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4.28.
공백 및 줄바꿈 미포함 6161자
법황청에서는 수백 년간 내려온 이 지겹고 처참한 전쟁을 여신의 이름을 내세워 합리화하고 있었지만, 전장과는 상관없는 무지한 평민들을 제외한 용병이나 기사들은 이제 그들이 왜 검을 쥐고 피를 흘리는지에 대한 물음도, 대답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제 위에서 더 화려한 배지를 가슴에 단 이가 명령을 했기에─왜 그 명령을 따라야 하는지 역시 왜 그들이 싸우는가 하는 질문과 같은 처지가 된 지 오래다. 한때는 소박하게, 그러면서도 지평선 너머까지 닿을 만큼 가득한 것이, 에린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만큼 예쁘게─아름답다기보다는 예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피어 있던 들꽃을 품 안에 한 아름 안고 있는 몇몇 여아들이 그 들판의 일부가 되어 있었는데, 익숙했던 아이들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지도 오래된 일이다. 흉측한 마족에게 몸을 잃거나 그들의 피를 뒤집어쓰는 이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남아 있지를 않다. 더러는 온몸에 피 칠갑을 하면서 실성한 듯 웃어젖히는 자도 있지만, 극히 일부일 뿐이다. 많은 사람이 가족을 잃고, 죽지 말아야 할 이유를 잃고, 어서 전쟁이 끝났으면 하는 소망도 잃었다. 그저 절망마저도 압도하는 생존 욕구에 따라, 제게 우악스러운 살의를 내비치는 흉측하고 역겨운 괴물들을 자르고 찌를 뿐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자식 자랑, 고향 자랑을 하던 전우는 불과 몇 초 만에 머리가 날아가고 만다. 그것이 일상이다. 그들은 더는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버릴 수 없는 몸뚱이와 그것을 지켜 줄 검이나 창, 방패, 활, 석궁, 그리고 묵직한 플레이트 갑옷 정도가 그들의 모든 것이다.
그들 가운데 리시타는 기적을 이룬 듯했다. 물론 그의 몸 이곳저곳에는 수많은 전투의 흔적이 새겨져 있지만, 사지는 멀쩡하고 어디 한 곳 크게 상한 곳이 없었으니. 물론 리시타 자신의 뛰어난 실력도 있었겠지만, 사람들도 리시타 자신조차도 운이 좋았던 것이라 여긴다. 또 하나, 리시타는 자신의 사람들이 죽거나 크게 다친 적이 없는 것에 늘 크게 안도하고는 한다. 물론, 비록 저와 가깝지 않은 이들이라 해도 그들 자리가 공석이 되어 버리면 리시타는 종일을 씁쓸함과 함께 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사람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하는 이기적인 안도감이 그 씁쓸함을 조금은 가시게 해 준다.
마치 사막이라도 된 듯 황량한 평원에 거대하고 묵직한 소리가 쿵, 흙먼지를 타고 날아간다. 제 목숨과 제 옆의 목숨을 지키려 무던히도 발버둥치던 이들은 인간이냐 마족이냐 할 것도 없이 소리의 근원지로 눈을 돌린다. 그 자리에는 지휘관이 된 지 넉 달이 채 안 된 젊은 기사가, 리시타가 검은 피를 뒤집어쓴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을 지켜야 할 검은 그의 발아래 눈이 뒤집힌 채 흉한 몰골로 흙먼지를 일으켰던 거대한 오거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바람조차 숨을 죽이던 짧은 순간이 지나고 여기저기서 환희의 절규를 내뿜는다. 기사들의 검이 활기를 띤다. 지쳐 가던 몸짓에 활력을 불어넣고 제 앞에서 굳어 있는 것들을 베어낸다. 수장을 잃은 것들은 속수무책으로 바닥에 널브러지고 이내 전멸한다. 승리의 환호성이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오른다. 병사들이 순식간에 리시타에게 달려든다. 곧 리시타는 몸이 공중에 떠오름을 느낀다. 지쳤을 법도 하건만, 많은 병사가 리시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그를 던져 올린다. 리시타는 그만두라며 말리던 것을 포기한 채 자신과 자꾸만 가까워지려는 듯 다가오는 하늘을 바라본다. 다시 시선을 내리깔아 땅과 병사들을 보며 그는 어딘가 괴로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왕국의 화려한 깃발이 하늘을 찌른다.
