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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26 05:07 오탈자 수정
카네츠구는 두 눈 사이로 우뚝 솟은 콧등을 문질렀다. 머리도 눈도 지끈거렸다. 오늘은 피곤한 날이었다. 아니, 그날 이후로 줄곧 피곤한 나날이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몸의 어떻게든 몸에 피로를 누적해 놓아야 밤에 조금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지금은 해가 떨어진 시간이었고, 반겨 주는 이 하나 없는 집이었어도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때였다. 그러고 있던 참이었다.
혼자 길을 걷다 보면 종종 거리에서 그를 붙잡는 이가 나오곤 했다. 어디까지나 ‘종종’ 있는 일이었던 것을 보면, 그런 사람들에게도 카네츠구는 쉬이 말을 붙일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던 듯했다. 그러나 개중에서도 낯이 두꺼운 사람들이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무시하고 지나칠 사람이었다. 거리를 걷는 행인을 붙잡고 어쭙잖은 소리를 해 대는 도쟁이들에게 붙잡혀 줄 만큼 카네츠구는 한가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웃는 낯으로 죄송하다느니 하는 소리를 할 성격도 못 되었다. 누군가가 팔을 붙잡는다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뿌리치고 가던 길을 걸어가 버릴 인물이었다. 경멸의 눈빛을 던질지, 시선조차 주지 않고 무시의 태도를 취할지는 그날의 기분에 따른 것이었다. 오늘의 기분은 후자 쪽이었고, 그러려던 참이었다.
“그를 살리기 위해 그 사람과의 추억을 희생하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비과학적인 것은 믿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현이니 검은 갑옷이니 하는 것들을 둘러싼 일에 깊이 관여하고는 있었어도, 그것은 나름대로의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었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 납득 가능한 원리가 있는 것이었고 분명한 실체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붙잡는 저 노인의 말은 그렇지 않았다. 애들 장난만도 못한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그 말에 잠시나마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한심한 일이었다.
카네츠구에게 들린 말이기는 했어도, 카네츠구만을 향해 던진 말은 아니었다. 노인은 벌써 저만큼 걸어가서 다른 행인에게도 똑같은 말을 던지고 있었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멍청한 말에 휘둘린 자신에게 던지는 조소이기도 했다. 노인의 말을 애써 머릿속 한편으로 치워 버린 채, 카네츠구는 마저 길을 걸었다. 입 안이 썼다. 오늘은 찬장에 넣어 둔 술을 따야 할 것 같았다.
*
식탁에 앉았다. 은은하게 광택을 띤 목제 테이블 위에는 매끄러운 술병 하나와 잔이 놓여 있었다. 채 마르지 않은 물기가 머리카락 끄트머리에서 뚝뚝 떨어져 술병 그 주변을 적시고 있었다. 방울져 떨어지는 수적 앞에는 투명한 유리 케이스에 담겨 있는 손목시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언제나 탁자 위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물건이었다. 검은 가죽 스트랩에는 자잘하게 생채기가 있었고, 시계의 얼굴에는 기다랗게 금이 가 있었으며, 시곗바늘은 늘 4시 3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TV조차 켜지지 않은 집 안에는 적막만 감돌았다. 세상 밖의 누군가가 공간의 소리를 지워 버린 듯했다. 소리없이 잔이 채워졌다. 투명한 액체 안으로 하얀 술잔의 빛깔이 비치고 있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우에스기 씨.”
늘 돌아오던 대답은 언제부터인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카네츠구는 그가 대답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기다려 주었다. 두어 박자를 쉰 후에, 잔의 내용물을 한 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오늘의 술은 유달리 쓴 맛이 강했다. 혀를 달래 줄 안주 같은 것은 없었다. 어차피 술잔을 오래 붙잡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문득 거리에서 들었던 노인의 말이 생각났다. 추억을 희생하라고 한다면……. 카네츠구는 또 한 번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마땅한 근거가 없는 것은 믿지 않았다. 종교 따위에 눈을 돌려 본 일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실체가 없는 것은 믿지 않는다. 인과 관계를 증명할 수 없는 것도 믿지 않는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논리와 이성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었던 것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지금에 와서 허무맹랑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만 것 역시 그 한 사람 때문이었다.
