉망이 될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숨기지도 못하고 뻔히 드러내고 있었다. 테이블 밑으로 숨은 손은 분명 비상호출벨을 누르기 위한 ―어쩌면 이미 눌렀는지도 모른다.― 것일 테다. 경찰이 제대로 일하는 걸 본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경찰이랑 엮여서는 귀찮으면 귀찮았지, 좋을 게 전혀 없었다. 츠쿠모는 퍽 오랜만에 인내심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막무가내는 아니라 다행이다. 진짜 한 대 맞으면 어쩌나 했거든.”


   당장 욕지거리를 쏟아내려던 츠쿠모는 ―어른스럽게도― 차라리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놈이 분명했다. 상대했다간 속만 뒤집어질 것이다. 츠쿠모는 아직도 손에 쥐여 있는 쓰레기를 휴지통에 꽂아 넣듯 버리고는, 편의점 문을 발로 차 열고 나갔다. 따라 나와서 또 시답잖은 말을 지껄인다면 그땐 신고할 사람도 없겠다, 작살을 내 줄 작정이었다. 그런 생각에 부응이라도 하듯, 츠쿠모의 뒤로 ‘미안했어요.’ 하는 인사말이 들렸다.

   츠쿠모는 깊게 숨을 내뱉었다. 차라리 잘 걸렸다. 저놈을 흠씬 패 준다면 기분이라도 좀 풀릴 것이다. 등 뒤의 발소리는 츠쿠모를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편의점에서 겨우 대여섯 발짝밖에 걷지 못한 발은 결국 길 위에 우뚝 멈춰 섰다. 츠쿠모는 걸음을 멈춘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고는, 남자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주먹을 내지를 생각으로 뒤로 돌았다.

   그런 츠쿠모의 눈앞으로는 남자의 생글생글한 얼굴이 아니라 생뚱맞게도 웬 담뱃갑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슬아슬하게 얼굴에 닿지 않고 딱 코앞까지만 다가온 그것은 아까 츠쿠모가 샀던 담배와 정확히 같은 것이었다. 이건 또 무슨 미친 짓일까.


   “하하, 너 정말 속마음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네. 선물이야. 이거 피우는 것 같길래.”


   어이가 없어 주먹질은 고사하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재수가 옴 붙은 날이었다. 츠쿠모는 생각을 돌리기로 했다. 깡그리 무시해 버린다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다. 안일한 생각인지도 모르겠으나, 생각 없이 건드렸다가는 분명 더 귀찮아질 거라고 그의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고 츠쿠모는 가던 길을 마저 가기로 했다. 남자의 딴에는 오히려 이편이 더 당황스러운 모양인지 ‘어어?’ 하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뒤에서 무어라 떠드는 소리가 제법 시끄러웠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렇게 길게 이어져 있지는 않은 곳이었기에 조금만 더 걸으면 이 ―여러모로― 정신없는 거리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저 앞의 큰길로 나가서 왼쪽으로 꺾고, 한참 걷다가 무슨 철물점이 나오면 오른쪽으로 꺾는다. 다시 걷다 보면 허름한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대형마트가 있다. 그 맞은편의 골목으로 들어가 걷다 보면 갈림길이 나올 것이다. 오른쪽 길로 간다. 다시 큰길이 앞을 가로막는다. 왼쪽으로 돌아 그 길을 따라 한참 걷는다. 그렇게 가다 보면 조금 안 있어 익숙하다 못해 질려 버린 길이 보일 것이다. 그 뒤부터는 그냥 몸이 기억하는 대로 걸으면 된다. 그럼 매일 가는 술집이 나오든, 집 같지 않은 집이 나오든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다.

   머릿속에 지도와 함께 거리의 생김새를 그려 가며 돌아가는 길을 되뇌는 건 꽤 효과가 있었다. 술집에서 진탕 마실지, 집으로 돌아가 일찌감치 누울지 고민하는 것도 차라리 남자의 잡소리를 듣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외롭다는 얼굴이면서.”


