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 제외 6,882자
“헉……!”
얕은 숨을 급하게 토해냈다. 꼿꼿이 서 있던 다리가 일순 꺾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깔끔하게 한 줄로 주름이 가 있던 슈트의 바지에 지저분한 먼지가 달라붙는다. 간신히 데스크를 붙잡은 손 덕분에 고고한 왕의 얼굴만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다갈빛의 머리칼에는 이미 물기가 스며 있었다. 임원들이 모두 나간 회의실에 조용하게 그르렁거리는 왕의 숨소리가 흐른다.
왕의 충신을 자처하던 자들을 모두 쳐내고 나니 왕좌의 옆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배신당하고 이용당하고 휘둘릴 바에야 그 모든 것을 스스로 하겠노라고 왕은 다짐했으나, 이럴 때만큼은 힘에 부치기도 했다. 미개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인간과 공존하기를 선언한 왕에게 불만을 품은 자가 많다는 걸 안다. 그렇기에 이런 모습은 더욱이 아무에게도 보여서는 안 된다. 한 번 일어난 쿠데타가 두 번, 세 번이고 일어나지 못할 것은 없다. 킹은 모든 팡가이아 위에 군림해야 한다. 압도적인 무력과 공포만이 그들을 지배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약해진 모습을, 그것도 자신의 명령에 좀먹히는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다.
“형!”
그러나 왕은 숨통이 조여 오는 와중에도 또렷하게 귀에 박히는 목소리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테이블을 부술 듯 쥐어 잡은 손에 힘이 풀린다. 버티고 섰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몸을 끌어당기는 중력에 거스를 수 없는 무력함도. 그러나 왕의 몸은 바닥에 구르지 않았다. 왕을 부르던 남자는 땅을 향해 곤두박질치려는 그 몸을 받쳐 안고 대신 바닥에 주저앉았다. 왕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은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
“형, 대체……!”
“와타…….”
오랜만에 보는 소중한 이의 얼굴을 제대로 눈에 담으려는 노력이 그의 미간을 한껏 구겼으나, 시야는 흐려져만 갔다. 끝내 왕은 눈을 감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더 이상 킹이 아니었다. 왕관을 잠시 내려둔 노보리 타이가였다.
*
몸을 감싼 부드러움이 싫지 않다. 왕좌를 침대 삼아 왔던 나날 중 오랜만에 푹신한 쿠션에 온몸을 맡기는 것이었다. 얼마 만인지는 모르겠다. 굳이 알 필요 없는 일이기는 했다. 아쉽게도, 정신이 들자 손은 반쯤 반사적으로 이불을 걷어 냈다. 아직은 이렇게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떨어지기 싫은 듯 베개를 향해 손을 뻗는 머리카락을 달래듯 쓸어내린다. 일어서 주변을 둘러보니, 익숙지 않은 곳이긴 하지만 낯선 장소는 아니었다. 대리석 건물에 익숙한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포근한 나뭇빛이 가득한 방이었다. 이 방의 전 주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주인에게는 잘 어울리는 색이라고 노보리 타이가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타이가는 눈이 완전히 감기기 전 저를 내려다보던 얼굴을 떠올렸다.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당위성과는 무관한 타이가 개인의 바람에 가까운 것이었다. 두 눈썹 사이에 깊은 주름이 지며 작은 한숨이 따뜻한 방 가운데 톡 떨어졌다. 동시에 나이 지긋한 나무문이 바닥과 부드럽게 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 너머에는 물에 젖은 듯 보이는 흰 수건 하나와, 허여멀건 한 무언가를 담은 자기 그릇 하나, 투명하게 찰랑이는 물을 품은 유리컵 하나를 쟁반에 받쳐 들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와타루.”
