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01.
공백 및 줄바꿈 미포함 9621자
로체스트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아침이다. 콜헨은 요란한 기상나팔이나 웅장한 종소리 대신 부지런한 망치질 소리와 새의 지저귐이 아침 공기를 채운다. 부지런한 여인들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달그락거림도 이따금 섞여 나온다. 마을 한가운데에 위치한 여관에서 금발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관 주인인 늙고 마른 남자는 그녀를 티이라 부르며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배웅한다. 티이는 평소의 수수한 원피스가 아닌, 새하얀 무녀 복을 걸친 채 몇 없는 건물 사이의 넓은 공간─굳이 칭하자면 길 정도가 되겠다.─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모험가 상점에서 가죽끼리 부비는 소리가 난다. 그 옆의 마법 연구소에서는 마법사 브린이 차를 마시고 있는 듯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티이는 그 소소한 소리를 하나하나 귀담아들으며, 미소를 띤다. 마법사 연구소의 앞에 다다르자 티이의 발이 우뚝 멈춘다.
“리시타?”
티이의 부름에 리시타는 아무런 답이 없다. 마치 죽어 있는 듯 곤히 자는 리시타에게 티이는 두려움에 잠긴 얼굴로 조심스레 다가간다. 그녀의 손이 리시타의 볼에 닿는다. 움찔. 그의 몸이 움직인다. 티이는 조금 놀란 듯 주춤하더니, 이내 웃음을 피운다. 그녀의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하다. 리시타는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제 앞에 있는 하얀 형체에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검에 손을 대지만, 금세 또렷해진 시야에 들어찬 빛나는 티이의 웃음에 기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린다.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찬 밤 공기와 함께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밤을 지냈기 때문인지 몸이 주인의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를 않는다. 난감한 듯 하하 웃어 버리며 그가 티이에게 손을 뻗는다.
“좀 일으켜 줄래?”
티이의 온화한 미소와 함께 가녀린 두 손이 리시타의 오른손을 붙잡아 힘껏 당긴다. 몸에 걸친 거라고 해야 낡은 천 옷에 검 두 자루뿐이었건만 그런 리시타를 일으키는 데 꽤 힘을 들이는 티이를 보고 그는 플레이트를 입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여전히 뻣뻣한 관절을 움직여 본다. 뼈가 부러지는 듯한 울음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조금은 편해진다. 리시타의 눈동자가 문득 그녀의 옷으로 향한다.
“신전에 가고 있었나 보네.”
“네.”
티이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본다. 그 친절함에 리시타는 고마워하면서도 자신이 티이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는 듯해 미안함을 느끼며 티이의 걸음을 재촉한다. 티이를 떠밀 듯 보내고 리시타는 곧바로 용병 단 사무실로 향한다. 모험가 상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낡은 건물이 드러난다. 매끈하지 못하게 마구잡이로 일어나 있는 나뭇결이 그가 용병이었던 때보다 더 심해진 듯하다. 나무 문의 고리는 더 손때가 탄 모습이다. 어설프게 닦아낸 흔적이 보이는 문고리에는 얇게 거뭇한 무언가가 달라붙어 있다. 리시타가 손톱을 세워 긁어내자 바스러지며 떨어져 버린다. 리시타는 그것이 피가 아니기를 바라며, 용병 단의 목소리가 줄어들어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껴안고 문고리를 돌린다. 용병 단은 리시타를 발견하지 못할 만큼 바삐 움직이고 있다. 문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은 리시타는 곧 그것이 전략 회의임을 알아챈다. 그의 몸이 슬쩍 마렉의 옆에 선다. 테이블을 가득 채운 지도를 들여다보며 아이단─용병 단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그가 돌연 입을 뗀다.
“아니요. 그쪽 길은 지난번에 건물이 무너져서 막혔어요. 좀 멀지만, 바깥쪽으로 돌아가야 해요.”