   하필 생각의 틈 사이로 파고든 것이 그런 말이 아니었다면 츠쿠모는 어렵지 않게 그 귀찮은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갑자기 멈춰 버린 걸음 때문에 남자는 하마터면 츠쿠모의 뒤꿈치를 밟을 뻔했다. 영문은 몰랐으나 제가 뱉은 많은 말 중에 무언가가 츠쿠모의 발목을 잡는 데 성공한 듯했다. 슬슬 기운이 빠지려던 남자는 다시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자신을 향해 돌아선 츠쿠모의 표정이 상당히 무서워 조금 겁이 나기도 했으나, 남자의 딴에는 그런 건 넘길 수 있을 만큼 츠쿠모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나한테 좀 흥미가 생겼어?”

   “죽여 버린다.”

   “춥지 않아? 난 추운데.”


   한마디라도 더 한다면 정말로 일을 내려고 했던 츠쿠모는 남자의 말과 함께 그의 얼굴에 아주 짧은 순간 스쳐 가는 어떤 표정에 몸이 굳었다. 차라리 못 봤더라면 편했을 텐데. 그 표정에 담긴 의미는 츠쿠모가 지독하게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두세 번은 마주한 것이었다. 어디에서 봤느냐고 한다면……. 거울에서 봤다고 대답할 수 있으리라.


   “보아하니 넌 경험이 아예 없는 것 같은데, 보면 알겠지만 나 꽤 친절하거든. 잘한다는 얘기 많이 들어 봤고. ”

   “…….”

   “눈도 오고 추운데 얼른 들어가고 싶기도 하고.”

   “…….”

   “외로운 처지끼리…… 좀 위로해 주면 좋잖아.”

   “……쯧.”


   사실 남자는 아무라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었다. 단지 매서운 한파가 하필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던 날에 맞춰 찾아와 자신을 달래 줄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런 남자의 눈에 츠쿠모가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그 츠쿠모도 지독히 외로웠을 뿐이다. 말하자면, 츠쿠모는 그저 오늘따라 재수가 없었을 뿐이리라.

   남자는 겉으로 보인 모습과는 달리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인지 대실비와 곧 사용할 물건들에 대한 값 모두를 기꺼이 지불한다고 했다. 어차피 츠쿠모에게는 그것들을 부담할 만한 돈도 없었으므로 좋을 대로 하라고 했다. 더불어 아까 자신의 얼굴에 들이밀던 ―담배를 안 피운다는 남자에게는 필요 없을― ‘선물’도 받아 두기로 했다.

   남자는 말이 많았다. 츠쿠모에 대해 물어보는 것만큼 자신에 대해 떠벌리는 것도 많았다. 물론 츠쿠모는 질문에 대답해 준 것도 거의 없었고, 남자의 말을 귀담아들은 것도 없었다. 남자도 츠쿠모의 반응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으니, 나름대로 서로 좋은 일이었다.

   자신이 친절하다고 단언했던 남자의 말은 확실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잠자리 경험은 물론이거니와 남자끼리의 성관계에 대한 지식조차 하나 없는 츠쿠모에게 남자는 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는 어른처럼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츠쿠모가 수치심을 느꼈을 정도로, 보기 좋은 꼴은 결코 아니었을 텐데도 남자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도, 재촉을 하지도 없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남자는 그런 것들까지 포함해서, 경험 없는 사람을 소위 ‘개발’하는 데 취미가 있다고 했다. 과연 이 거리에서 배회하고 있던 인간이 가질 만한 악취미라고 츠쿠모는 생각했다. 뒤를 처음 사용한 것치고 상당히 만족스러운 섹스를 했던 것은 그 덕분일 것이다. 기껏해야 성기를 만져 얻는 쾌감만 알았던 츠쿠모는 ‘이런 경험’을 위해서라면 곤혹스러운 준비 과정도 견딜 만하지 않은가 생각할 정도였으니 어지간히도 좋았던 모양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돈을 낼 테니 원한다면 모텔에서 하루쯤 자고 가도 된다고 했으나, 츠쿠모 쪽에서 거절했다. 통금 시간은커녕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냥 관성 같은 것이었다. 챙겨 줄 사람 하나 없이 몸을 건사하기 위한 습관 중 하나였다. 술에 절어 의식이 날아가도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천장이 보여야 했다.

