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RO][쟈비츠바] 손을 잡은 자리에 남은 것
공백 제외 12,274자
바람이 불었다. 바람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으나, 바람결을 타고 흘러가듯 날리는 머리칼과 코트 자락이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의 존재를 보여주는 듯했다. 바람 소리조차 없는 곳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마도구도 웬일로 입을 열지 않았다. 꼭 잠에 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위화감은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마치 소리가 없는 것이 당연한 세계인 듯했다.
눈을 뜬 곳은 숲의 한가운데였다. 이곳에 드나든 일이 많지는 않았으나, 분명 본 기억이 있는 풍경이었다. 칸타이의 어느 숲, 허락받은 자가 아닌 한 철저하게 출입이 통제되는 곳, 나락의 숲이었다. 자신은 왜 이곳에 오게 됐던가.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 이내 바람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눈에 띄는 이현상이 없는 것을 보아 하니 나락의 숲의 깊숙한 곳인 것만은 확실했다. 이곳은 더욱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바깥의 세상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나락이었다.
그저 발이 움직이는 방향을 향해 걸었다. 걸음을 옮기면서 머릿속에 되뇌는 목적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디가 되었든, 그곳에 무언가 있으리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츠바사는 움직여야 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숲에는 시진(時辰)이 없었다. 언제나 하늘은 푸르렀으나, 태양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하늘을 장식하듯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구름도 꼭 박제라도 된 것처럼 언제나 한 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쉽게 지치는 몸도 아니니,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시간을 느낄 수 없었어도, 별달리 크게 바뀌지 않은 풍경 속을 걸으면서도, 공간의 변화는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느껴졌다. 목적지가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무엇을 만나기 위해 걷고 있었던가. 조금만 더 가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간 발걸음을 계속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더 흘렀을 테지만, 길지는 않은 시간이리라. 눈이 아프도록 푸르기만 하던 숲 가운데 색채 없는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형상 때문에 ‘마계수’라는 이름이 붙어 있기는 하나, 나무라고는 할 수 없는 마물이었다. 이곳이 그가 도달해야 할 곳임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마계수에게는 볼 일이 없다. 다른 무언가가 있을 터다.
조금 더 다가가니 마계수를 등진 채 츠바사를 바라보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얼굴도 몸도 검게 그림자가 져 보이지 않았으나, 그가 누군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쟈비?”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쟈비는 고개를 삐딱하니 기울였다. 음영에 가려진 얼굴은 분명 웃고 있으리라. 그러나, 그는 왜 이런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던 것인가. 이유 모를 초조함이 두 다리를 재촉했다. 인영과의 거리가 빠르게 줄어 갔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옷이며 이목구비가 점차 선명해져 갔다. 빛이 드리우며 드러나는 얼굴은 츠바사가 상상한 그대로였다. 츠바사가 입을 뗐다.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알아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곳에 와야만 했던 이유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츠바사를 앞질러 먼저 목소리를 낸 것은 쟈비였다.
“츠바사.”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츠바사는 잠시 말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의 얘기를 듣고 난 후여도 늦지는 않으리라. 입을 닫고, 쟈비와 재차 눈을 맞추었다. 쟈비가 곧이어 입술을 뗐다. 그러나.
‘──.’
그러나 다음 순간, 그가 기다리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귓속을 파고드는 듯한 이명 음이었다. 적막한 세계에 얹힌 소음이자, 불협화음이었다. 갑작스레 꽂혀 드는 이질적인 소리에 츠바사는 작게 신음하며 고개를 틀었다. 미간에는 깊게 주름이 파여 있었다. 세상을 모두 묻어 버리는 이명 소리는 쟈비의 목소리조차도 쉬이 덮어 버렸다. 쟈비의 입술은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에게 무언가 말을 던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들리지 않았다. 그 목소리를 듣기에는 귀울림이 너무 시끄러웠다.
쟈비의 입이 닫혔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그에게만 보여 주었던 미소였다. 그 얼굴을 보는 것은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듯한 기분에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의 불안을 증명이라도 하듯 쟈비는 돌아서 마계수를 바라보고, 발을 뗐다. 마계수는 돌아온 자식을 품어 주는 부모처럼 팔을 벌려 보였다. 거대한 나무 기둥의 가운데 틈이 보였다. 츠바사는 직접 본 기억이 없으나, 들은 적이 있다. 죽은 자의 영혼이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나기 전까지 머무는 곳, 마계수의 고치였다.
“―!”
분명히 자신의 목소리로 쟈비의 이름을 불렀을 터다. 그러나 그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온몸을 뒤흔드는 듯한 이 귀울음 때문이었다. 쟈비 역시 저를 부르는 소리는 듣지 못한 듯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팔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았던 이는 아무리 필사적으로 잡으려 해도 닿지 않았다. 꼭 세계로부터 차단되어 경계선 밖에 있는 존재가 된 듯했다. 이내 쟈비는 마계수의 안에 몸을 담았고, 곧이어 마계수는 문을 닫았다. 이명 소리가 거세졌다.