제 말을 막아선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 아이단의 눈동자가 구른다. 그리고 이내 그는 제 눈을 의심한다. 로체스트에 있어야 할 리시타가 제 앞에 있으니. 아이단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용병 단원들도 하나둘씩 그의 시선을 따른다. 그리고 입을 벌린다.
“리시타!”
피처럼 붉은 머리칼의 여인, 남자들만 가득한 곳에 정말 홍일점처럼 존재하는 케이라가 황망의 침묵을 깨뜨린다. 그녀는 누구보다 반가운 듯 리시타의 두 어깨를 잡는다. 그녀의 입술이 환히 열린다.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여과 없이 흘러내린다. 리시타는 뒤늦은 인사를 한다. 구체적인 사건은 말하지 않지만, 그는 다시 용병 단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못을 박는다. 눈치 없는 게렌과 마렉이 끈질기게 무슨 일이냐 묻지만, 아이단은 리시타의 쓴 표정을 보며 그들을 말린다. 그리고 아무런 물음도 없이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마렉과 게렌의 집요한 목소리가 용병 단 사무실 가득 퍼져 나가는 함성에 묻혀 버린다. 아이단은 잠시 휴식을 하자고 하고, 리시타에게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 보라며 그를 쫓아내듯 보낸다.
용병 단 사무실에서 벗어난 리시타는 에른와스─여관 주인과 커스티─모험가 상점 주인을 가장 먼저 찾아 인사를 나눈다. 에른와스는 그에게 여관방 하나를 빌려 주겠다고 하지만, 리시타는 한사코 사양하며 돈을 치른다. 커스티는 그의 늠름해진 모습을 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왠지 낯부끄러워진 리시타는 겸손을 떨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마법 연구소에는 브린과 네베레스가 있지만, 누구도 인사를 하거나 반가워하는 기색을 비치지 않는다. 리시타는 그들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네며 언젠가 브린에게 주려고 모아온 에르그 결정과 흔적을 넘긴다. 브린은 정중하게 감사를 표하며 포션과 피닉스의 깃털을 몇 개 건넨다. 잡화점은 전에도 그랬듯 클로다와 리엘의 말소리로 요란하다. 고향─아율른을 잃은 뒤 줄곧 힘이 없던 페넬라는 어느 새 아일리에와 꽤 친해져 좀더 밝은 모습을 보인다. 리시타는 그들의 얼굴만을 슥 보고 웃으며 일찍 잡화점을 나선다. 한 번 잡히면 그들의 수다스러움에 푹 지쳐 버릴 것이 무서웠기 때문일까? 마지막으로 대장간으로 향한다. 퍼거스와 그의 망치만 있던 대장간에는 웬 여인이 한 명 있었다. 낯선 그녀에게 의문을 가진 채 리시타는 우선 퍼거스에게 인사를 한다. 호탕한 웃음이 그를 반긴다. 누구냐고 물으며 해괴한 물건을 들여다보는 여인을 슬쩍 바라보는 리시타에게 퍼거스는 리시타가 로체스트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타지에서 온 여자라 대답한다. 가끔 찾아오는 용병이나 여행자에게 물건을 찾아와 달라고 하고 보수를 주는 식으로 무언가 일을 하는 모양이라고, 퍼거스는 덧붙인다. 리시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그녀 또한 매혹적인 미소로 그의 인사를 맞받아 준다. 이름이 아네스트라고 했다.
하루가 그렇게 빠르게 지나갔던 적이 있던가, 리시타는 생각해 본다. 로체스트에서는 늘 길기만 했던 하루건만, 콜헨에서의 하루는 시간이 모자랄 만큼 리시타에게는 너무나도 짧다. 어제 들판에서 보았던 듯한 불길이 지평선에서 스러져 갈 때쯤 리시타는 다시 용병 단으로 몸을 들인다. 다들 식사를 하러 흩어진 듯 사무실은 공허하다. 그 가운데 한 남자만이 아무도 없는 공간에 앉아 창 밖으로 타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다. 아이단 님인가? 리시타는 곧 제 추측이 틀렸음을 깨닫는다. 그의 손은 화살을 잡고 있었다. 아이단은 활을 쓰지도 않고 다른 이의 물건을 거의 만지지 않기에, 그는 다른 용병 단원들을 떠올린다. 답은 나오지 않는다. 리시타는 낯선 뒷모습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저기…….”