넉 달이나 되었건만 아직도 몸에 붙지 않는 방이다. 리시타는 꽤 상해 버린 갑옷과 두 검을 드윈에게 맡기고─드윈이 멋대로 가져간 거나 다름없지만─ 온몸으로 전해져 오는 찝찝함과 질척한 핏덩이를 씻어 낸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드윈에게 굳은 표정을 보일 수 없어 실컷 웃어 보였지만, 드윈이 뒤돌아서 돌아가는 순간부터 리시타의 표정을 아픈 듯 일그러져 있었다. 체온보다 조금 차가운 물에 몸을 푹 담근 채 리시타는 바로 조금 전 평원을 머릿속에 되뇐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인간의 것인지 마족의 것인지 모를 피가 사방을 질척하게 적셨다. 용감히 마족의 무기와 부딪던 검이 부러지며 몸이 두 동강 났고, 무식하게 거대한 오거의 발밑에 으깨어졌고, 개중에는 옆의 동료를 밀어내고 대신 피를 쏟는 자도 더러 있었다. 그 하나하나의 죽음을 리시타는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며, 그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전투를 끝내려 할 뿐이었다. 눈앞의 오거에게만 온 신경을 쏟아부으려 노력했다. 오거의 큰 눈이 바닥을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육중한 몸과 어울리지 않는 재빠른 손길이 리시타에게 가까워졌다. 그것보다 민첩한 발놀림으로 리시타는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흙먼지 속 오거의 손에는 본래 인간이 쓰고 있어야 했던 발리스타 창이 쥐어져 있었다. 오거의 우악한 힘으로, 그것은 나무 창이나 된 듯 먼지 구름 뒤에서 리시타를 노리며 무섭게 날아들었다. 회피의 반동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버린 리시타가 그를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이곳에서 죽는구나. 고통이 일었다. 깨진 플레이트 아래로 드러난 살갗이 메마른 황무지에 사정없이 부비어졌다. 반대쪽 어깨는 얼얼했다. 이상한 것은 통증이 그것뿐이라는 것이었다. 리시타가 똑바로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있던 자리에는 웬 거구의 실루엣이 서 있었다. 리시타 자신이 만들어 낸 먼지가 조금 가라앉자, 리시타는 눈앞의 경관에 검을 놓칠 뻔했다.
“카록?”
현실을 부정하듯 리시타의 두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렸다. 카록은 발리스타를 몸으로 받아낸 상태에서도 그 거대한 오거와 대등하게 힘을 겨루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리시타!”
카록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전장을 울렸다. 카록의 검은 피부 위로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와 턱을 축축이 적셨다. 리시타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카록의 목소리에 검을 고쳐잡고 오거의 단단한 두 팔을 깔끔하게 잘라 냈다. 고통스럽게 발버둥치며 쓰러진 그것의 심장에 리시타의 검이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카록은 아직 제 손에 잡혀 있는 오거의 손을 던져 버리고, 제 배를 시원하게도 뚫어 놓은 묵직한 쇠붙이를 힘겹게 빼내었다. 그가 입으로 토해낸 것의 몇 배는 될 피가 메마른 땅을 질척하게 적셨다. 그는 바닥에 나뒹굴었고, 곧 리시타에게 달려오는 병사들에게 밟혔다. 카록의 시신은…….
