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 제외 1,302자




   “꽃은 언젠가 지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법이다.”

   언젠가 시마가 어린 자신에게 했던 말이었다. 어린 자신은 그 말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기에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의 의미까지는 미처 전해지지 못했으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자니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가 갈릴 정도로 잘 이해됐다. 시마는 그때 팡가이아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도 언젠가는 죽기에 살아 있는 순간이 더 찬란한 법이지. 그 뒤에 마저 하지 않고 삼킨 말은 분명 이것이었을 터다. 질 때가 되어도 지지 않고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사는 종족을, 시마는 그 옛날부터 마음 깊이 증오하고 있었다. 그에게도 사연이 있을 테지만, 들은 적은 없고 들을 생각도 없다. 팡가이아에게는 현재만이 존재한다. 부질없이 과거를 뒤지는 일은 인간이나 하는 일이었다.

   시마의 말은 예전부터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영원히 피어 있을 수 있는 꽃보다 이미 져 버린, 언젠가 져 버릴 꽃이 아름다울 리가 없지 않은가. 영원불멸의 아름다움, 그 이상 완벽할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인간의 생각이란 언제나 우습고 시시한 공상뿐이었다.


*


   너를 볼 수가 없었다. 그 얼굴을 볼 때마다 과거의 기억이 기어 올라왔다. 파편이 되어 깨어진 기억들이 너의 목소리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곳에는 나의 고독이 있었고, 행복이 있었고, 절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나의 죄가 있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좀먹고, 너의 아버지를 희생시키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반려마저 나락으로 떨어뜨린 죄가 덮쳐 왔다.

   그 죄에는 킹의 문양과 함께 딸려온 필연적인 고독이 들러붙어 있었다. 숙명으로 정해진 영원한 고적이었다. 끊을 수 없는 사슬에 붙들린 운명이었다. 진정한 킹으로서 팡가이아의 정점에 선 순간 그의 시간에는 오직 고독뿐이리라. 킹의 힘은 모든 빛을 삼키고, 오로지 제가 선택한 자만을 고고하게 밤하늘에 떠올리리라.


*


   미오. 스즈키 미오. 그 마지막을 지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나의 퀸. 깨져 버린 유리 조각 하나 내게는 남기지 않았던, 나만의 퀸. 그가 이전에 누구를 만나 왔는지, 어떤 것을 봐 왔는지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고,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자신이고, 그는 퀸이며 자신은 킹이라는 것,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을 뿐이었다.

   진실은 무엇인가. 기쁘게 꽃을 받던 그 얼굴은 진실이었는가. 등허리를 끌어안고 나의 옷을 꼭 움켜쥐던 그 손은 진실이었는가. 푸르게 젖어 있던 그 손은 진실이었는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던 그 몸은 진실이었는가. 미오는 자신을 사랑했던가, 증오했던가. 이제는 과거가 되어 버린 일이었다.


*


   팡가이아는 현재만을 사는 종족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던가. 깨져 버린 얼굴의 파편을 이어 붙이고 있지 않은가. 과거를 찾고 있지 않은가. 자신을 일갈해 줄 이조차 남지 않은 이 고독에서 도망치고 있지 않은가.

   팡가이아에게도 그가 걸어온 과거가 있었다. 인간과 같은 마음이 눈을 떴을 때, 해일처럼 그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는 과거의 기억이 있었다. 마음이 없는 팡가이아에게 마음이 생긴다면, 그 존재는 무엇이 되는가. 팡가이아인가, 인간인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그 무엇인가. 자신은 지금 무엇이 되어 있는가.

   인간도 언젠가는 죽기에 살아 있는 순간이 더욱 찬란한 법이지. 시마가 하지 않고 삼킨 말을 떠올린다. 여기에 남은 자신은 무엇인가. 영원히 빛나는 달인가, 져야 할 때 지지 못한 달인가. 빛조차 잃고 푸른 하늘에 희미한 문양만 남은 달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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