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17.
공백 및 줄바꿈 미포함 5855자
로체스트에서의 마지막 날까지 하면 벌써 3일이나 늦잠을 잤던 리시타가 간만에 신선한 공기를 마신다. 상체를 돌리고 기지개를 켜며 계단을 내려온 그는 아직 조용한 1층을 슥 보고는 밖으로 나선다. 시린 아침 공기가 뿌연 안개로 축축하다. 리시타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키더니 크게 뱉어내며 여관 문 앞의 나무판 위에 앉는다. 채 풀리지 않은 몸을 마저 당기고 누르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어난다. 그는 간밤의 카이를 떠올려 보며 선착장으로 향한다. 어느 정도 자란 머리칼이 자꾸 눈을 가리는 게 짜증이 나 대충 머리를 쓸어넘기다가, 이내 다시 흘러내려 버리는 부드러운 그것을 포기해 버리고 손을 내린다.
선착장에 들어서자 그의 눈에는 입구 정면의 지도와 그 뒷편에 지평선까지 뻗어 있는 바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별 관심 없는 시선은 금방 다른 곳으로 향한다. 입구 바로 옆에 놓인 오크통에는 언제나처럼 주인 없는 고양이가 그르릉거리고 있고, 지도의 왼쪽에 난 길을 조금만 따라가면 이곳과는 사뭇 다른 바닷가로 가는 배가 정박해 있다. 뱃사공은 아직 나오지 않은 듯하지만. 그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옮겨져 지도를 지나 그 옆에 바짝 붙어 있는 거대한 배로 향한다. 전투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돛이 펼쳐지는 배는 꽤 오랜 기간을 그곳에 있으며 칼브람 용병단과 함께 해 왔지만 관리가 잘 되어 여전히 새것에 비해 뒤지지 않는 모습이다. 조금 더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또 하나의 지도와 커다란 배가 있는데, 그것은 낚시용으로 쓰이거나, 로센리엔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미궁으로 향할 때 사용되고는 한다. 한 바퀴 빙 돌아 리시타의 시선이 다시 흙으로 돌아온다. 그 위에 놓인, 따스한 빛의 캠프파이어. 전투용 배의 맞은 편에 자리잡은 캠프파이어는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 년 내내 꺼지는 법이 없다. 누군가는 어떤 마법사의 것이었다고도 하고, 외양이나 행동과는 어울리지 않는 칭호를 가진 ‘대마법사’ 리엘이 콜헨에 선물해 준 것이라고도 하고, 마을이 생기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정확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리시타는 그런 것 따위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전투 전에 불을 쬐면 자신이 조금 더 강해진 기분이 드는 그 캠프파이어가 편리하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불길 주변에 놓인 의자─그냥 바위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지만─에 그의 몸이 닿는다. 찰 거라고 생각하며 긴장했던 근육이 무안해질 만큼 따스한 온도가 그의 감각을 자극한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던 그 어두운 밤에 카이는 어디로 갔던 걸까? 의미없는 궁금증이 리시타의 머리에 다시 젖어든다. 고민을 해 봐도 답이 나올 리가 없지만, 아직 새조차 울지 않는 새벽의 적막이 그를 호기심으로 밀어낸다. 흠……. 얕은 한숨이 강물의 속삭임에 묻힌다.
리시타가 일어선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술이라도 연습하는 게 더 낫겠지 싶어 그의 발걸음은 다시 여관으로 향한다. 터벅터벅, 그의 발걸음이 운다. 선착장의 코앞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여관이 리시타를 받아들인다. 리시타는 발걸음을 죽인다. 아무 소리도 없는 공간을 소리 없이 움직인다. 시간은 많으니까 조급할 필요는 없겠지. 느긋한 발걸음이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가른다. 리시타의 오른손에 잡힌 두 자루의 검이 달그락대며 서로 문댄다. 다시 발소리를 낮추며 리시타는 조금 전 제가 거닐었던 곳을 역행한다. 그의 발이 2층 복도 옆을 지날 때, 소리가 들린다. 낡은 문이 신음하는 소리가. 리시타의 눈이 반가움을 내색하며 소리의 끝을 따라간다.
“카이!”
크지는 않지만 충분히 요란한 소리가 카이의 아침을 맞는다. 카이의 시선이 복도의 나무 바닥을 따라간다. 리시타의 발 끝에 걸린 그것이 그의 다리를 타고 올라 몸을 거쳐 얼굴에 다다른다. 카이의 고개가 작게 끄덕인다. 카이가 리시타에게 향한다. 아니, 리시타의 방향으로 몸을 옮긴다.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라도 된 듯한 리시타를 지나쳐 그는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조금은 옅어진 안개가 짙은 금색의 머리칼에 엉겨붙는다. 약간 쌀쌀할 법도 한데 카이는 얇은 옷가지 하나만을 걸치고서도 별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카이의 뒤를 따라나온 리시타 역시 카이의 복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리시타는 저와 비슷한 차림─리시타는 팔까지도 훤히 드러내고 있지만─의 카이를 보며 의외라는 듯 입을 연다.