퍽 오랜만에 부르는 이름이다. 소중함을 넘어 무겁기까지 한 존재임에도, 입에 올라서는 어쩌면 이렇게나 가볍게 튀어 오르는지 모를 일이다. 타이가는 웃어 보였다. 보이고 싶어서 짓는 미소는 아니었다. 와타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숨긴 일은 있었어도, 보여서 좋은 것까지 굳이 숨긴 일은 없었다. 그러나 와타루는 웃어 주지 않았다. 웃을 수가 없다.
“형, 몸은?”
“걱정할 필요 없어.”
여전히 미소로 일관하며 돌려준 대답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저 간헐적으로 일어나곤 하는 일일 뿐이다.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는 빈도가 늘어날 테지만. 이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타이가는 괜찮았다.
와타루는 무어라 더 말을 하고 싶은지 입술을 뗐으나, 끝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입을 채 닫지 못한 것이었다. 그를 대신해 이어갈 만한 말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타이가의 몸을 살피던 눈이 또륵, 또륵 자위를 옮기는 게 아무래도 할 말을 찾는 듯했다. 또 오랜만에, 타이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조금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어 주고 싶었으나 그것까지는 참았다. 대신, 애써 와타루에게서 눈을 떼고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에 눈길을 주었다.
“그건?”
“맞다, 이거……!”
그릇과 컵을 실은 쟁반이 테이블 위로 놓였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방에 가득 차는 듯했다. 식욕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으나, 인간이라면 충분히 입맛을 다실 만한 향이었다.
“죽인데…….”
“네가 만든 거야?”
“이상한 건 안 넣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이상한 거? 무어라 더 물으려는 타이가의 말을 얼버무리며 와타루가 먼저 의자에 앉았다.
“음식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뭐라도 먹는 게 괜찮지 않을까 해서…….”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유약한 모습은 여전하다고, 타이가는 생각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내면의 단단함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전 같았으면 지레 겁부터 먹고 고민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겠으나, 지금은 이렇게 뭔가를 해 주려 하지 않은가. 그런 와타루가 퍽 기특했다. 입맛이 없다는 게 아쉬운 일이기는 했으나.
“고마워. 마음만 받을게.”
제 말을 들은 와타루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져서는 하마터면 크게 미안한 마음이 들 뻔했다. 타이밍 좋게 와타루의 배꼽시계가 울린 것이 다행이었다. 시계가 없어 정확한 시간은 몰라도, 저녁놀이 방 안까지 들어찬 것을 보면 저녁 식사를 할 시간쯤인 모양이다. 제 식사도 잊고 준비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 기회가 조금 아깝기는 했다. 부끄러운 듯 머쓱하게 웃는 와타루의 맞은편에 타이가도 소리 내어 웃으며 앉았다.
“난 괜찮으니까 이건 네가 먹어.”
“하지만 형……!”
“괜찮아, 난 이거면 충분해.”
타이가는 스푼 대신 그 옆에 놓인 컵을 들어 보였다. 투명한 유리컵이 타이가의 검은 장갑의 색에 물들었다. 사실은 물조차도 그리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기에, 타이가는 얼마 가지 않아 잔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눈치를 보던 동생은 타이가가 몇 번이고 다독여주고 나서야 겨우 숟가락을 든다. 타이가는 늘 그렇듯 제 앞의 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음식을 삼켜 넘기고 다음 술을 뜨기 전 한 번씩 말을 붙여 준다.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별달리 할 말이 없는 듯 타이가에게 질문을 되돌려 주는 것이 있다. 자기의 이야기를 재밌게 떠벌리는 취미는 없기에 간단히 추려서 대답을 해주고 있자면 와타루는 또 음식을 한 술 떠 입에 넣는다. 눈은 여전히 타이가를 향한 채다. 그 눈을 보며 타이가는 웃는다.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시간이었다.
애초 양이 많지 않았기에 와타루가 그릇을 비우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타이가는 와타루의 앞으로 유리잔을 밀어 주었다. 물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것을 받아 마신 와타루는 뒤늦게 생각난 듯 아차 한 표정으로 제 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형, 결국 아무것도…….”