남자의 고개가 돌아간다. 리시타의 눈에 비친 남자의 반쪽짜리 얼굴은 너무나도 낯설고, 너무나도, 그래, 차갑다. 남자는 다시 고개를 바로 하고 제 손에 잡힌 살을 매만지다가 이내 몸을 일으켜 리시타를 바라본다. 정중하게 남자의 손이 리시타를 향한다. 카이입니다. 잠시 당황해 움직이지 못하던 리시타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그의 손을 잡는다. 리시타예요. 카이의 손이 딱딱하다고 리시타는 시시한 생각을 해 본다. 손등에 닿는 엄지와 검지가 나무껍질 같다고. 제 손 역시 그에게 같은 느낌일 테지 하며 리시타는 웃음을 띄운다. 카이는 웃지 않는다. 그저, 아무 감정 없이, 리시타에게 잡힌 손을 슥 빼낼 뿐이다. 머쓱한 웃음이 다시 카이를 향한다. 카이는 시선을 내리며 다시 제 몸을 앉힌다. 리시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맞은편에 앉는다. 카이의 시선이 의문을 던진다.
“저녁은 안 먹어요?”
격식을 차리지 않은, 정말 편한 말을 던지며 리시타는 카이를 바로 마주 본다. 카이의 눈은 짙푸른 보석의 빛깔이지만, 리시타는 왠지 그 눈이 비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코는 높은 것이 또 날카롭기도 해 무언가 베어 버릴 듯하고, 피부는 약간 그을려 있어 리시타보다 더 어두운 빛깔이지만 애초부터 그의 피부는 그 색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금발이라기에는 갈색의 빛깔이 섞여 있는 머리칼은 정리되지 않은 채 성의 없이 뒤로 넘겨지거나 늘어져 있고, 그의 턱부터 볼까지는 까슬하고 뻣뻣해 뵈는 수염이 짧은 길이로 돋아나 있다. 윤기를 잃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피부와 눈 밑에 여리게 남은 세월의 자욱이 그의 나이를 말해 주는 듯하다. 카이는 자신을 뚫어 놓을 듯 바라보는 리시타가 달갑지 않은 듯 미간을 좁힌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공격적인 어투에 리시타가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애써 띄운다. 약간의 어눌한 투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그는 카이를 달래듯 입을 연다.
“불쾌하시면 피해 드릴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대답이 없을 거라 리시타는 생각했지만, 의외로 카이는 사양의 말을 리시타에게 되돌려 준다. 리시타의 얼굴에 옅은 안도감이 슥 퍼진다. 굳어 있던 리시타의 몸과 표정이 조금 편안해지고 다시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말 편히 해요.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놈한테까지 굳이 예의 차릴 필요 없어요.”
카이는 괜찮다며 거절하려다가 문득 케이라와 마렉이 떠올라 입을 다문다. 그들에게도 말을 낮추는데 이 청년에게 말을 높일 필요는 없겠지.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리시타는 낯설고 또 차가운 이와 한 발짝의 거리를 좁힌 것이 기뻐 치아를 환히 드러낸다. 카이는 조금 귀찮음을 느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제 앞의 청년을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선다. 리시타는 멍한 표정으로 카이를 바라본다.
“저녁, 준비가 다 됐을 것 같군. 먼저 나가지.”
카이가 문을 열어젖힌다. 몇 발자국 옆에 있는 여관에서 흘러나오는 음색 냄새가 어느 새부터 관심 밖에 밀려나 있던 식욕을 깨운다. 금세 닫힌 문틈으로 적막이 퍼진다. 리시타는 느긋하게 일어서 카이가 지나간 땅을 밟아 간다.