   설득될 것 같지 않은 츠쿠모를 붙잡는 대신, 남자는 모텔에 구비되어 있는 메모지를 한 장 뜯어서는 제 휴대폰 번호를 적어 츠쿠모에게 건넸다. 번호를 교환하고 싶었으나, 츠쿠모에게는 휴대폰이 없었기에 아쉬운 대로 택한 차선책이었다. 외로울 때 연락해. 남자의 식상한 멘트에 츠쿠모는 콧방귀를 뀌며 메모지를 구겨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으며 방을 떠났다.

   그렇게 끊어질 줄 알았던 관계는 그 뒤로도 한번씩 만나면서 상당히 오랫동안 이어졌다. 자주 만나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만났다. 항상 츠쿠모 쪽에서 연락을 했고, 언제나 남자는 츠쿠모의 부름에 응했다. 사계절이 두 바퀴를 돌아 여름이 될 때까지도, 남자의 번호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남자는 제 이름 한 번 부른 적 없고 자신의 이름도 대지 않은 채 다짜고짜 온 전화를 받고도 귀신같이 발신자가 츠쿠모임을 알았다. 기억력이 좋은 건지, 남자에게 자신이 인상적이었던 건지는 몰라도 츠쿠모의 입장에서는 편하니 좋았다.

   아는 거라고는 얼굴과 휴대폰 번호뿐임에도 부르면 대부분 응해 오는 남자는 곪은 감정의 배수구로서 참 편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으니 무게를 느낄 필요가 없어 더더욱 좋았다. 남자의 취향은 스펙트럼도 꽤 넓어서 츠쿠모는 찾을 생각도 못 했던 몸의 여러 면면에 대해 알 수 있었다는 것도, 본래 무감각했던 부분에서 쾌감을 느낄 수 있게 된 것도 이점이라면 이점이었다. 몸의 감도를 바꾸기에 2년이라는 시간은 충분했다. 또, 츠쿠모 스스로는 느끼지 못했겠으나, 남자와의 만남 이후로는 기분 풀이랍시고 양아치와 싸움 붙는 일도 많이 줄어들었다.


   마지막 만남 이후로 한 달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푹푹 찌는 날씨 때문일까. 낮에는 그래도 일을 하며 몸을 움직이니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날이 더워도 좀 나았으나, 밤이 오면서 그나마 남은 일도 끝나고 나니 잡생각을 하기가 더 쉬웠다. 그렇다고 눅눅하고 뜨거운 공기가 식는 것도 아니었다. 츠쿠모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생각을 멈추고 남자를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에어컨 없는 집에 가 봐야 덥고 짜증만 날 것이었다.

   남자와 사적인 정보를 주고받은 건 없었기에 만나는 곳은 항상 남자를 처음 만났던 그 거리였고, 바이크를 타고 가면 금방이었다. 콘돔을 사기 위해 편의점에 들어가는 김에 아르바이트생에게 전화를 빌렸다. 연락할 사람이 없으니 굳이 휴대폰을 살 필요를 못 느꼈던 탓에 유흥가의 아무 상가에서 전화를 빌리는 것은 츠쿠모에게는 익숙하다 못해 일상이었다. 기꺼이 전화를 빌려주는 직원에게 츠쿠모는 고개를 까딱 움직여 보이고는, 저절로 외워진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언제나 그랬듯 신호음은 얼마 가지 않아 끊어졌다. 여보세요, 하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츠쿠모는 다짜고짜 나오라는 말부터 뱉었다.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악의 없는 웃음이 들렸다.

