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국 남사 본편 이후 시점입니다. 후반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 제목의 캐 순서는 별 의미 없습니다.


공백 제외 3,918자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의 틈을 벗어나자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나지막한 컨테이너만 줄줄이 늘어 놓인 곳이었고, 앞으로는 꼭 바다 같은 강이 길고 또 넓게 이어져 있었다. 거대한 강을 따라 떠가는 선박은 종종 낮고 꽉 찬 목소리로 울고는 했다. 그 묵직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강둑길은 어느 고층 건물의 옥상만큼은 아니었어도, 유키무라에겐 싫지 않은 장소 중 하나였다.

   이곳에 올 때면 그에겐 늘 볼일이 있었다. 볼일이라기보다는 사실 심심풀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이곳은 늘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었어도, 유키무라가 그 바람을 온전히 만끽했던 적은 없었다. 누구는 안타까워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곳에 올 때면 대개 그렇듯, 유키무라는 불려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길고양이처럼 이리저리 쏘다니는 그를 불러내는 사람은 카타쿠라 코쥬로, 아니면.


   “리벤지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아직 일주일도 안 됐는데.”


   하얗게 타오르는 빛이 물결 위를 일렁일렁 떠다니고 있었다. 공간이 넉넉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저 멀리 수면을 바라보고 있던 새빨간 아이는 등 뒤로 여느 때처럼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인사라고 하지는 못할 말이었지만, 말을 건네받는 쪽도 그런 것을 신경 쓰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유키무라를 향해 걸어오는 몸은 하늘과 바다를 닮은 스카잔을 걸치고 있었다. 고개만 슬쩍 돌린 유키무라의 눈에도, 조금 전까지 바라보고 있던 물빛과 같은 옷이 또렷하게 들어와 박혔다.

   얼굴을 바라본 것은 그다음, 유키무라가 강에서 완전히 몸을 돌린 후였다. 다만 유키무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에서 묘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는 없었다. 언제나 투지와 의기로 형형하게 빛나던 눈동자가 오늘은 맹하기 짝이 없던 탓이다. ‘한가하지 않은’ 그를 불러낸 얼굴이 그런 모양새임에, 유키무라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아니, 일단 나 지난번에 진 건 아니니까 ‘리벤지’는 아니야.”

   “흐응…….”

   “싸우려고 부른 것도 아니고.”

   “그럼 뭔데?”

   “그…….”


   용을 걸치고 있는 사람답지 않게 마사무네는 웬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용의 얼굴이 떠올라 있어야 할 손은 스카잔 주머니에서 나올 줄 모른 채 꼼지락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강바람이 세다 한들 오늘처럼 따뜻한 날 바람 때문에 손이 시리다는 이유는 아니지 않겠는가.

   그래 봤자 유키무라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마사무네의 사정은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상관할 생각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유키무라는 인내심이 강하지 않았다.


   “특별히 용건도 없는데 불려 다닐 만큼 한가하진 않아서. 그럼.”


   시시하다는 듯한 얼굴로 미련 없이 돌아서는 유키무라를 붙잡은 것은 마사무네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급하게 불러 세우다가 말을 더듬은 것도 같았다. 뭐가 되었든 유키무라에게는 싫증밖에는 불러일으키지 못한 소리였다. 그나마 유키무라가 잠깐이라도 멈춰 서 준 것이 마사무네에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이거.”


   주머니 안에서만 굼실거리던 손이 드디어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유키무라는 여전히 표정을 굳힌 채 다시 한번 마사무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생각대로 마사무네는 손에 뭔가를 쥔 채 팔을 뻗고 있었다. 받으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내용물을 본 유키무라는 그저 굳어 있기만 했던 표정을 구기며 마사무네의 얼굴을 올려다볼 수밖에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사무네의 손에 들린 것이 유리병에 담긴 사탕인 것이다. 빨간 사탕이 햇빛에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뭔데?”