전투는 다음 날 늦은 저녁이라고 했기에 리시타는 하얀 달 조각이 하늘의 한가운데에 오를 때까지도 눈을 감지 않는다. 이름 모를 벌레가 고요한 마을을 노래한다. 리시타는 그것을 가만히 들으며 콜헨의 추억을 되짚는다. 여차여차히 오게 된 용병 단에서 거대한 거미의 등에 검을 꽂아넣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용병 생활. 붉은 털의 놀을 중심으로 군집하는 놀을 헤집고, 샤칼의 전언을 받은 코볼트를 상대하다가 디거의 끈적한 체액에 처음으로 얻었던 플레이트가 못 쓰게 녹아 버리기도 했다. 거대한 북극곰의 붉은 눈을 뽑아내기도 했고, 그런 녀석이 다시 도전해 오는 것을 또다시 좌절시키기도 했다. 아율른은, 그래, 아율른에서는 페넬라를 위로하려고 호박밭에서 호박을 가져오려다가 뱀파이어를 만나 옷이 까맣게 타 버리기도 했다.
즐거운 듯 하나하나 기억을 상기하던 리시타의 얼굴이 굳는다. 슬픔에 젖은 눈으로 아율른이 있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린다. 앨리스. 생기 있고, 신념이 굳고 또 곧았던 어린 생도는 리시타가 서리하던 호박밭의 창살 너머에서 처참하게 으깨어졌다. 리시타가 눈을 감는다. 앨리스와 카록. 그는 그들을 떠올리며 침대에 몸을 눕힌다. 자꾸만 떠오르는 상념으로부터 도망치듯 리시타는 눈을 감아 버린다. 잠으로 도망친다.
해가 중천을 뉘엿뉘엿 지나가고 한참이 되어서야 리시타의 눈동자가 세상에 드러난다. 그의 안색이 썩 좋지 않은 것이 밤새 악몽에라도 시달린 듯하다. 한동안 그는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킨다. 창 밖에서 기울어져 가는 태양을 보며 리시타는 황급히 나갈 채비를 시작한다. 카이가 어제저녁을 먹으며 무심하게 던진 말에 의하면 오늘 저녁에 아율른의 뱀파이어를 처리한다고 했다. 그는 플레이트를 몸에 얹어 놓는 듯 착용하며 창 밖으로 용병 단 사무실의 소리를 듣는다. 떠들썩한 말소리와 쇠끼리 부닥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곧 출정할 모양이다. 리시타의 손이 바빠진다. 용병 단원들이 건물에서 쏟아져 나온다. 아이단이 이끌며 나오는 이들의 틈으로 리시타가 겨우 끼어든다. 늦었죠? 리시타가 투구를 옆구리에 낀 채 아이단에게 고개를 숙인다. 아이단은 애초부터 리시타를 쉬게 해 줄 생각이었던 듯하지만, 리시타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있는 아이단보다 더 앞서나가 버린다. 아이단은 미소를 지으며 나쁘지 않은 한숨을 폭 뱉는다.
“그렇다면 리시타, 전방에서 활약해 주게.”
“네!”
그리 멀지 않은 아율른. 이곳저곳이 언제나 불타고 있는 뱀파이어의 마을에 낯선 발걸음 소리가 퍼진다. 그와 함께 뼈만 남은 뱀파이어들의 시선이 그들을 향한다. 자신들과 다른 존재를 인식하자 날카로운 손뼈를 가진 뱀파이어가 그들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뼈의 이음이 조각나며 바닥에 너부러지고, 곧 사라진다. 누구의 것보다 재빠르게 허공을 가르는 검은 리시타의 검이지만, 그의 검에는 피 한 방울도 묻지 않는다. 리시타는 자신이 베어내는 존재가 단단한 뼈뿐이라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느낀다. 피비린내는 더 이상 싫었다. 달려드는 적들을 최전방에서 모두 막아내는 리시타 덕분에 진격은 예상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어느 한 명의 희생도 없이 넓은 공터에 다다랐을 때, 그들의 눈앞에는 기괴한 움직임의 존재가 있었다.