   남자는 츠쿠모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이제는 ‘이런 만남’을 하지 않을 거란 말도 덧붙였다. 쳇 하고 혀를 차면서도 알겠다고 하고 마는 츠쿠모에게 남자는 구태여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 생겨서 관계를 정리한단다. 궁금하지도 않았던 이야기에 반응해 줄 만큼 츠쿠모가 친절한 성격은 아니었고, 남자는 무안할 만했는데도 요령 좋게 잘 지내라는 말로 대화를 정리했다. 너도 좋은 사람을 찾으면 좋겠네.―남자의 마지막 말은 사족이라고, 츠쿠모는 생각했다.

   허전하다든가, 슬프다든가, 아쉽다든가 하는 감정은 없었다. 남자는 츠쿠모에게 자신에 관한 정보를 꽤 많이 말해 주었으나 츠쿠모는 휴대폰 번호를 제외하고는 뭐 하나 기억하지 못했고 ―어쩌면 츠쿠모의 이런 면 때문에 남자는 오히려 더 편하게 제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른다.― 츠쿠모는 아예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에 결국은 2년간 서로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츠쿠모에게는 그 정도의 관계일 뿐이었다. 남자 쪽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이미 사 버린 콘돔이었다. 방금 산 물건이니 환불 받으면 되기야 하겠으나,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츠쿠모는 그걸 사용하고 싶었다. 사용할 일을 하고 싶었다. 일단은 길거리로 나가기로 했다. 당당히 가지고 다닐 만한 물건은 못 되었으나, 이런 곳에서 그런 것으로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츠쿠모가 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며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와 함께 방을 잡을 수 있었던 게 그 덕인지도 몰랐다.

   낯선 사람과의 잠자리는 나쁘지 않았고, 그 뒤로 츠쿠모는 한 사람을 여러 번 만나기보다는 필요할 때 다가오는 사람과 잤다. 이유는 별것도 없었다. 방을 잡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짧았고, 연락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으니 더 편했다. 무엇보다도 여러 번 만나고 싶을 만큼 궁합이 좋았던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2년 반이라는 시간을 들인 만큼 어지간해서는 몸이 알아서 잘 받으니 그것만큼은 다행이었다. 여전히 기분 풀이로는 괜찮은 운동이었다.

   이렇게 제법 즐길 만했던 ‘취미 생활’을 그만둔 것은 남자와의 인연이 끝난 지 불과 몇 달 후의 일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남자가 츠쿠모의 앞에 나타난 탓이다.






공백 제외 5,555자




   새까만 밤이 내려앉았다. 동네가 동네다 보니 가로등의 수는 많지도 않았고, 그나마 길거리에 서 있는 가로등의 불빛들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떨리고 있었다. 시커먼 아스팔트 도로는 밤의 어둠에 파묻혀 있었으나, 이 거리에 이골이 난 코하쿠는 한쪽뿐인 눈으로도 헤매는 일 한번 없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코하쿠가 통과한 문 위로 ‘Bar ODAKE’라고 쓰인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서 와.”

   “보드카로.”

   “, .”


   리드미컬하고 가벼운 마담의 대답과 함께 무겐 딱지가 붙은 투명한 병 하나와 작은 유리잔 하나가 스탠드 위에 올라왔다. 이곳에 온 걸 보면 또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하고많은 술집 중에서 굳이 바에 와서 스탠드 앞에 자리한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니겠는가.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일 테다. 아니, 정확히는 이야기를 곳이 필요했다는 게 맞을 터다.


   “웬일로 혼자 왔네?”

   “‘파트너는 어쨌어?”


   마담의 은근한 질문에 히사코가 말을 보탰다. 남은 밤은 긴데 벌써부터 히사코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꼭 어린아이의 것 같은 호기심이 술기운에 섞여서는 두 눈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코하쿠는 두 여인의 말에 대답을 하는 대신 쯧, 하고 혀를 차며 잔에 술을 따랐다.