잔뜩 물을 먹은 다갈색 머리칼이 뒤로 넘어간다. 깊은 자책의 한숨과 함께 기억을 곱씹는 것을 멈춘 리시타는 이미 차게 식어 버린 수온을 느끼며 몸을 일으킨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듯도 하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시퍼렇게 멍이 들어 버린 오른쪽 어깨가 세상에 남은, 카록의 마지막 흔적이 되었다. 리시타는 아직 아린 느낌이 서리는 듯한 어깨를 강하게 부여잡으며 이 멍 자국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은 정을 나누었던 이다. 잉켈스의 휘하에 있다가 잠시 평원 쪽을 돕기 위해 리시타의 밑에 들어오게 된 그는 퍽 갑작스럽게도 낯선,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자의 밑에서 싸우게 된 것이 불만스러울 법도 한데, 그저 가끔 리시타에게 군사 전략의 조언을 해 줄 뿐 기꺼이 그를 따라 주었다. 리시타는 마치 다시 용병 단으로 돌아간 듯한 편안함을, 그와 함께 있을 때면 느꼈다. 카록이라면 자신의 등을 맡겨도 안심할 수 있을 만큼 그를, 그의 강함을 신뢰했다. 그런 그가, 죽었다.
리시타의 손이 이마에 닿는다. 조금씩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손은 이내 제 주인의 머리칼을 헤집고 쥐어뜯는다. 열린 창문 새로 찾아든 시린 바람을 온전히 그의 몸만으로 받아 내며, 리시타는 주저앉아 버린다. 그 악물린 어금니 사이로 안타깝고, 후회스러운, 아픈 울음이 섞이어 나온다. 어둠에 파묻힌 방 안에는 조용한 괴로움과 서늘한 바람과 그 모든 것을 덮는, 짙게 가라앉은 밤만이 있다. 그의 기적이 깨졌다.
아침부터 마을이 떠들썩하다. 분수대 옆에서 늘 들려 오던 피리 소리는 여느 때보다 더 경쾌하고, 승전의 기쁨을 마을 전체가 함께 노래로써 나눈다. 빛이 나는 것처럼 하얀 새가 마을 어귀를 휘돌고, 어제까지만 해도 중무장에 피 칠갑을 하고 있던 사내들은 주점에서 키룽가─오거와 싸웠던 이들이 오거와 어울리는 게 아이러니하지만─와 술판을 벌이는가 하면, 흑발의 아름다운 무녀를 넋 놓고 바라보기도 하고, 간만의 평화로운 축제가 낯선 듯 거리를 하릴없이 배회하기도 한다. 밝은 회색 벽돌로 정교하고 단정하게 쌓아올려진 성 안의 사람들은 그래도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축제를 즐긴다.
하늘로 곧게 뻗어 오르는 나팔 소리에 리시타의 눈이 뜨인다. 차가운 바닥에서 밤을 뒹굴었던 탓인지 리시타는 약간의 오한을 느끼며 몸을 일으킨다. 상쾌하지 못한 아침─실은 이미 점심이 다 되어 가는 늦은 시간이다. 불편한 자세, 불편하게 청했던 잠은 깊어지지도 않고 몇 번이나 그를 깨워 댔다. 리시타의 눈 아래에 여트막하게 그늘이 생긴 것은 아마 그 때문이리라. 뻣뻣한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그는 씻고 나갈 채비를 한다. 그의 눈에는 어젯밤과 같은 슬픔이 아직 머물러 있지만, 무언가 반짝이는 게 있다. 리시타가 입술을 굳게 다문다. 주먹을 아플 만큼 쥐었다가 곧 힘을 푼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한탄 같은 숨결을 뱉어낸 뒤 리시타는 문고리를 돌린다. 길지 않은 계단을 내려가니 평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이 아무도 없다. 썩 쓸쓸한 느낌을 미루어 두고 그는 기숙사를 나선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옆의 사무실. 모두가 자리를 비웠지만, 리시타의 예상대로 이 소란에서도 루더렉과 드윈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리시타를 먼저 발견한 드윈이 그에게 인사를 건넨다.
“잘 쉬었나. 아니, 편히 쉬셨습니까?”