“괜찮대도.”
잔뜩 울상이 된 얼굴을 보는 남자는 언제나 그렇듯 여유 있는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즐거운 대화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미소에 밀려 눈앞에서 지워졌던 일이 떠오른다. 타이가의 몸에 관한 일이다. 본인은 질문을 받고 싶지도, 대답을 하고 싶지도 않은 듯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낮의 그거……. 무슨 일이었던 거야?”
“아무 일도 없었어.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야.”
“형……!”
와타루의 미약한 일갈에 타이가의 입꼬리가 조금 떨어진다. 타이가의 눈동자에는 와타루의 시선이 꿰뚫을 듯 와 부딪힌다. 그럴듯한 거짓말이라면 눈 하나 깜짝 않고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굳이 말하지는 않았으나 말을 하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을, 적당한 핑곗거리는 많다. 그중 하나를 고르고, 앞뒤를 맞춰 이야기를 생략해 가며 말하기만 하면 된다. 철이 들던 무렵부터 해 왔던 일이었다. 타이가는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이 끊어질 때까지 찰나의 시간, 퍼즐처럼 기억의 조각들이 맞춰지며 그럴듯한 이야기로 완성되었다.
“와타루.”
단단한 목소리가 조금 무게를 가지고 가라앉았다. 타이가가 입을 열자 와타루는 입을 닫았다. 조금 화가 난 듯한 눈동자의 이면에는 타이가가 늘 바라 왔던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몸을 뜯어 보고 싶은 것을 참고, 와타루는 타이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타이가는 부러 얼굴에서 웃음기를 빼지 않았다.
“회사 일 때문에.”
“회사라면…….”
“새로 진행 중인 사업도 있고, 팡가이아의 양식을 개발하는 것도 꽤 애를 먹여서 말이야.”
“역시 힘들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어. 뭐, 아무튼 이래저래 일이 겹쳐서 조금 피곤했을 뿐이야.”
와타루의 눈이 타이가의 몸을 살폈다. 타이가의 말을 듣고 보니 조금 살이 빠진 듯도 했다. 본인이 사양했다고는 해도 역시 한 숟가락이라도 뭔가를 먹게 할 걸 그랬다. 이런 사람 앞에서 잘도 태평하게 식사를 했구나 싶었다. 와타루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본 타이가가 눈치 빠르게 말을 이었다.
“식사는 정말 필요 없었으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
“하지만, 형…….”
똑 부러지게 할 만한 말도 없이 무작정 그를 불러 놓고 보니 무언가 위화감이 밀려왔다. 묘하게 퍼즐이 어긋난 기분이었다. 눈앞의 얼굴은 아이를 달래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타이가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땅을 향해 굴렀다. 이리저리 엇갈리는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타이가가 되레 걱정스러운 듯 와타루의 이름을 불렀으나, 이름의 주인은 답하지 않았다. 잠시간 텀을 두고 한 번 더 타이가의 입 위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역시 대답은 없었다. 타이가의 손이 와타루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힘주어 그의 어깨를 잡으려던 손은 도리어 손목을 붙잡는 힘에 의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방황하던 눈길은 다시 타이가에게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와타루?”
“형은 지금 뭘 먹어?”
“뭐?”
타이가의 얼굴이 보기 드물게 구겨졌다. 갑작스러운 물음의 의중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와타루는 무어라 부연하는 대신 타이가의 눈을 노려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린 느낌이었으나, 그 눈동자에는 간절함에 가까운 것이 서려 있었다.