   “흐음…… 둘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진 않은데.”

   “그치? 바보들이라 싸웠다가도 금방 풀려 버리잖아.”


   당사자를 앞에 두고 못 하는 말이 없네. 말로 내뱉지는 않았으나 자신들을 보는 코하쿠의 표정만으로도 마담과 히사코에게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린아이가 귀여워 놀려 주는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서로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는 어른들의 짓궂은 놀림에 무어라 토를 달까 입술을 달싹이던 그 어린아이는 방금 막 채워 놓은 술잔을 비우는 것으로 반응을 대신했다.


   “근데 말이야. 너희들, 언제까지 계속 같이 다니는 거야?”

   “?”

   “그렇잖아? ‘무겐은 이제 없는걸.”

   언제까지고 따라오겠다고 한 건 그 녀석이에요.”

   하지만 너도 떼어낼 생각은 없는 거잖아?”

   고집 있는 녀석이니까, 그걸 설득하느니 내가 포기하는 게 나아요.”

   역시 바보가 맞잖아, 그치?”


   흐음, 하는 콧소리와 함께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제 쪽을 바라보는 마담을 애써 무시하며 코하쿠는 다시 잔을 채웠다.

   자신을 잘 아는 연상들과의 대작은 꼭 고양이 앞의 털실 뭉치가 된 듯한 기분이라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즐겁기는 했다. 대화를 잘 이끌어 나가는 사람과의 술자리는 확실히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코하쿠 자신이 말을 하지 않아도 두 여인은 코하쿠를 비롯한 아이들에 대한 것이든, 그것도 아니면 자기 자신들에 대한 것이든 이야기가 끊이질 않아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오다케 마담의 바는 그렇게 실없이 웃다가도 조금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코하쿠가 오기 전부터 취기가 올라 있던 히사코는 금세 테이블 위로 머리를 내려놓았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오다케는 야마토에게 연락을 하는 대신 히사코의 어깨 위로 담요를 덮어 주었다. 히사코가 쓰러지자 바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차분해져 있었다. 코하쿠의 얼굴에도 제법 취기가 올라온 기색이 만연했다. 마담은 언제나 그랬듯, 손님의 이야기를 가만히 기다려 주고 있었다.


   언젠가는 자기 길을 가겠죠, 그 녀석도. 산왕 녀석들이나 오타와 코니시처럼.”

   그럴까?”

   그 녀석에게도 자기의 인생이 있을 테니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을 보내며 겨우 떠나 보내는 법을 배운 코하쿠였다. 그렇다고 비어 버린 옆자리에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예정된 이별이 씁쓸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한 입 머금은 술 때문에 입안이 쓰고 목구멍이 타는 것 같았다. 술 때문일 것이다.


   확 결혼해 버리면 좋을 텐데. 그치?”


   오다케의 농에 코하쿠는 힘없이 웃었다.


   우리는 그럴 인연은 아니니까요.”


   오다케는 코하쿠의 말에 무어라 토를 다는 대신 보드카 하나를 새로 따서 투명한 글라스를 채워 주었다.


   위로주.”


   격려의 의미가 담긴이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고개를 슬쩍 끄덕여 보이는 것으로 감사 인사를 대신한 코하쿠는 잔을 손에 들고 잠시 찰랑거리는 술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비추기에는 빛이 미약해 그저 투명하기만 한 액체가 글라스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고, 그것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마지막 잔이었고, 여전히 술은 썼다.


   갈게요.”


   스탠드 위로 지폐 한 장이 떨어졌다. 코하쿠가 마신 것 치고는 조금 많은 액수였다.


   히사코 분까지?”

   어울려 준 답례요. 그럼.”


   조금 비틀거리며 코하쿠가 몸을 일으켰다. 항상 고마워, 하는 마담의 인사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섰다. 거리는 여전히 어두웠다.