“이제 그렇게 격식 차리면서 부르지 마세요.”
리시타가 드윈을 향해 웃는다. 그 웃음은 어딘가 서글퍼, 드윈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리시타를 바라볼 뿐이다. 달갑지 않은 목소리에 루더렉은 인상을 구기며 리시타를 훑어본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리시타는 조금 떨어져 앉아 있는 루더렉에게 다가가 호쾌한 그답지 않은 목소리로, 하지만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앉아도 될까요?”
루더렉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리시타를 보지만, 언제나 그래 왔듯 리시타는 그저 웃음과 함께 그의 대답을 기다린다.
“쓸데없는 이야기라면 듣기 싫다.”
그 굵직한 목소리가 완강한 거부를 표한다. 리시타는 조금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루더렉을 다시 내려다본다. 루더렉이 몸을 일으킨다. 루더렉이 몸을 일으킨다. 나가 버리려는 것인가 싶어 드윈이 그를 막으려는 의도로 몸을 움직였지만, 의외로 루더렉은 리시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 있을 뿐이다. 리시타보다 한 뼘은 더 큰 장신이 리시타를 내려본다. 단지 리시타가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는 데에 드윈의 생각이 닿는다.
“칼브람 용병 단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드윈이 경악한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해 왔던 모든 것을 전부 수포로 돌리는 행동임을 리시타는 알고 있다. 그녀를 배신하는 꼴이 된 것 같다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조(自嘲)한다. 리시타는 루더렉의 얼굴에 불쾌함과 함께 서려 있던 통쾌한 표정을 본다. 루더렉은 리시타를 빤히 바라보다가 경멸 가득한 어조로 다시 말을 뗀다.
“왜지? 이제 와서 전장에 나서는 것이 두려워지기라도 했나?”
“……네.”
“한심하군!”
“…….”
“애초에 너 따위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어서 눈앞에서 사라져라. 법황청에는 있는 그대로 보고하겠다. 혹여나 다른 곳에 숨어 살면서 네놈이 기사였다느니 하는 말을 꺼낼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마라. 네놈은 왕국 기사단에 수치스러운 오점을 남겨 놨을 뿐이니까.”
루더렉은 리시타에게 온갖 독설을 뱉어낸 뒤에야 사라졌다. 드윈이 루더렉을 붙잡고 설득해 보려 했지만,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완고했고, 냉혹한 시선에 드윈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의 출구까지 루더렉을 쫓아 내려갔던 드윈이 망연한 표정으로 리시타에게 돌아온다. 그녀를 보고 리시타는 또 다른 자책을 하며 의자 위로 몸을 내린다.
“드윈.”
드윈은 그의 부름에 대답을 하지도, 그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드윈에게 미움받겠구나 하고 리시타는 생각하며 쓰디쓴 미소와 함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듯 입을 열기 시작한다.
“나는, 내가 강한 줄 알았어요. 왜냐면, 칼브람 용병 단에서는 계속 그렇게 말해 줬거든요. 리시타, 너 정말 대단하구나. 모두 네 덕분이야 하면서 말이에요. 왕국 기사단인 드윈도 그렇게 말해 줬잖아요? 그게 내 세상의 전부였어요. 하지만…….”
“넌 강하다. 사실이야. 자신을 깎아내리지 마라.”
드윈에게 시선을 옮긴다. 그녀의 확고한 눈빛이 리시타에 대한 믿음을 말해 준다. 리시타는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이지만, 이내 아픈 얼굴이 되어 버린다. 드윈은 리시타의 그런 얼굴을 보는 것이 처음이고, 또 그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어 입을 다물어 버린다. 리시타의 시선이 어딘지 모를 곳에 박힌다. 아니, 아무 데도 보지 않은 채, 그는 끊긴 말을 이어 나간다.
