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직접적인 묘사는 없어 공개 글로 올리기는 했으나, 성적 함의가 있는 서술이 많습니다.

2. 카케루가 제대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3. 본편의 중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백 제외 1,601자




   점등과 소등이 밤과 낮의 길이를 결정했던 시간에서 벗어났다. 셸터의 밖은 사람의 손길이 없어도 밤낮이 뒤바뀌는 곳이었다. 사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약으로 수면 시간이 조정되었던 1년을 겪고 나니 오히려 밤이 밤 같지가 않았다. 몸이 좀처럼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핑계였다.

   1년이라고 말은 했으나,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정신없이 대피했던 첫날과 셸터를 나오기 전까지의 불과 몇 시간 정도―그것도 잠깐 눈을 붙였던 시간을 빼면 얼마 되지도 않았다.―가 전부였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낯선 장소였으나, 그런 곳이 남겨 준 것도 있었다. 아무래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던 관계였다. 다만,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은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며 웃었던 날이었다. 사고 이후로 눈이 쌓여 있는 세상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만의 것이었기에 발을 붙일 수도, 웃으며 바라볼 수도 없었으나, 그날만큼은 이런 자신도 그 풍경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몇 번인가 눈을 던져 보기도 했더랬다. 오른쪽 다리는 바지 끝단까지 축축하게 젖었어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자신보다도 훨씬 나이가 있는 사람들이 눈을 던지며 뛰노는 것을 보는 건 즐거웠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살던 아파트는 무너지고 없었기에 한바탕의 눈 난리 후로는 다시 셸터로 돌아와야 했으나, 모두 웃고 있었다. 자신도 웃음을 머금고 있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오랜만의 운동이 피곤했던지 금세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거실―그 공간을 거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에 남은 것은 카케루뿐이었다. 무어라 대화를 나누었던 것만은 확실하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1년 동안 복용했다는 그 약 기운이 남아 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날은 카케루와 한방에서 잤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날 밤의 기억 때문에 머릿속에서 밀려난 것인지도 모른다.

   30을 바라보는 나이인 데다 누가 봐도 어둡기 짝이 없는 성격인 만큼 혈기 따위는 한참 전에 다 사라지고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럼에도 아직 자신에게도 그런 것이 남아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있다고 해도 차라리 그대로 썩혔다면 모를 일이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충동에 휩싸여 움직였던 그날 이후로 며칠이 지나도 몸에 붙은 불이 사그라들지를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이 꼴이었다. 셸터 안에는 시계도 창문도 없으니 지금이 몇 시쯤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한참 전부터 자고 있어야 하는 시간은 분명함에도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숨이 뜨거웠다.


   “카케…….”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간신히 멈추었다. 그러나 그렇게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이 무색하게도, 눈앞에는 그날의 기억과 감각과 감정이 부질없이도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 리 없는 실내인데도, 귓바퀴에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숨이 스친 듯한 착각이 일었다.


   “윽…!”


   침대에서 튕겨 나가듯 몸이 일어섰다. 이대로 몇 날 며칠을 밤마다 앓느니 차라리 부족하더라도 조금은 해소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저만치 놓여 있는 갑 티슈를 집어 침대 위에 던지듯 올려두고, 굳게 닫혀 있는 바지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날도 이렇게 스스로 몸을 드러냈으나, 그때는 서늘한 공기로부터 온기를 지켜 줄 체온이 있었다. 그것이 지금 없다는 것은 역시 아쉬운 일이었다.

   침대 위로 비스듬히 몸을 눕히고, 불편하게 구부러진 발목이 펴지도록 오른쪽 다리의 위치를 적당히 조절했다. 침대 아래로 떨구어지듯 놓인 오른발을 두고, 왼쪽 다리는 침대 위로 접어 올렸다. 퍽 오래간만에 이런 행위를 하려니 어떻게 움직여도 몸이며 자세가 어색하고 불편해서, 몇 번이고 뒤척거린 끝에야 몸이 겨우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뭉그적거리는 사이에도 안달이 난 몸은 기억 속의 온갖 것을 끄집어올려 저를 위로할 손길을 재촉해 대었다. 눈을 감자 익숙한―그러나 제대로 마주한 적은 몇 번 없는―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뚝과 등 위로 몸을 끌어안는 체온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귓가를 맴도는 목소리는 후덥지근한 숨이 넘칠 듯 섞여 말의 마디마디를 뭉개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한마디만큼은 선명히 들렸다.


   ‘형…….’


   그 목소리에 이끌려, 언제나 다리를 잡아끌던 손이 허벅지 위를 떠난다. 저를 찾는 부름에 대답하는 숨결이 혼자뿐인 침대 위로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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