 

*

 

   조금 전에 시작했던 것 같은 하루가 벌써 끝났다. 늘 걷던 길, 가로등 두어 개가 나간 어둑한 거리였다. 오늘은 유독 더 어두운 게 왜 그런가 하고 보니 바의 입구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빛나던 가로등 하나가 더 나간 탓인 모양이었다. 어둡긴 어두웠으나 네온사인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으므로 길을 헤맬 염려는 없었다. 오늘도 Bar ODAKE에 손님이 찾아왔다.


   어서 와.”

   어라?”


   마담의 인사 뒤에 히사코가 엉뚱한 목소리로 손님을 맞았다. 오늘도 발갛게 물든 얼굴이었다. 바에 들어와 스탠드 앞에 앉은 손님이야 마담뿐만 아니라 히사코에게도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타이밍이 묘했다.


   오랜만이네. 그나저나 혼자야?”

   코하쿠 씨, 좀처럼 술을 못 마시게 한다니까요. 어린애도 아닌데, 과보호예요.”

   몰래 온 거구나?”

   코하쿠 씨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 사람 잔소리 무서우니까.”


   그러면서 자기는 좋을 대로 마시고 말이야. 연장자들의 눈에는 그저 귀여운 투정이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얼굴의 상처들을 보아하니 코하쿠의 마음을 알 만도 했다. 성인이라지만 어린애는 어린애인 모양이었다.

   마담은 굳이 주문을 듣지 않고도 익숙하게 무겐 로고 스티커가 붙어 있는 병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땡큐.’ 하고 잔을 채우는 츠쿠모의 옆으로 히사코가 자리를 옮겼다. 그 움직임에 스탠드가 흔들린 덕에 유리잔 밖에 쏟아 버린 술을 보며 츠쿠모는 안타까움에 인상을 구겼다.


   아아, 아깝게…….”

   있지, 너희들 지금 같이 사는 거야?”

   ? , 그런데.”

   언제까지?”

   언제까지?”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답이 너무도 확실히 정해져 있던 것이었기에 굳이 스스로 그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었다. 히사코의 질문을 바보같이 반복했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츠쿠모는 금세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제까지고.”

   그 애 말이 맞긴 하네. 고집불통.”


   히사코의 말에 오다케가 소리 내어 웃었다. 무슨 말인지, 왜 웃는지는 몰라도 뻔히 본인의 이야기인 것을 알아챌 눈치는 있던 츠쿠모는 부루퉁한 얼굴을 숨기지도 않고 뭔데, 무슨 얘긴데?’라는 소리만 반복했다. 그러나 여인들은 그에게 친절히 설명해 줄 생각은 없는 듯 웃을 뿐이었다. 뭔지는 몰라도 자신을 놀리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츠쿠모는 생각했다.


   성격 나쁜 아줌마들…….”

   그런 소리 할 거면 외상값부터 내 줄래?”

   미안합니다.”


   실없는 대화와 함께 술이 한 잔 두 잔 막힘없이 넘어갔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서도 꼿꼿이 서 있던 허리는 이야기들이 오가면서 차츰 앞으로 굽어 갔다. 한껏 기분이 고양된 히사코는 한 번씩 오늘은 내가 쏠게!’라며빠칭코에서 제법 딴 모양이었다.크게 웃다가 스탠드에 엎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더니, 결국은 또 마담을 향해 절하는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그런 히사코를 챙기는 것은 늘 그렇듯 오다케의 몫이었다.


   히사코 씨랑 같이 마시면 역시 페이스 빨라지네.”

   취했나 봐?”

   조금요. 코하쿠 씨한테 걸리면 안 되니까 슬슬 그만 마셔야 할 것 같은데……. 조금 더 있어도 되죠?”

   물론이지.”