“안 추워요? 이 정도면 다들 춥다고 난리던데.”
“…….”
“전 저 북쪽에서 자란지라 추위는 잘 안 타거든요. 여름엔 정말 죽을 것 같지만…….”
북쪽이라. 굳은 지 오래인 호기심이 꿈틀 움직인다. 하지만 아내 카이는 눈을 감아 버린다. 이제 와서 과거를 생각한들 무슨 소용일까. 카이는 생각을 멈춘다. 다만, 리시타의 말에는 대답을 해 주어야 할 것 같기에, 그는 최소한의 말을 리시타에게 돌려준다.
“비슷해.”
“정말요? 북쪽에서 왔어요? 남쪽 사람이 아닐까 했는데. 북쪽 사람들은 보기가 힘들거든요.”
리시타의 얼굴에 번져 있던 미소가 옅은 층만을 남기고 사그라든다. 카이는 그의 얼굴을 마주한다. 묘한 동질감이 그의 얼굴에 씌워져 있다. 북쪽 마을. 쓸데없는 공통점이 자꾸만 그의 과거를 들추려고 해 카이는 주먹을 굳게 쥔다. 리시타를 향하던 시선이 거두어진다. 잠시 빛이 나던 짙푸른 눈동자는 다시 비어 버린다. 리시타는 두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주먹을 쥐었다가 펴 본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휙휙 저어 버리며 다시 웃음으로 카이를 대한다.
“그런데 어디가는 길이었어요?”
카이는 입을 다문 채 턱짓으로 대장간을 가리킨다. 리시타는 짐짓 그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카이는 리시타의 의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그의 옆을 지나쳐 대장간으로 발을 옮긴다. 아직 고요한 나무 건물에 문소리가 퍼진다. 카이의 두 다리가 문을 넘는다. 이 이른 아침, 리시타와 카이 외에 또 눈을 뜨고 있던 여자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온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아네스트임을 리시타는 어렵지 않게 눈치채며 카이를 기다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하얀 주머니는 없어지고, 아율른에서 카이와 함께 활약했던 활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없어진 주머니에 대해 물으려던 리시타는, 자신이 콜헨에 돌아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며 돌아다니던 날 이네스트를 소개하던 퍼거스의 말을 떠올린다. 용병들에게 물건을 의뢰하고 보상한다고? 카이가 아네스트의 의뢰를 받았던 것이려니 하며 리시타는 카이의 손을 바라본다. 여관에 다시 들어가려는 듯 리시타의 방향으로 걷는 카이가 어느 정도 가까운 위치에 이르지 리시타가 입을 연다.
“아네스트 씨의 부탁을 받았나 봐요?”
“그래.”
“어제 밤에 선착장으로 갔던 건 그 부탁 때문이었어요?”
카이의 발이 우뚝 선다. 리시타 너머의 건물을 향하던 시선이 리시타를 향해 정확히 꽂힌다. 다만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던 그 푸른 눈빛에는 약간의 경계심이 새어 나온다. 리시타는 무언가 카이의 감정이 썩 좋지 않음을 느끼고, 당황스러운 어조로 변명하듯 설명을 덧붙인다.
“밤에 창문 밖으로 봤어요. 잠이 안 왔거든요.”
여전히 리시타에게 꽂힌 시선은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리시타를 꿰뚫어 그 속을 헤집을 듯하던 그 눈동자는 이내 경계를 흐트리며 다시 리시타를 떠난다. 리시타의 가슴이 휴, 작은 한숨을 내뱉는다.
“아무튼 아네스트 씨 부탁 때문이죠?”
카이는 리시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다. 무언가 또 질문을 하려는 듯 리시타의 입이 움직이지만, 피곤한 듯 그를 지나쳐 버리는 카이의 모습에 그의 입술이 닫힌다. 리시타의 눈이 카이의 어깨를 따라간다. 그의 넓은 어깨가 조금 낮아진 듯한 모습은 그저 기분 탓이라고 치부해 버리며 리시타는 그를 보낸다.