   “사탕. 오늘 화이트데이니까…….”

   “그러니까, 이런 걸 왜?”


   건네는 사람은 선뜻 건네는 그것을, 받는 사람은 선뜻 받지 못한 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저 얼굴만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사무네는 머쓱한 손을 천천히 내리며, 한참 전부터 체온에 달궈진 병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조금 부끄러운 듯 볼을 긁다가는 또 머리를 헤집으며 겨우 입을 뗐다.

   그렇게 열린 입에서 나온 사정이란 것은 싱겁기 그지없었다. 화이트데이라기에 취미를 살려 수제 사탕을 만들다가 신나서 이 색깔 저 색깔 마구잡이로 만들어 보다 보니, 그렇게 만들어진 사탕의 양이 감당되지 않았다는 것, 친구들에게도 모두 나눠줬지만 그래도 많이 남아 버렸다는 것, 가까운 친구들 다음으로 생각났던 게 너 ― 사나다 유키무라였다는 것.


   “뭘 그렇게 우물쭈물했던 거야?”

   “아니, 그, 평소엔 싸움만 하던 애한테 사탕 같은 걸 주려니까 좀 민망해서…….”


   유키무라는 헛웃음이 나오려던 것을 겨우 참았다. 그런 그가 마사무네의 사탕을 받게 된 것은, 그저 그가 어이없어하던 중에 주먹을 내지르듯 뻗어 오는 손을 무심코 잡아 버린 탓이었다. 유키무라는 얼결에 제 손에 쥐여 버린 묵직한 유리병을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다시 손을 내었다. 도로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필요 없어.”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고 생각했으나, 마사무네는 순식간에 몸을 뒤로 내빼고 있었다.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고개까지 숙이면서.


   “아아, 부탁이야, 받아 줘! 이거 못 나눠 주면 한 달 내내 사탕을 달고 살아야 할 것 같단 말이야! 부탁이야, 응?”

   “아니…….”

   “내가 만든 거지만 맛은 있으니까!”

   “…….”


   사정 아닌 사정을 하는 마사무네의 모습에 유키무라는 재차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이번 한숨은 마사무네로서는 좋은 신호였다.


   “나 참……. 그럼 볼일은 끝난 거지.”


   주머니에도 다 들어가지 않을 듯한 사탕 병을 그대로 손에 쥔 채 유키무라는 돌아섰다. 그 앞에서 간절히 모은 두 손 아래로 푹 숙였던 머리는 유키무라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눈치라도 보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드러난 얼굴에는 한껏 웃음이 피어 있더랬다.

   그러다가 또 무엇이 생각이 났는지, 아차 싶은 얼굴로 다시 한번 외치는 것이다.


   “앗, 맞다! 저기……!”

   “하아……. 또 뭔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돌아서는 유키무라에게, 마사무네가 가볍게 달려갔다.


*


   이어폰을 끼고 있어도 막을 수 없던 소음은 문을 닫는 순간 도망이라도 친 듯, 집 안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크지 않은 볼륨으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조차 시끄러워서, 이내 유키무라는 노래를 끄기로 했다. 아무렇게나 정리된 이어폰은 늘 그렇듯 가쿠란 바지의 주머니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주머니를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물건이 아닌 것을 치워야 했다. 바지 주머니로 들어갔던 유키무라의 손에 쥐여 나온 것은 유리병이었다. 그것은 몇 시간 전 부둣가에서 받은 것이었지만, 유키무라의 것은 아니었다. 투명한 병 안에는 하야말간 빛깔의 사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꽤 가벼워진 주머니에 미약하게 홀가분함을 느끼면서도, 유키무라는 제 손에 쥐어진 것을 보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무거웠다.


   “난 이렇게 한가하지 않은데 말이야.”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걸음을 옮겨 나가던 붉은 워커는 금방 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문은 맥없이도 쉽게 타인의 침입을 허용하고 만다. 이 집의 문은 그날 이후의 언젠가부터 잠길 줄을 몰랐다.