   여느 때의, 어린애 어르는 듯한 느낌이 아닌 그저 상냥한 목소리였다. 아슬아슬하게 오른 취기와 그 상냥함에 조금 긴장이 풀렸는지도 모르겠다. 답지 않게 츠쿠모는 먼저 마담을 불렀다.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언제까지고라고 했지만,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거겠지?”

   글쎄.”

   코하쿠 씨가 혼자서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언젠가는 내가 방해가 되는 날이 올 거예요.”

   그럴까나.”


   마담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해 주었다. 츠쿠모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이나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 같은 것은 아니었기에, 마담은 츠쿠모가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있을 정도의 반응만 보여줄 뿐이었다. 오랜 시간 바를 운영하며 얻은, 말하자면 노하우 같은 것이었으며, 모르긴 몰라도 효과는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아직 길을 찾고 있는 아이에게는 조금 부족한 모양이었다.


   “‘는 어때?”

   …….”


   가게에 침묵이 깔렸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던 오다케 취향의 음악도 마침 한 곡이 끝나면서 다음 노래를 재생하기 위해 준비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낯선 고요함 속에서도 오다케는 미소를 지은 채 츠쿠모의 대답을 기다렸다.

   괴로운 것은 당연히 싫다. 비참해지고 싶은 것도 물론 아니다. 될 수 있다면 그의 옆을 계속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코하쿠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더더욱 츠쿠모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역시 복잡한 것은 싫었다.


   코하쿠 씨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어요, 저는.”

   욕심 없는 애네. 재미없어.”

   그 사람한테 받은 인생이니까요.”


   가벼운 웃음과 함께 나온 가벼운 대답이었다. 오다케의 표정에 짧게 스쳐 간 안타까움을 츠쿠모는 보지 못했겠지만, 그 나무라는 듯한 말이 정말로 자신을 비난하는 말은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못마땅한 눈으로 츠쿠모를 바라보던 오다케는 또 술을 한 병 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어른 같아졌다고 멋있는 척하고 말이야.”


   새로운 글라스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보드카를 따를 잔치고는 꽤 높은 편이었다.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는 가벼웠으나, 새롭게 술이 채워진 유리잔은 제법 묵직했다. 츠쿠모가 난감한 눈으로 오다케를 바라봤다.


   응원의 의미로 주는 서비스. 남기면 안 돼? 비싼 술이니까.”


   병을 닫으며 오다케가 츠쿠모를 향해 짓궂게 웃었다. 아직도 어질어질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츠쿠모였다. 저 잔을 비우면 어떻게 되든 간에 틀림없이 아침에 코하쿠에게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다. 코하쿠에게 혼나는 건 상당히 귀찮고도 무서운 일이긴 했으나, 눈앞의 비싼 술을 마다할 정도의 절제력이 츠쿠모에게는 없었다.


   무서운 사람이잖아마담.”

   서비스를 이렇게나 주는데 무섭다니?”

   , . 고맙습니다.”


   질렸다는 듯 표정을 짓고 있으나, 술을 즐기는 그 성정은 어디 가지 않는지 츠쿠모는 웃으며 잔을 들었다. 제법 많은 양이었음에도 기어이 술잔은 바닥을 드러냈다. 스탠드에 엎어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던 츠쿠모는 동거하고 있는 사람이 어지간히도 신경 쓰이는 모양인지 불안 불안한 걸음걸이로도 집에 들어가야겠다며 가게를 나섰다. 츠쿠모가 지불한 금액은 응원 주를 제외하더라도 좀 모자랐지만, 어제 히사코의 술값을 함께 계산하고도 남았던 코하쿠의 돈으로 충당이 되는 수준이었기에, 마담은 굳이 츠쿠모를 잡지 않았다. 또 와, 하는 인사를 받으며 츠쿠모는 문을 통과했다.


   웃겨, 정말.”