‘그것’은 물론 성치는 않았지만 다른 뱀파이어와는 달리 피부가 날아가지 않은 상태였다. 이성이나 혼 같은 게 남아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흰자위뿐인 두 눈. 거뭇한 피딱지가 얹혀 있는 이상한 뼈. ‘그것’의 손등 피부를 뚫고 자라난 그 검 같은 뼈는 길이가 한 자는 되어 보였다. 용병 단원들뿐 아니라 리시타와 아이단조차도 그 존재의 위압감에 억눌리고 있었다.
“저게, 저게 뭐야?”
“블러드 로드……?”
리시타의 뒤쪽 어딘가에서 경악에 찬, 두려움이 가득 서린 목소리가 적막에 떨어진다. ‘그것’의 시선이 살의를 띄며 용병 단을 향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서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리시타에게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것’이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지더니 아주 짧은 순간 사이 리시타의 앞에 나타난다. 그와 동시에 달빛을 받은 날카로운 뼈가 리시타를 겨눈다. 검과 검이 맞닿은 듯한 소리가 아율른에 퍼진다. 목이 날아갈 뻔한 리시타는 그것의 뼈를 검으로 막아내면서도 그것이 자신을 노려서 다행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다. 숨을 내쉴 겨를도 없이 눈앞의 ‘그것’이 다시 사라진다. 리시타는 잔뜩 감각을 곤두세우며, 검을 쥔 두 손에 힘을 넣는다. ‘그것’이 다시 리시타의 머리 위에서 나타난다. 머리를 두 쪽 낼 기세로 리시타를 향해 내리쳐진 뼈가 다시금 막힌다. 리시타의 곧게 선 다리가 발밑의 연한 흙에 파고든다. 두 번의 공격이 모두 막힌 ‘그것’이 순식간에 뒤로 물러서 찢어지는 듯한 울음을 토하자, 아무것도 없던 공터에 검은 연기가 피어나며 뱀파이어들이 소환된다.
“저 녀석은 건들지 말고 뼈다귀들만 처리해 주세요!”
리시타가 그것에게 몸을 던진다. 귀를 찢는 쇳소리와 함께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리시타에게 달려든다. 그는 제 앞의 그것을 힘껏 쳐 내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며 검을 휘두른다. 리시타의 옆구리를 노리던 뱀파이어 넷이 그 자리에서 부서져 버린다. 곧이어 리시타의 목을 노리는 뼈를 허리 숙여 피하고 블러드 로드의 핏기 없는 피부를 그대로 올려 벤다. 로드의 몸이 재빠르게 빠져나가지만, 피조차 나지 않은 그곳에는 확실히 베인 피부가 틈을 만든 채로 너덜너덜하다. 리시타의 옅은 미소가 번진 지 채 몇 초가 지나기도 전에 블러드 로드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죽은 듯 몸을 축 늘어뜨렸던 그것이 몸을 웅크리더니 팔과 다리를 펴고 고개를 뒤로 젖힌다. 리시타는 갑작스레 제 위에서 뜨거움이 느껴져 반사적으로 몸을 로드에게서 떨어뜨린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불길이 떨어져 땅이 우글거리며 녹아 버린다. 무작위로 떨어지는 불길은 같은 뱀파이어조차도 녹여 버리며 그것의 힘을 보인다. 다시 로드의 발이 땅에 닿자 또다시 뱀파이어들이 나타난다.
“젠장.”