   집 깊숙이 들어갈 것도 없이 유키무라는 볼일이 있는 사람을 마주쳤다. 아니, 상대방은 유키무라를 보지 않았으니, 유키무라가 그를 발견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은지도 모른다. 그는 소파 앞 바닥에서 한쪽 무릎을 가슴에 안은 채 무릎 위로 머리를 박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자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오랜만이에요, 나오에 아저씨.”


   3주인지 한 달인지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이 집에 찾아온 날부터 그쯤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러니까 2월 말쯤일까. 그때와 달라진 것이라고는 그가 입고 있는 옷과 몸을 둔 장소뿐인 듯했다. 지난번에는 침대였다. 대답은 없었지만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 상관없었다.


   “원래 오늘 오려던 생각은 없었지만, 부탁받은 게 있어서요. 이거.”


   단단한 목제 탁자와 유리병이 만나며 두꺼운 소리가 탁 터졌다. 제법 큰 소리였음에도 그는 미동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별달리 묵묵부답이던 사람이 물건들 부딪치는 소리에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벽과 다름없는 사람에게 해야 할 말과 전달해야 할 정보를 건네는 것도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사탕이에요. 화이트데이라면서 주라고 하더라고요.”

   “…….”

   “마사무네 군이.”


   움찔. 익숙한 이름에 목석 같은 몸이 한 차례 반응을 보이더니, 절대 들지 않을 것 같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야가 흐릿한 것인지 눈이 아픈 것인지 힘없이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탁자 위에 놓인 물건을 바라보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꼭 비틀거리는 듯한 모양새로 고개를 돌려 유키무라를 쳐다본다. 몇 달 만에 눈을 마주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다테, 마사무네라고…….”

   “네.”

   “녀석은…….”


   라디오의 잡음처럼, 찢어졌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다 갈라진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 목을 쥐어짜 한 마디씩 씹어 뱉어낸 듯했다. 남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시간만큼의 공백기가 그의 목소리에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렇게 몇 달 만에 뱉어낸 말은, 온갖 곳이 너덜너덜하게 긁혀 나간 것 같은 음색에 걸맞은, 지독한 한마디였다.


   “녀석은, 도쿠가와의 행방을, 알고 있나?”

   “……아니. 그 녀석도 몰라요.”


   희뿌옇던 눈동자는 증오만이 뚜렷하게 빛나고 있다가, 이내 흔들리다가, 곧 다시 빛을 잃는다. 그리고 그는 다시 고개를 떨궜다. 제자리걸음이었다. 한숨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심부름이 끝났으니 더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없는 것에 대한 미련만 남은 집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나락 같기만 했다.


   “그럼 가요. 현관문 정도는 잠가요.”


   붉은 워커는 들어올 때처럼 또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먼지가 쌓인 길을 따라 걸으며, 유키무라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잡음이 시끄러워 귀를 막을 것이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전하지 못한 말이 떠올라 붉은 걸음은 다시 멈춰 섰다. 유키무라가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저 짓눌려 있는 남자를 향해 유키무라는 전해 달라고 부탁받았던 말을 전달한다.


   “아. 그리고 그 녀석, 나중에 같이 밥이라도 먹으러 오래요. 전 생각 없지만요.”


   카네츠구도 생각이 없기로는 마찬가지일 테지만, 유키무라는 말해 봐야 비꼬는 것밖에 되지 않을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기로 한다. 유통기한이 다 되기 전에 저 사탕 병이 조금이라도 줄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말해 봐야 부질없는 이야기도 입 밖에 내지 않기로 한다.

   다시 현관이 굳게 닫히고, 홀로 밤인 집에서는 시곗바늘만이 조용히 달리기 시작한다. 실내로 드리운 아스라한 빛에 유리병 속 누군가의 애정만이 반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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