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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09. 23:41 일부 수정




   교복을 벗은 이후로 격식에 맞게 차려입은 적은 한동안 없었으나, 그것도 이미 몇 년 전의 이야기였다. 한동안은 목이 답답해 느슨하게 풀곤 했던 넥타이도, 어깨를 타이트하게 잡는 슈트도 인제 와서는 일상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편하게 입고 싶었다. 다만 오늘 가기로 한 곳에서 아무 옷이나 입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평소 즐겨 입는 잿빛 슈트를 대신해 타이가는 폼이 널널한 검은 양복 세트를 골랐다. 평소라면 운전인을 쓰거나 스스로 바이크를 운전했을 테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두 다리만으로도 충분하다. 서두르지 않았다고 생각했음에도 금세 도착한 것은 목적지가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리라.

   오는 길에 꽃다발을 샀다. 언젠가, 줄곧 기다렸던 말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꽃을 몇십 다발이나 산 적도 있었다. 지금 떠올려 봐야 부질없는 추억이었다. 타이가는 잠시 꽃을 둘러보곤, 조용히 하얀 꽃을 골랐다. 꽃봉오리가 채 피어나지 못한 꽃이었기에 점원은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했으나, 타이가는 구태여 사양했다. 피지 못한 꽃송이, 그게 오히려 어울렸다. 물론 그런 이유로 고른 것은 아니었으나, 골라 놓고 봉오리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것이었다. 줄기가 다듬어지고 바스락거리는 비닐 포장에 싸여 나온 꽃은 그 나름대로 꽤 예쁜 모양새였다. 기왕이면 이 꽃을 받을 이가 좋아하는 것을 고르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타이가는 그가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는커녕 꽃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조차도 알지 못했다.

   뭐, 어쨌든 한 손에 꽃다발을 든 채 타이가는 걸었다. 입구에 들어서고 나니 푸른 잔디 위로 저마다의 이름을 새긴 비석들이 즐비해 있었다. 오늘은 노보리 타이가가 일 년 중 유일하게 회사에 나가지 않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의 기일이기도 했다.

   몇 번이나 왔던 곳이었기에 주변을 둘러보지 않아도 발이 알아서 움직였다. 타이가가 다다른 곳에는 이미 꽃다발이며 술병이 몇 개 올려져 있는 석판이 있었다. 며칠 전부터 왔다 간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네. 네가 떠난 후에도 아직 너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남아 있어서.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입 밖으로 낸다고 해서 들을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저 타이가는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는 물건들을 조금 정리해 놓고 그 옆으로 자신이 사 온 꽃다발을 올려두었다. 타이가의 다리가 천천히 구부러지고, 스테인드글라스 모양으로 갈라진 눈동자가 비석과 마주쳤다. 1988.××.××.-2009.××.××. 쿠레나이 와타루. 그가 이 자리에 누운 지도 벌써 10년째였다.


   잘 자고 있어?


   역시나 말로 내지는 않는다. 어차피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물음이었다. 누구에게 향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원망과 분노도, 답을 받아낼 수 없는 질문도 10년 전에 모두 쏟아냈다. 팡가이아의 수명 앞에 10년이란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런 시간이라도 지울 수 없을 것 같던 감정을 희석해 주는 정도는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러나 지금 다시 떠올려도 와타루는 어이가 없을 만큼 쉽게 세상을 떠났다. 팡가이아 쪽에서도, 인간 쪽에서도 적대 되었던 그 시간도 질기게 살아남은 그 키바가 사고 따위로 죽을 줄은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으리라. 운전자의 전방 주시 태만이라고 했다. 멀쩡히 길을 걷고 있던 와타루를 들이받은 차는 처참하게 찌그러졌고, 차에 깔린 와타루의 시신은 그보다 더 처참한 모습이었다. 겨우 모양새가 수습된 시신을 마주하고 다리가 풀릴 뻔했다. 그 자리에 시마가 없었다면 그곳에 어떤 참상이 났을까. 그때만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실은, 지금도 아무래도 상관없다. 인간 몇 명이 어떻게 되는 것쯤은, 인간이란 종족이 어떻게 되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살아남은 소수 종족에게 먹히든, 팡가이아에게 먹혀 전멸하든, 그것도 아니면 자기들끼리 잡아먹기를 반복하다 자멸하든, 아무렴 상관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인간과 공존하고 있는 것은.


   와타루, 대답해 줘.


   비석은 말이 없었다. 질문도 듣지 못하리라.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쿠레나이 와타루의 이름 위를 천천히 더듬었다. 이제는 입에 담을 일조차 없을 그 이름을 소중히, 소중히 매만졌다.


   내가 인간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그럴 가치가 있는지를.


   비석은 말이 없었다. 목소리도 들을 수 없으리라.


   나는, 이제 한계야.


   목덜미부터 떠오른 문양이 타이가의 얼굴까지 뻗어 올라왔다. 팡가이아에게 10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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