카이의 발걸음은 느릿하지만 조금함이 드러난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카이의 귀를 파고드는 금빛의 상냥한 목소리가 그를 반긴다. 카이는 두 다리를 멈추고 그녀를 본다. 티이. 언제나 그랬듯 빛나는 모습으로 그녀가 카이의 앞에 있다. 카이는 티이의 광채를 보며 자신을 본다. 지극히도 상반된 모습이 카이를 조롱한다. 자조의 미소가 쓴 향기를 머금는다. 티이는 카이의 안색을 보며 짐짓 미소를 거둔다. 그녀의 심성이 소리로 표현된다.
“몸이 안 좋으세요?”
카이는 그녀의 물음에도 입을 열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형체도 보이지 않는 듯. 귀머거리인 듯, 장님인 듯. 그 빈 눈동자에는 지독히도 서글프고 그리운 마음이 채워진다. 티이는 그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다. 미간을 조금 끌어올리며, 아주 조심스러운 빛으로 카이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괜찮아. 그렇게 걱정할 것 없다. 오늘은, 입맛이 없을 것 같으니 내 식사는 준비하지 않아도 돼.”
펴지지 못한 그 어린 얼굴을 뒤로 한 채 카이는 자리를 옮긴다. 허전하기 짝이 없는 방이 그를 받아들인다. 그 방의 모습이 마치 자신과 같다고 자조하며, 조금 딱딱한 감이 있는 침대 위로 그의 등이 자리한다. 눈꺼풀이 푸른빛을 덮는다. 검은 시야가 닥친다.
왕국의 가장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도시는 낮에도 밤에도 불이 밝혀져 있었고, 언제나 발소리, 말발굽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하늘을 잡으려는 듯 뻗어 오른 푸른색의 깃발과 그 두께가 족히 두 자는 되어 보이는 성벽. 그 안과 밖은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전쟁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호화롭고 평화로운 한 도시와, 언제 마족의 기습을 받을지 몰라 24시간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조금 더 외곽의 도시들. 사람들은 그 사치스러운 모습을 보며 조롱하고 비꼬지만, 그들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 웅장한 도시의 바로 옆에는 왕국의 중심부에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추레한 마을이 있었다. 성벽이라고 할 만한 것조차 갖추어지지 않은 곳. 허름하기 짝이 없는 그 마을에도 사람은 살고 웃음 또한 있었다. 조그마한 주점에는 고단한 일을 끝내고 돌아온 남자들이 언제나 술잔을 부딪쳤다. 여자들 못지 않게 남자들 또한 수다스러웠다. 그렇기에 주점은 언제나 우렁찬 남자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웠다.
“자네, 최북단 마을 얘기 들었나?”
“최북단의 마을? 그게 뭔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잘 들어 보게. 왕국 최북단에는 작은 마을이 두게 있었다고 하네.”
1년 내내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곳. 얼음이 녹을 일이 없고 두꺼운 털옷을 벗는 때가 없는 마을이 2개 있었다네. 그곳은 중앙 도시와는 또 다른 의미로 평화로웠다고 하더군. 고요한 마을이었네. 하나둘 떠나는 사람들 뒤에 남은 사람들은 얼마 없었지만, 마을 두 개가 친구처럼 붙어 있었기 때문인지 을씨년스러운 느낌은 없었다네. 다만 말소리가 작고 또 적을 뿐이었네. 그런데 그 부족한 말소리를 채워 주는 존재가 있었다네. 놀라지 말게. 바로 왕국 국경의 바로 밖에 살고 있던 마족이라네. 두 마을은 마족과 함께 살아가고 있던 것이었네. 듣기로는 그 마을들이 여타 다른 마을들과 교류도 못할 만큼 많이 떨어져 있었다고 하니, 내 생각에는 마족과의 전쟁에 징병될 일조차 거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
그런데 자네, 그런 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왜 이제야 이리 퍼지는 줄 아나? 너무 멀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두 마을이 이젠 없어져 버렸기 때문일세. 왜냐고? 뻔한 것 아니겠나? 그 찢어 죽일 마족 놈들, 그 악마 같은 놈들이 마을을 습격한 것이지! 오랜 기간 마족과 싸울 일이 없던 사람들은 아무런 힘도 못 쓰고 무참히 죽어 버렸을 걸세. 그렇게 방치된 채 마족의 터가 되어 버렸던 땅을 바로 며칠 전 우리 왕국군이 되찾은 것이네. 두 마을에 대한 이야기도 왕국군이 마을을 수습하면서 알려지게 된 것이지.
“마족과 함께 살다니.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구만!”
“그렇지. 두 마을의 주민들이 그 꼴이 나 버린 건 당영한 일일지도 모르겠군.”
“어쨌거나 이것으로 여신의 예언이 틀린 게 아니라는 건 또 증명되는군. 마족은 모두 몰살시켜야 해, 징그러운 것들!”