“하지만 저는 약했어요. 지금도 약하고요. 지휘관이 되고 전 수천 명의 목숨을 쥐고 있는 명예를 얻었고 물론 그걸 원하기도 했지만, 저는, 내 밑의, 내 주변 사람들을 단 한 사람도 버리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강하니까 주변 사람들을 모두 지켜낼 수 있을 거라고 자만했어요. 모든 전투에서 적어도 수백 명이 죽어나가지만, 나만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두서없이 늘어놓인 말들을 드윈은 한마디 한마디 모두 새겨듣는다. 갈수록 말에 물기가 짙어져 감을 느낀 드윈은 말이 끊어지자 안타까운 눈길로 리시타를 바라본다. 저 어린 몸에 자신은 무슨 짐을 지어 주었던 건가. 떨리는 숨결을 가다듬은 후 리시타의 목소리는 조금 더 작아진 채 말을 다시 담는다.
“저는 카단 님처럼 압도적으로 강하지 않아요. 아이단 님처럼 전략을 잘 세우지도 못하죠. 드윈이나 루더렉 님처럼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할 만한 이성도 없어요. 그저 객기뿐이었어요. 내 주변에서 비명을 지르며 없어져 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저 혼자만 전투에 참여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전 최소한 우두머리를 혼자 맡는다면 희생자가 줄 것 같아서, 그래서…….”
“…….”
“전 강하지도 않았고, 그 때문에 카록이 죽었어요. 나를, 나 같은 것을 살리겠다고, 나를, 밀치고…….”
카록이라면 그 자이언트─마족에 속한다고 해서 십여 년 전 기사들이 토벌했던 종족─를 말하는 건가. 그와도 그만큼이나 가까워졌던 건가. 그래, 최근 그가 그 자이언트와 잘 어울려 다닌다 했지. 드윈은 문득 앨리스의 일기장이 떠올라 눈을 지그시 감는다. 리시타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끈질기게 그를 괴롭혀 오는 무거운 죄책감만이 그의 목을 틀어막았다. 드윈은 리시타에게 다가가, 억지로 몸의 떨림을 막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대화가 그녀의 입술에서 시작된다.
“갑옷과 검은 아르센에게 맡겨 두었으니 찾아가도록.”
“전쟁이 끝나면… 콜헨에 와요. 얼음 딸기주를 대접할게요.”
“기대하지.”
마지막 미소가 서로 향해 번지고 이내 돌아선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나눈 그 대화가 터무니없이 먼 날의 이야기가 될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굳이 내색하지도 않고,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소망이다. 그날이 제발 그들에게 찾아오기를 바라는, 얼굴에 주름을 한가득 머금은 날이어도 좋으니 부디 그들 앞에 강림하기를 바란다. 아무도, 더는 누구도 죽지 않기를. 리시타도 드윈도 서로 빌어 준다.
거리는 여전히 시끄럽다. 리시타는 수백의 인파를 뚫고 아르센에게 겨우 찾아가 갑옷과 검을 받는다. 말끔히 닦이고 벼려진 그것들을 보다가 리시타는 카록의 죽음이 떠올라 입술을 물지만, 이내 애써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휙휙 저으며 아르센에게 인사를 하고 나온다. 로체스트 성문에는 늘 망부석같이 제자리를 지키던 문지기조차 없다. 차라리 귀찮을 일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거대한 성문 너머의 드넓은 들판을 딛는다. 바로 어제 그가 밟은 평원이 예전에는 이런 모습이었을까 하는 시답잖을 생각을 하며 걸음을 뗀다. 마차를 타지 않은 것은, 그저 이 들판을 걷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용병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저 걷고 또 걷는다.
어느덧 해는 붉게 타오르며 하늘을 잠식해 가고 있다. 고향도 아닌 이곳 콜헨, 정말이지도 고향인 듯 그리웠던 마을에 리시타의 발길이 닿는다. 그는 마을의 정문을 지나자마자 그 자리에 쓰러지듯 앉아 타오르는 듯한 콜헨의 나무 집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다가 이내 눈을 감는다. 오랜만의 편한 기분으로, 그는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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