   동이 트려면 그래도 시간이 제법 남았다. 웬일로 길에는 그 흔한 주정뱅이 한 명 없었다. 하기야 가로등도 나가 버린 이런 으슥한 길은 무서워서라도 인사불성으로는 다닐 곳이 못 되었다. 길 위로 츠쿠모의 발자국이 나아갔다. 마담의 인사와 술기운으로 얼굴에 옅게 깔려 있던 웃음기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면서 사라졌다.


   욕심…….”


   욕심이 없다. 너무도 뻔히 느껴지는 이 감정이 욕심 덩어리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욕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욕심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츠쿠모가 무겐이 되었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욕심나지 않던 날이 없었다. 그러나 츠쿠모가 욕심내는 그 자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원한다고 뺏을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어쭙잖은 짓으로 타츠야가 맡긴 역할을 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파트너로 족하다. 파트너로만 남고 싶다.

   제멋대로 살던 과거의 자신이 보면 틀림없이 비웃었을 거다. 그래도, 파트너로, 남고 싶다.

   담배 연기가 밤공기에 섞여 들었다.

 

*

 

   밤거리를 수놓은 네온사인들은 애저녁에 꺼졌었다. 손님이 모두 떠난 바에는 마담의, 아니 오다케의 절친한 친구만이 남았다. 히사코의 등 위에는 오늘도, 오다케가 몇 번이고 고쳐 잡아 준 담요가 덮여 있었다. 오다케는 가게를 정리하며 뒤척이는 히사코 쪽을 바라보았다. 곧 깨어날 시간이었다.


   으응…… 배고파…….”


   잠에서 깨어난 히사코의 단골 멘트였다.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을 생각도 하지 않고 히사코는 엎드려 있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오다케를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친 두 여인이 서로 웃었다.


   밥 먹으러 갈까?”

   .”


   숙취에 절은 몸이 무거웠지만 히사코에게는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오다케가 먼저 히사코의 가방을 챙겨 일어섰고, 히사코는 그런 오다케의 팔을 감싸 잡으며 일어났다.


   , 맞다!”


   불현듯 무엇인가 떠오른 듯 히사코는 고개를 확 들어 올려 오다케를 바라봤다.


   그 아이들 어떻게 될까?”


   무척이나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원래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심각할지언정 뻔히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저 귀엽고 즐거운 일인 법이었다. 물론 늘 중간에 엎어져 버리고 마는 히사코는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말이다.


   역시 언젠가는 떨어지게 될까?”

   글쎄에?”


   흐음……. 의심 어린 눈빛이 오다케의 얼굴에 콕콕 박혔다. 알고 있으면서. 호기심 어린 볼멘소리를 하며 히사코는 조를 작정으로 오다케의 팔을 더욱 힘주어 잡았지만, 오다케는 그저 즐겁다는 얼굴로 가게를 나설 뿐이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오다케 바의 셔터가 내려갔다.

   아침의 공기는 여전히 밤의 찬 기운이 남아 있어 쌀쌀했다. 하나둘씩 가게를 열리기 시작한 아침의 거리는 유난히 부산스러웠다. 옷을 여미는 히사코는 여전히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었다.


   너 말야, 다 알면서 일부러 구경만 하다간 언젠간 벌 받을걸.”

   서로 행복의 열쇠를 쥐고 있으면서 헤매는 게 귀엽잖아.”


   오다케가 히사코에게 주는 힌트였다. 코하쿠와 츠쿠모의 관계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표현이면 충분했다. 히사코는 여전히 알쏭달쏭한 모양이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원하는 답은 얻었는지 이내 만족스러운 얼굴로 오다케의 팔을 잡아끌었다.


   됐어! 라멘 먹으러 가자!”


   저쪽 길에 새로 생긴 집 꼭 가 보고 싶었거든. 가볍고 톡톡 튀는 발걸음이 길을 따라 사라졌다. 높은 하늘 가운데 뭉쳐 있는 구름이 흐르며 부드러운 햇살이 거리 위로 쏟아졌다. 아침의 찬 기운이 햇볕에 따스하게 녹아 갔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