리시타의 어금니가 맞물리며 그의 다리가 다시 움직인다. 막 땅에 닿은 그것을 향해 달려드는 리시타의 두 검이 화려하게 허공을 가른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그의 검이 로드를 구석까지 밀어붙인다. 달려드는 뱀파이어들은 어느 새 정신을 차린 용병 단이 맡아 주고 있어 그는 로드만을 온전히 노리며 체력을 아끼지 않고 두 손을 휘두른다. 하지만 리시타는 이내 검은 로브의 뱀파이어가 자신의 오른쪽에서 달려오고 있음을 문득 느낀다. 아직 어설프기 짝이 없는 용병이 놓쳐 버린 뱀파이어. 그것은 오른팔에 손 대신 박혀 있는 송곳 같은 칼을 세운 채 리시타의 배를 뚫을 듯 달려들어 금세 거리를 좁힌다. 블러드 로드가 리시타의 두 검을 찍어 누른다. 로드의 힘을 버티기에도 버거운 리시타는 달려드는 뱀파이어와의 거리를 느끼며 이를 악문다. 그의 손이 약간의 두려움에 떨린다.
휙. 두 발의 화살이 리시타의 방향으로 달려든다. 그와 함께 리시타를 노리던 칼날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를 짓눌러 뭉갤 듯하던 우악스러운 힘도 그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로드가 비명을 지르며 제 손목을 부여잡는다. 리시타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시선 끝에서, 카이는 활을 내리지 않은 채 등 뒤의 화살 통에서 살을 꺼내어 건다. 카이의, 날이 선 시선이 리시타 너머의 로드에 닿는다. 다시 바람이 갈리는 소리가 생겨난다. 하지만 살이 꿰뚫리는 소리가 나야 했을 곳에는 잘 갈린 화살촉이 단단한 것에 부딪히는 소리와 검은 연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리시타가 다시 고개를 돌린다. 블러드 로드의 형체가 없다. 그의 눈이 다시 카이를 향한다. 카이는 발밑의 땅 깊이 핀을 박아넣고, 발을 옮긴다. 빠르게 자리를 옮기는 카이의 눈앞에 흉측한 얼굴이 돌연 나타난다. 카이의 몸이 바닥에 붙으며 단단한 와이어가 그의 몸을 핀 쪽으로 당긴다. 땅을 미끄러지며 그의 손이 순식간에 활의 형태를 바꾼다. 장궁이 단궁이 되어 빠르게 살을 뱉는다. 화살을 갈라 버리던 로드의 뼈가 한 발의 화살을 허용하고 그것의 허연 눈 하나가 붉게 물든다. 아율른의 쾌쾌한 공기를 찢는 포효가 퍼진다. 화살에 터져 버린 연약한 살덩이를 부여잡은 채 블러드 로드가 비틀거린다. 그 사이 어느 새 다시 몸집이 커진, 카이의 활은 이미 살을 매고 있었다. 곧 블러드로드의 심장이 꿰뚫린다. 로드의 몸을 지나 그 뒤의 벽에 박힌 촉은 원래의 은빛 위에 검붉은 옷을 입고 있다. 로드가 쓰러진다. 그것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힌 이후로도 몇 차례 더 소환되던 뱀파이어들을 마저 처리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이를 바라보는 리시타의 눈빛이 전과는 조금 다르다. 그는 강하다. 굳이 리시타가 그를 지켜 줄 필요가 없을 만큼. 리시타는 그것에 기뻐한다. 그의 범주에 들어온 이가 죽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그에게 기쁨을 준다. 질투나 시기 따위의 감정은─애초에 그런 것을 잘 느끼지도 않는 그였지만─ ‘동경’에 쉽사리 파묻혀 버린다. 리시타는 카이가 자신보다 강하고 또 경험도 많음을 그 길지 않던 전투에서 온몸으로 느꼈다. 콜헨으로의 걸음에서 그는 문득 자신이 활을 잡았더라면 그처럼 강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이내 상념을 털어 버린다. 아무래도 그는 활보다는 두 손의 검이 더 좋았다. 활을 들고 후방에서 전사들을 엄호하는 자신을 떠올려 보며 그는 그 모습이 너무 어색한 것 같아 핏 웃어 버린다. 그래도 카이의 경험과 힘에 그는 끌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 한편에 카이보다 강해지고 싶은, 뒤틀리지 않은 마음이 싹튼다.