카네츠구는 재차 술잔에 입을 대며 머릿속을 더듬어 보았다. 과연 추억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리 남아 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와는 상사와 부하의 관계였으며, 첫 만남조차 회사를 통한 것이었다. 그의 직속 부하였기에 언제나 함께 다녔으나, 그 시간의 대부분은 업무를 수행하는 데 썼다.
매일 밤 함께 술을 마셨었다. 그 사람에게 취미란 오로지 술뿐이었고 자신은 취미라 할 만한 것이 없었으니, 회사 밖에서 만남은 퇴근 후의 술자리를 제외하고는 전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조차도 대화다운 대화는 거의 없었다. 떠올려 보면, 추억보다는 기억에 가까운 것들뿐이었다.
세 번째 잔을 채우고 나자 술병은 벌써 반이나 비어 있었다. 그러나 추억과 기억을 가르는 것은 그 내용이 아닐 것이다. 물밀듯 머릿속을 채우고 넘쳐흐르는 장면들을, 카네츠구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 정도로 정의할 수 없었다. 추억은, 머리를 적시다 못해 이내 목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머리카락에서 툭툭 떨어져 어깨를 적시고 있는 이 물방울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온몸에 스미고 마는 것이었다. 가슴은 저렸으나, 세 모금째의 술은 달았다.
케이스에 고이 잠들어 있는 시계로 손을 뻗었다. 언제나 그 사람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것이었다. 오랫동안 사용해 온 시계는 시간이 어긋나곤 했기에 늘 한 번씩 시간을 다시 맞춰 주어야만 했던 물건이었다.
‘시계, 굳이 안 차셔도 상관없지 않아요?’
언젠가, 누군가가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어차피 묻지 않아도 늘 필요한 순간에 그에게 시간을 확인시켜 주곤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라는 이유가 덧붙었던 것 같다. 우에스기는 그에게 대답을 내놓지는 않은 채 손을 젓고 지나쳤으나, 그 말에는 카네츠구도 어느 정도 동의했더랬다. 본사로 향하기 위해 건물을 나설 때였고, 차에 올라서는 카네츠구도 그에 말을 보탰던 기억이 있었다.
‘손목이 허전하신 거라면 새것으로 사시면 되지 않습니까?’
‘신경 쓰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요즘 시계를 만지시는 때가 많지 않습니까.’
카네츠구의 말대로 그는 차에 올라서자마자 손목의 시계를 풀고 있던 참이었다. 우에스기는 은근한 미소를 띠며 시계의 다이얼을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카네츠구의 무릎 위로 펼쳐져 있는 노트북의 시간과 비교해 보니, 또 시계는 1분가량이 느려져 있었다. 톱니 모양으로 튀어나와 있는 크라운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우에스기는 대답했었다.
‘손이 심심할 때 할 거리로는 적당하잖아.’
그런 이유로 우에스기의 몸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손목시계는, 그의 죽음이 은폐되고 회사가 무너지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질 수 없었던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흔적이었다. 이제는 다시 시간을 맞춰 줄 이도 없이 언제까지고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는 언제나 저의 주인을 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인 없이 고장 나 버린 물건은 카네츠구의 분신이었다.
마지막 잔을 털어 넣고 카네츠구는 몸을 일으켰다. 독한 술을 금세 비웠음에도 취기 하나 없이 멀쩡한 것을 좋다고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덕분에 침대까지 비틀거리지 않고 갈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침대에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구름을 덮은 달은 외로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의 어둠에 발악하듯 도시를 비추던 빛의 무리들도, 끊이질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그리고 시트 위를 바르작거리던 몸짓도 조금씩 사그라들어 간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시간은 오후 4시 38분이었다.
‘그를 살리기 위해 그 사람과의 추억을 희생하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을 방해하러 온 불청객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고민할 가치도, 대답할 가치도 없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대답해 주기로 한다. 그 모든 아름다운 시간들을 잃은 채, 나에게 남은 것이 추억의 잔여물과 당신이 떠나던 날의 결과뿐이라고 해도……. 나 하나의 시간이 영원히 이 지옥 속에 멈추어 있을지라도, 그것이 당신을 위한 일이라면, 저 시계의 초침을 다시 움직이게 할 수 있다면, 언제나 그랬듯 무엇이든 기꺼이 바칠 수 있다고. 나의 시간은 늘 당신을 위한 것이었다. 언제까지고 당신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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