그러고 보면 타이가는 무언가를 먹는 모습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도 그는 무엇 하나 먹지 않았다. 타이가가 팡가이아라는 것을 알았던 때 그 부분에 대한 것은 이해했다. 인간과 달리 팡가이아는 인간의 생명을 먹고 사는 듯했다. 그러나 와타루는 타이가의 송곳니를 본 적도 없다. 인간을 가축이라고 말하던 그 시절에도 타이가는 와타루에게 자신의 송곳니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과의 공존을 선언한 이후로는 더더욱 송곳니를 드러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타이가는 무엇을 양식으로 살아가는가. 인간으로서의 삶이 너무도 당연해 지금껏 눈치채지 못한 부분이었다. 팡가이아 태를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타이가였기에 더더욱 알아챌 수 없었다.
타이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와타루가 묻는 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표정을 지어내면서도 마음의 동요가 뻔히 드러났으리라고 타이가는 생각했다. 언제나 타이가의 미소에 쉽게 넘어가던 와타루는 지금만큼은 굽힐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타이가의 손목을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떨면서도 와타루는 타이가를 놓지 않았다. 타이가는 애써 여유를 가장했다.
“아무것도.”
와타루 안의 무언가가 무너지는 듯한 모습을 본 기분이다. 불쾌함을 자아내는 광경이었다. 타이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채 감추지 못한 감정이 목소리 위에 남아 있었다.
“나한테는 필요 없어.”
“거짓말.”
거짓말이다. 거짓말일 게 분명하다. 팡가이아가 아무것도 먹을 필요가 없다면 인간과 공존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지 않은가. 팡가이아는 인간의 생명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타이가가 이렇게 무리를 해 가며 힘쓰고 있는 게 아닌가.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말은 모순이다. 거짓말이다. 그런 확신에 가득 찬 눈이 타이가를 꿰뚫을 듯 노려봤다.
“킹이니까.”
단호하게 뱉어낸 말에는 어딘가 힘이 들어가 있었다. 와타루를 향해 억지로 만들어 보이던 웃음이 천천히 사그라졌다. 어느새 와타루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왕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도 거뜬히 서 있을 수 있어야 하는 남자는 그 눈빛조차 무거워 압박감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형…….”
“와타루,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어. 하지만 팡가이아의 몸은 인간처럼 약하지 않아. 너도 알고 있잖아?”
“그래도, 그래도 벌써 몇 달이나 됐잖아. 팡가이아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렇다면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생각이 닿자 와타루의 말이 끝맺어지지 못한 채 끊어졌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이었다. 이는 타이가를 비롯한 팡가이아 사회가 와타루보다도 더욱 치열하게 고민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아직 답이 나오지 않은 문제인 것이다. 무력감이 밀려왔다.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와타루의 얼굴이 실의에 잠겼다. 그 모습이 꼭 잔뜩 위축되어 있던 시절의 와타루 같아 타이가의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왕의 가면이 뒤편으로 물러난다.
“괜찮아, 와타루. 걱정할 필요 없어.”
타이가의 손이 가볍게 와타루의 어깨를 잡는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손이었으나, 그 부드러움만은 옷 너머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타이가는 언제나 자신을 안심시키려 할 때면 웃었다. 지금 보이는 미소도 그저 자신을 위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불안한 와중에도, 그 눈이 품은 온기가 따뜻해서 머리 아픈 문제는 미뤄둔 채 이대로 마음을 놓고 싶은 자신이 있다.
테이블이 흔들렸다. 그 위의 그릇과 컵도 흔들림에 서로 부딪혀 달그락거리며 울었다. 와타루의 몸은 테이블을 지나쳐 타이가의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타이가는 와타루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니,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와타루?”