아이단은 해산하기 전 리시타와 카이의 활약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카이는 ‘뱀파이어 헌터’라는 별명을 얻으며 한껏 띄워졌다. 본인은 썩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카이는 자신을 향한 관심이 흐트러질 때쯤 용병 단 사무실을 나선다. 그의 뒷모습을 리시타의 시선이 따르다가 이내 문에 가로막힌다. 다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섞여드는 리시타를 뒤로 카이는 여관을 지나쳐 망치 소리의 진원지로 향한다. 넓은 어깨에 근육이 다부지게 붙은 거구의 남성이 망치를 내려치다가 카이를 보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인사한다. 카이는 그에게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장간을 둘러본다.
“아네스트를 찾는 거요? 저쪽 창고에 있으니 들어가 보시오.”
카이가 다시 퍼거스에게 고개를 숙이곤 발을 더 깊은 곳으로 옮긴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가까워지는 용광로가 카이의 몸을 녹일 듯 뿜어내는 열기에 그의 두 눈썹이 조금 거리를 좁힌다. 카이의 발이 멈춘 곳에는 굵은 웨이브의 고동빛 머리칼이 찰랑거린다. 가슴골을 훤히 드러낸 여자는 카이를 발견하고 손에 쥐고 있던 붉은색의 광석을 내려놓는다. 카이는 입을 굳게 닫은 채 그녀에게 크지 않은 주머니를 건넨다. 기대에 찬 얼굴로 주머니를 열어 보던 아네스트가 조금 실망한 듯 운을 뗀다.
“조금 모자란걸? 내가 의뢰한 건 분명 10개였던 것 같은데.”
“나머지는 내일 마저 주겠습니다.”
흐응. 아네스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그에게 불만족스럽게 향하다가 그의 눈을 바라본다.
“알겠어요. 이제까지 잘해 왔으니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죠? 대신 두세 개 정도 더 구해 줘요. 그 귀족이 자기 검에 장식한다며 더 부탁했거든. 보수는 그 후에 줄게요.”
카이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대장간의 열기에서 벗어나기 전 그는 조금 상해 버린 활을 퍼거스에게 맡기며 화살 몇 통을 부탁한다. 퍼거스는 흔쾌히 수락하며 활을 받아든다. 카이가 고개를 숙이고 비로소 뜨거운 공간에서 빠져나온다. 카이의 이마에 축축하게 땀 방울이 흘러내린다. 그는 자신의 몸이 조금 무거워진 듯한 느낌을 안고 여관으로 들어선다. 티이가 언제나 그랬듯 웃음으로 그를 맞는다.
“오셨어요? 식사를 준비해 놨으니 식기 전에 얼른 드세요.”
카이의 시선이 식탁으로 향한다. 김이 나는 두 접시의 버섯 스튜와 얼음 딸기주 한 병이 놓여 있다. 그중 접시 하나를 잡고 있던 이는 리시타. 카이는 누군가와의 합석이 썩 달갑지가 않았지만, 몸을 그곳으로 옮긴다. 애써 준비한 음식을 마다할 만큼 그가 매몰차고 무례하지는 않았다. 제 앞에 선 장신의 남자를 리시타가 올려본다. 그리고 웃는다.
“어디 있었어요? 다들 카이 칭찬하기 바빴는데.”
카이는 그의 말에 그저 대충 맞춰 줄 요량으로 적당히 미소를 지어 준다. 이렇다 할 대답조차 없는 카이에게 리시타는 열심히 제 말을 뱉는다. 제가 로체스트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들어왔다고 아이단에게 들었다느니, 티이의 요리는 언제나 맛있다느니, 아이단은 정말 자상하다느니, 언젠가 퍼거스가 무기를 수리하려다가 박살 낸 적이 있으니 조심하라느니 하는 자질구레한 얘기. 카이는 귀찮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어느 새 카이가 잔에 채워 놓은 딸기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식사를 마쳐 간다. 그보다 먼저 식사를 끝낸 리시타 역시 제 컵 가득 차 있는 딸기주를 한 번에 목으로 쏟아 넣는다. 아직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카이를 빤히 보다가 리시타가 사뭇 진지하게, 하지만 만면에 옅은 미소를 퍼뜨린 채 입을 연다.
