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특촬

[키바][와타이] 장미 한 다발의 온기

Snailer 2019. 1. 29.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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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가는 오늘도 잿빛 정장 차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언제나 타이가의 곁에서 그를 보좌하던 이가 있었으나, 일련의 사건을 겪고 난 후부터 타이가는 모든 업무를 스스로 처리하기로 했다. 대기업의 사장이란 이래저래 공식적인 만남이 많은 자리였다. 타이가가 더 이상 청바지나 자켓 따위를 걸치고 다닐 수 없는 이유였다.

   D&P사의 건물은 아무리 사람이 오가도 차가운 분위기가 가시지 않는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사장실은 더욱 그랬다. ‘사장 노보리 타이가’라는 직위와 이름이 또박또박 새겨져 있는 명패와 하얀 데스크, 검은 가죽 의자, 그리고 한 번도 쓰인 적이 없으나 언제나 검게 광택이 도는 손님용 소파와 그 앞의 테이블. 그 외에 물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공간은 차갑다 못해 썰렁할 지경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별난 날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부하에게 서류를 전달 받을 때 외에는 항상 타이가 혼자뿐인 곳에 외부인이 찾아왔다. 그 한 명만으로, 무채색의 공간이 난색으로 물드는 듯했다. 타이가의 얼굴에도 색이 돌아왔다.


   “와타루, 이건……?”

   “어…… 그러니까…….”


   타이가를 향해 쭉 뻗은 팔의 끝에는 장미가 만개해 있었다. 얇은 비닐 포장에 싸여 있는 색색의 꽃송이는 배경과는 영 동떨어진 물건이었다. 타이가에게 있어서도 그랬다.


   “일단 받겠지만, 갑자기 왜?”

   “그, 오늘 형의 생일이라고, 어머니가…….”

   “생일?”


   타이가의 시선이 잠시 떨어졌다. 달력이나 스케줄표 따위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모든 일정은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다. 그 가운데 오늘의 날짜를 떠올렸다. 타이가는 새해가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아니, 몇 년 만에야 달력에 자신의 생일을 적어 넣었다. 팡가이아의 사회에 들어선 후로는 축하하기는커녕 잊어버리고 지나쳤던 때가 더 많은 날이었다.


   “케이크를 사 올까 했는데, 생각해 보니 형은 음식 같은 건 안 먹으니까……. 그, 더 좋은 선물을 사고 싶었는데, 그게, 오늘 갑자기 알게 돼서, 그…….”

   “와타루.”


   좀처럼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리저리 배회하던 눈동자가 멈춰 섰다. 그 시선 끝에서는,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와타루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가죽의 감촉은 뻣뻣하고 차가웠으나, 체온에 녹아 금세 따뜻해지는 듯했다. 바닥을 향해 조금 기울어져 있는 얼굴에서 커다란 눈동자만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타이가의 눈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상냥한 미소가 와타루를 반기고 있었다.

   흐드러진 꽃다발이 와타루의 손을 벗어났다. 제 손 위에 묶여 있는 꽃송이 하나하나를 매만지듯 타이가의 눈은 그 위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입술과 눈꼬리는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으나, 그 얼굴이 한편으로는 처연해 보이기도 했기에, 와타루는 좀처럼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형……?”

   “와타루 네가 처음일까.”

   “어?”

   “준 적은 있었어도, 받아본 적은 없었거든, 꽃다발.”

   “그럼…….”

   “기뻐. 무척이나.”


   기분 좋게 울리는 목소리에 와타루의 표정이 밝아졌다. 크게 내쉬는 숨에는 안도감에 풀어진 긴장이 섞여 있었다. 타이가 자신에 대한 것은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탓에 멋대로 고른 선물이었으나, 적어도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 정도만도 성공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생일 축하해, 형.”

   “고마워, 와타루.”


   꽃병을 놔야 할까. 기분 좋게 중얼거리는 타이가를 보며, 와타루는 침을 삼켰다. 한 가지 더,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가, 꼭 전하고 싶었던 말이 남아 있었다. 잠시나마 멎었던 떨림이 다시 시작됐다. 두근거리는 심박이 온몸을 쿵쿵 때리는 듯했다. 잠시 돌아선 타이가의 뒤에서 와타루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조용한 한숨과 함께 열렸다. 고동 소리는 여전히 머릿속까지 울리고 있었다.


   “와타루.”


   그러나 꽃향내의 위로 얹어진 목소리는 와타루의 것이 아니었다. 그를 등지고 창을 바라보던 타이가가 툭 던진 한마디에, 얼이 빠진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반쯤 돌아선 타이가는 여전히 품속의 선물을 사랑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의 빛에 물든 눈동자는 언뜻 푸르스름한 광채로 반짝이고 있는 듯했으나, 색색의 장밋빛이 뒤섞인 색감은 무척이나 따스한 빛깔이기도 했다.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아니,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일까.”


   데스크 위로 조심스레 꽃다발을 내려둔 타이가는 몸을 완전히 돌려 와타루를 마주했다. 언제나 그랬듯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이라고, 와타루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분위기만은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달랐다. 그리고 왠지, 이어질 말을 알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근거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그런 확신이 들었다.


   “사실은 나도야, 형.”


   짙은 향기가 목소리를 물들였다. 꽃 한 묶음이 가져온 훈훈한 공기가 차갑던 뺨을 데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