와타루를 부르는 목소리가 흔들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가느다란 팔이 타이가의 몸을 더욱 힘주어 안았다. 온기를 찾아 파고드는 새끼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옷 위로 파고드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아도, 분명 힘이 잔뜩 들어가서는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으리라. 그 손을 타고 전해지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와타루에게 있어 좋은 것은 되지 못할 터다. 타이가가 바란 모습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니었을 터다. 그러나 그런 와타루의 앞에는 기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매달리고 싶어도 매달릴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그리고 겨우 손가락 끝에 걸렸던 것들조차 아무리 매달려도 떠나갔던 삶이었다. 그에게 손을 뻗는 이들은 ‘킹’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가 쳐냈던 이들도, 그를 내쳤던 이들도, 자신의 위에 늘 다른 것을 덧씌웠다. 그 자신이 바랐든 바라지 않았든 그들의 눈에 ‘노보리 타이가’의 존재란 언제나 배제되는 것이었다. 그런 자신을 이렇게 갈구해 주는 이가 생긴 것이다. 킹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교체될 수 있는 톱니바퀴로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그는 타이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그 사실에 노보리 타이가는 무던히도 기뻐하고 있었다. 살아야 하는,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살아가고 싶은 이유가 생긴 것이다. 타이가는 웃었다. 얼굴 위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타이가의 큰 손이 와타루의 어깨를 감싼다. 자신을 압도하기까지 했던 넓은 어깨가 지금만큼은 너무도 작게 느껴졌다. 어느 때나 강할 수만은 없는 법이다. 항상 강함을 표방할 필요도 없다. 인간은 그렇다. 그래도 되는 존재였다.
와타루가 타이가를 향해 다시 얼굴을 드러냈다. 타이가가 예상한 그대로의 얼굴로 와타루는 타이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나 불안한 빛으로 떨리는 눈동자에 어떤 말을 해 줘야 할까. 무어라 말을 해야 좋을까. 자신은 그 눈동자의 떨림이 멎기를 바라는가, 지속하기를 바라는가. 결국 타이가는 입을 닫기로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웃고 있었다.
“형…….”
“…….”
아무렇지 않다는 듯 보이는 미소를 그는 믿을 수 없으리라. 믿고 싶어도 믿어지질 않으리라. 소중한 것을 손에 넣었다가 잃어버린 자는 그랬다. 아무리 커다란 행복도 결국 끝내는 지독한 괴로움을 남기기 마련이다. 현실은 마냥 꿈 같지 않음을 와타루는 안다. 타이가가 그랬듯 와타루의 삶도 놓친 것과 잃어버린 것들로 무던 상처받은 삶이었으리라. 아니, 그런 삶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잘 알고 있다. 현실이란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종잇조각 같은 것임을. 생각한 대로, 바란 대로만 움직여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어쩌면 언젠가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똑같은 아픔을 겪고 어리석은 자신을 원망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여전히 그는 작았다. 제 품에 안겨 있는 와타루보다도 더 작았다. 움츠러든 이를 껴안기도 벅찰 만큼 작은 존재였다. 노보리 타이가에게는 아직 세상이 너무도 컸다. 그렇기에 자신의 곁을 내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킹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래도 되었다. 쿠레나이 와타루의 옆에서 그는 왕으로서 있지 않아도 되었다.
“형은 나한테 제일 소중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
“그러니까 떠나면 안 돼. 형만큼은, 곁에 남아 줘…….”
타이가의 양팔 안으로 와타루가 재차 파고들었다. 조그맣게 웅얼거리는 말들이 타이가의 뇌리에 새겨진 듯 맴돌았다. 꼭 암시처럼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재생된다. 그것은 타이가를 잡아 두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주문이었다. 주문의 발화자는 자신의 말이 어떤 힘이 있는지도 모를 테다. 언제 혼자 남겨질지 몰라 가련하게 떨고 있는 이는 모를 테다.
떠날 리가 없지 않은가. 떠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사랑하는 이를 잃는 일을 두 번 겪고 싶지 않다. 떠나는 것도, 떠나보내는 것도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신이었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이 너이듯, 너를 가장 사랑해 줄 수 있는 것도 나였다. 타이가는 웃었다. 그 웃음소리의 의미가 와타루에게 닿았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와타루의 몸을 감싸 안는 두 팔의 감촉만큼은 분명히 전해졌으리라. 팡가이아의 시간을 길다. 그러니 지금은 이것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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