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 제외 2,004자




   날이 딱 알맞게 좋았다. 요 며칠은 곧 여름이 된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꽤 더웠기에, 이렇게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낮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소동―이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꽤 큰 사건이었지만―이 모두 끝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늘 사건 사고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인 만큼 얼마나 지속될지는 몰라도, 어쨌든 지금의 이 평화로움을 코하쿠와 츠쿠모는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바로 어제까지 이어졌던 더운 날씨에도 이토칸이나 바 오다케 같은 곳을 돌아다녔건만, 외출하기에 딱 알맞은 날이었음에도 오늘은 왠지 코하쿠도 츠쿠모도 영 밖에 나가고 싶지가 않았다. 대신 츠쿠모는 따스한 햇볕에 몸이 조금 나른해져서는 낮잠을 자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잤다가는 분명 밤에 잠이 오지 않으리라.


   “커피라도 타 줄까?”

   “맥주가 좋은데.”

   “어제 다 마시고 없어.”


   젠장. 따뜻한 걸 먹느니 차라리 차가운 맥주를 먹는 편이 더 잠이 달아날 것 같았다. 없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코하쿠는 다시 앉지 않고 구태여 주방으로 가 냉장고와 찬장을 열어 보고 있었다. 없으면 굳이 찾아볼 필요 없는데. 츠쿠모의 중얼거림을 코하쿠도 듣긴 했으나 그냥 넘겨 버릴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성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츠쿠모도 더 말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곧 커피포트 안에서 물이 끓기 시작했고, 티스푼이 컵에 부딪히는 소리가 몇 번 들려왔다. 코하쿠가 다시 츠쿠모의 옆으로 돌아오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새콤한 향이 올라오는 컵이 하나 들려 있었다.


   “뭐야?”

   “아이스티.”

   “그건 또 언제 사 놨데.”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어쨌거나 땡큐, 하는 인사는 잊지 않았다. 그 사이에 얼음까지 띄워 놓은 아이스티를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새콤달콤한 맛은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오랜만에 마셔 보니 나쁘지만도 않았다. 입안 가득 차는 얼음을 우득우득 씹어 먹었다. 그거 이빨 상한다. 코하쿠의 잔소리에 츠쿠모는 아직 그럴 걱정 할 나이는 아니라며 입에 있는 얼음을 마저 씹어 삼켰다.

   평일의 한낮은 조용했다. TV도 켜지 않은 집안의 조용함은 어색한 공기를 부르기에 딱 좋았지만 츠쿠모도 코하쿠도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항상 온갖 소음이나 말소리로 떠들썩한 곳에서만 지내 왔던 만큼 ―물론 코하쿠도 츠쿠모도 숨 막히는 침묵을 견뎌야 했던 1년이 있었지만―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썩 괜찮은 일이었다. 괜찮은 일이긴 했으나,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 시간이 어색하긴 했다.


   “코하쿠 씨.”

   “응?”

   “이거 꿈인가?”


   바닥에 앉아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히 천장을 보고 있던 코하쿠가 츠쿠모를 쳐다봤다. 소파 맞은편의 벽지만 빤히 바라보던 츠쿠모도 천천히 시선을 옮겨 코하쿠를 마주 봤다.


   “꿈이면 빨리 깼으면 좋겠네.”

   “……?”

   “자는 동안 당신 또 어디 가 버리면 따라가기 귀찮잖아.”


   츠쿠모는 피식 웃으며 아이스티를 또 한 모금 마셨다. 농담처럼 던진 말들이 제법 뼈아팠다. 코하쿠는 바닥에 잠시 컵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한 개비를 입에 물고, 팔을 들어 츠쿠모에게도 권했다. 츠쿠모의 담배가 다 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권해 오는 것을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같은 종류였기에 맛도 다르지 않았다. 코하쿠가 츠쿠모의 담배 끝에 불을 붙여 주자, 달달한 음료의 맛에 물들어 있던 입안으로 텁텁한 담배 연기가 들어찼다. 목구멍과 폐를 적시는 매캐함이 달콤한 아이스티의 맛보다 더 현실 같았다.


   “꿈일 리가 없잖아.”


   제 담배에 불을 댄 후 연기를 내쉬며 코하쿠가 뱉은 말이었다. 소파 위에 앉은 츠쿠모에게는 코하쿠의 얼굴이 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무겐과 얽혀 있는 사람들에게만큼은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무척이나 쉽게 느껴 버리는 남자가 됐으니, 알다 마다였다. 어쩌다 이렇게 겁쟁이가 되었는지. 예전의 그 무서울 것 없던 츠쿠모가 지금의 코하쿠를 본다면 틀림없이 한심하다고 느꼈을 테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의 츠쿠모는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이든 따라가기로 했으니.

   설핏 웃으며 츠쿠모도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았다. 입에 물려 있던 담배를 한 차례 깊게 빨아들인 후 두 손가락 사이에 옮겨 놓은 츠쿠모는 담배를 쥐지 않은 손으로 코하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저를 부르는 손짓에 코하쿠의 고개가 뒤로 돌았다. 가볍게 물고 있던 담배를 순식간에 뺏겨 버린 입술 위로 츠쿠모의 입이 닿았다. 적잖게 놀란 탓에 반사적으로 뒤로 빠지려는 코하쿠의 몸을 츠쿠모가 요령 좋게 막으며 갑작스러운 입맞춤을 키스로 이어갔다. 아이스티의 달짝지근함과 담배의 씁쓸함이 섞인 오묘한 맛의 키스였다. 코하쿠에게도 츠쿠모에게도 썩 편한 자세는 아니었기에 오랫동안 진득하게 이어지진 못했어도 이런 스킨십에 절대적인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떨어지는 것이 아쉬운 듯 채 다물리지 않는 두툼한 입술 사이로 다시 담배가 물렸다. 츠쿠모도 다시 담배를 물었다.


   “꿈 아닌 거 맞네.”


   소파의 등받이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몸을 기댄 츠쿠모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코하쿠도 가만히 그 얼굴을 보다가 마주 웃었다. 근데 그게 내 담배인 것 같은데. 허? 그런가? 근데 상관없잖아, 누구 거든. 아무리 봐도 그게 더 길잖아. 쪼잔하네. 고요하던 집에 웃음 섞인 말소리가 이어졌다. 종종 투닥이는 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걱정할 만한 정도는 못 될 것이다. 조금씩, 그렇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조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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