“아까 아율른에서는 고마웠어요.”
“…….”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사실 카이가 그렇게 강할 줄은 몰랐어요. 경험이 많을 거란 건 어느 정도 느꼈지만.”
접시를 마저 비운 카이는 리시타의 말에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다시 입을 다문다. 리시타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이내 다시 입술을 뗀다.
“카단 님 이후로 멋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사람은 처음이에요. 부럽네요.”
“…….”
“아, 맞다. 내일부터 며칠간은 전투가 없을 거래요.”
푹 쉬어 둬요. 리시타는 먼저 일어서서 그 환한 웃음을 남기고 계단을 오른다. 카이는 식탁 위를 대충 정리해 놓고 ‘정리하실 필요 없는데…….’하며 고마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티이의 인사를 받으며 계단을 오른다. 자신보다 한 층 더 올라가는 리시타의 발에 잠시 시선을 던지다가 이내 몸을 틀어 2층 복도 끝으로 걷는다. 가장 끝에 자리 잡은 방의 문이 열리고, 닫히고, 잠긴다. 카이의 몸이 침대에 떨어진다. 그의 비어 있는 벽안이 감긴다. 조금 전 제 앞에 있던 청년의 말을 되뇐다. 내가 강하다고? 카이는 터져 나오는 실소를 막지 않는다. 그는 온 마음으로 자신을 향한 리시타의 동경과 부러움을 부정한다. 나는, 강하지 않다. 오히려 한없이 약하다. 카이의 어금니가 씹힌다. 그의 주먹도 악물린다.
침대와 그 옆의 서랍장, 의자 하나가 전부인 허전한 방에서 리시타는 낡은 의자에 앉아 삐걱대는 소리를 내고 있다.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인 두 개의 검을 하늘빛 눈에 담다가 이내 어둑한 콜헨의 야경으로 그의 눈동자가 굴려진다. 넉 달 전으로 돌아온 듯하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추웠던 것 같다. 로체스트에 있을 때가 혹한의 계절이었지. 여유롭게 웃는다. 소리 없이 다가온 바람이 리시타의 윤기나는 다갈빛 머리칼을 쓸어넘긴다. 아주 희미한 형체로, 새순의 향과 달큼한 꽃향기가 그의 코에 닿는다. 바람이 노래하는 소리를 빼면 고요함만이 있는 이 시간, 이곳에서 리시타가 기분 좋게 눈을 감는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오른다.
달그락. 고요를 부수는 부조화의 소음이 리시타의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아래층 가까이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리시타가 귀를 기울인다. 다듬어진 철광석끼리 부딪는 소리. 이 시간에 누굴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가 리시타에게서 멀어진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곧 창 밖에서 다가온다. 리시타의 눈이 창을 향한다. 질긴 가죽 위로 얇게 펴진 철광석이 덮인 중갑. 등 뒤에 걸린 가죽통과 그 안의 화살. 리시타는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사해 내는 그 인영이 카이임을 어렵지 않게 깨닫는다.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그의 손에는 바로 오늘 전투 때의 것과는 다른 활이 쥐어져 있다. 좀더 낡고 허름한. 리시타가 흐릿한 기억을 뒤적이며 카이의 활을 떠올리는 동안 카이는 선착장의 입구를 지난다. 뒤늦게 카이를 부르려던 리시타의 눈에는 다시 고요한 야경만이 들어올 뿐이다. 리시타는 굳이 그를 따라 나가지는 않는다. 그저 제자리에서, 선착장으로 향하는 문을 바라보며 젊은이의 호기심에 젖어 있는 것으로 그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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