거하게 술에 젖은 사내가 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며 소리쳤다. 요란스러운 언행에 거슬릴 만도 하건만, 아무도 그에게 토를 달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맞장구를 칠 뿐이었다. 그렇게, 마족과 인간의 골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어느 마을의 멸실로, 그렇게 깊어만 갈 뿐이었다. 밤은 시간이 갈수록 칠흑으로 뒤덮였다.
높은 태양이 흐드러진 벚꽃을 빛낸다. 볕이 잘 들지 않는, 2층의 마지막 방에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겨울의 체온이 남아 있다. 카이는 짙푸른 눈동자를 꺼낸다. 그의 크고 투박한 손이 눈과 이마를 덮는다. 소리 없는 탄식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진다. 묵직하게 침대를 짓누르던 몸이 느릿하게 일어선다. 나이 지긋한 나무 바닥이 그의 발 아래 운다. 평소와 다른 허전함이 여관 1층에 머물러 있었다. 티이가 없다. 마을 바로 밖의 조그마한 신전에 갔겠거니 하며, 카이는 정오 무렵의 햇살로 나선다. 빛나는 봄빛이 그를 맞는다. 그 안에 섞여 들어 있는 남자도, 그를 맞는다.
“카이!”
“카이, 마침 잘 왔네. 안 그래도 자네를 부를 생각이었어.”
카이의 시선은 리시타에게 채 머무르지도 못하고 아이단에게 옮겨 간다.
“왕국 기사단의 의뢰를 자네들에게 맡길 생각인데, 어떤가?”
“……내용은 무엇입니까?”
“얼음 계곡 더 깊은 곳을 정찰해 주었으면 하네.”
“정찰뿐이라면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아니,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던 곳이야. 그런 만큼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곳일세. 자네들이라면 어떤 일이 일어나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나. 괜한 노파심이라 여겨져도 따라 주었으면 하네.”
카이의 입술이 불만의 숨결을 낸다. 리시타는 그런 카이를 조금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볼 뿐이다. 아이단의 눈은 무언의 명령을 하고 있었다. 용병 단장으로서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카이 또한 알고 있었다. 다만, 아주 조금 피곤할 뿐이다. 리시타의 입술이 달짝이며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더 나즈막이 잠긴 목소리가 진동한다.
“언제 가면 됩니까?”
“빠를수록 좋네만, 자네의 상태가 좋지 않다면 내일도 괜찮네.”
“아닙니다. 지금 당장 가도 괜찮겠나?”
그의 말이 무미건조하게 리시타에게 향한다. 리시타는 조금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리시타의 입이 벌어지려다가 이내 닫혀 버린다. 손에 쥐어진 두 자르의 검을 조금 더 세게 그러당겨 잡을 뿐이다. 그의 하늘빛 시선이 생기 없는 바다색 눈동자에 기척 없이 닿는다.
정찰을 위한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율른 전투처럼 전략을 짤 필요도, 전투 물품을 준비할 필요도 없었으니. 제 주인의 반만 한 길이의 활이 카이의 손끝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것 같은 무습이 리시타의 망막에 걸린다. 어째서인지 가슴이 답답한 것이 기분 나쁘다고 느끼며, 리시타는 카이의 뒤를 따라 선착장으로 향한다. 단 두 사람이 타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배가 느릿하게 닻을 올린다. 물이 흐르는 방향대로 흘러 내려가는 배 위에는 새삼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다. 카이는 배의 구석에 자리를 잡고 울렁이는 바닷물을 바라볼 뿐이다.
“무리하지 마세요.”
“…….”
어느 새 카이의 옆에 와 앉은 리시타가 평소의 들뜸을 거둔 채 말을 낸다. 카이의 시야에 리시타가 담긴다. 대답은 없었다. 그렇다고 어떤 좋은 감정 따위가 이는 것도 아니었다. 리시타의 말끝에 무언가 더 이어져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다. 제게 시선도 주지 않을 것 같던 카이의 눈동자에 리시타는 조금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는다.
“제가 카이보다 많이 어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찰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으니까요. 힘들면 쉬어도 돼요.”
“신경 쓸 필요 없다. 폐는 끼치지 않아.”
조금씩 조금씩 꺼낸 이야기를 카이는 단박에 잘라 낸다. 카이의 눈이 리시타를 떠난다. 리시타는 미간을 조금 밀어올린 채 카이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둔다. 침묵이 파도소리 위에 떨어진다. 바람에 실려온 서늘한 온도가 더 자주, 더 강하게 그들의 뺨을 할퀸다. 하얗고 투명하게 빛나는 거대한 얼음 산맥이 지평선 너머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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