*
츠바사가 다음으로 눈을 뜬 곳은 익숙한 실내였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목조 건물은 힘들여 자세히 뜯어 볼 필요도 없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부모님 대, 그리고 그 전부터 줄곧 이 자리에 존재해 왔던, 야마가타나가의 집이었다. 신경 쓰일 것은 없었다. 다만, 눈앞에는 얼굴 가득 걱정의 기색을 띠고 있는 린이 있었다. 츠바사의 어깨를 붙잡고 연신 흔들고 있던 모양이었다. 츠바사가 자신의 어깨에 올라와 있는 손 위로 제 손을 포개었다.
“오빠! 괜찮아?”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밝지 않았다. 밤중에 비라도 내린 것인지 비의 냄새가 코끝을 건드렸다. 그리고 그에 섞여, 아직 햇볕에 지워지지 못한 밤의 냄새도 남아 있었다. 막 태양이 떠오르려고 하는 새벽쯤일까. 린이 이런 시간에 깨어 있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츠바사가 몸을 일으키려는 기색을 보이자, 린이 조심스레 츠바사에게서 손을 뗐다. 무엇이 그리 걱정이었는지는 몰라도, 일단은 안심한 듯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온몸이 무거웠다. 꼭 몸살이라도 앓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새벽의 공기는 쌀쌀했음에도 몸에 제법 열이 올라 있는 듯했다. 몇 년 만의 열증일까. 마계기사가 된 후로 병 같은 건 앓아 본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몇 번이고 죽음의 고비를 넘긴 몸이다. 그리고 마계기사의 몸은 이 정도 이상에 영향을 받을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그래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 호러가 인간의 사정을 봐 주지는 않는다. 수호자들의 상황이 어떻든 마수는 언제고 게이트를 넘어와 인간을 습격한다. 그러니 마계기사는, 츠바사는 언제나 강인하게 서 있어야 한다.
잠시 숨을 골랐다. 뜨거운 체열이 숨결에 섞여 새벽 공기의 안으로 녹아들었다.
“린, 무슨 일이냐.”
“그게, 오빠가 힘들어 보이니까…….”
츠바사는 늘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말이나 너는 몰라도 된다는 말로 지나가 버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입을 닫아 버리기 일쑤인 오빠였다. 어릴 적에는 그런 태도에 일일이 속상해했던 린이었으나, 이제는 그것이 자신을 위한 행동임을 아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걱정이 되었다. 또 어디선가 자신이 모르는 새에 무슨 일을 당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아무도 모를 이런 밤중에 혼자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닐까?
잠결에 들리는 신음에 놀라 달려가 보니, 오빠는 꼭 가위에 눌리고 있는 사람처럼 앓고 있었다. 누군가를 부르고 있는 듯도 했다. 온몸이 흠뻑 젖을 만큼 땀을 흘려 가며 신음하는 모습에 황급히 어깨를 흔들었다. 깨어나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렸으나, 그렇게 눈을 뜨고 난 후의 모습은 다행히도 크게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제야 린은 안심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후의 츠바사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쓸데없이 걱정을 끼치는 일은 피하고 싶었건만. 더구나 별것도 아닌 일이라면 더욱 그랬다. 불안의 원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상대가 린이라면 더욱 그랬다.
“걱정할 것 없어. 아무 일도 없으니.”
“정말로?”
“그래. 아직 시간이 이르다. 돌아가서 조금 더 자도록 해.”
“으응…….”
츠바사는 자신의 일을 말하지 않는 일은 있어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별일이 없다는 말은 사실일 테다. 린은 묻고 싶은 게 남아 있다는 표정이었으나, 돌아가기로 했다. 린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자 소리에 묻혀 있던 또 다른 소리가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이명이었다.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꿈에서도 들었던 것 같다. 그래, 꿈자리가 무척이나 안 좋았다. 고막을 찌르르 울리는, 이 쇳소리 같은 이명을 들으며, 팔을 뻗었더랬다. 그러나 누구를 향해 손을 내밀었는지, 왜 그리 간절했는지, 그곳은 어디였는지 무엇 하나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꿈이라면 그리 신경 쓸 일은 아닐 테다. 그 전에, 실체도 없는 꿈 따위에 휘둘리는 것은 마계기사로서 용납할 수 없는 미숙함이었다. 그럼에도 영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꿈에서부터 이어진 듯한 귀울림이며, 무의식의 영역에서 새어 나와 의식을 적시는 감정의 잔여물, 그리고 그와 동화된 것처럼 푹 젖은 듯한 몸. 좀처럼 다잡을 수 없는 동요가 깊은 곳에서 울렁거렸다. 하루의 시작으로서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그러나 칸타이의 최고봉에 서 있어야 하는 기사로서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는 일이다. 순백의 등에 휘날리는 진홍색의 기는 칸타이의 사람들에게 안도감과 용기를 가져다준다. 칸타이의 하늘을 딛고 서 있어야 하는 기사로서, 그는 언제나와 같은 위풍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의 약함은 곧 그가 지켜야 할 이들의 약함이 되리라. 그러니 백야기사는, 야마가타나 츠바사는 항상 강하게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어야 한다. 츠바사는 몸을 일으켰다. 밤을 끝낼 태양이 떠오를 시간이다.
*
칸타이는 늘 조용했다. 칸타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적고,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더 적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보다 더 적었다. 어른들은 늘 엄했기에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의 엄숙한 분위기 아래에서 자란다. 그렇기에 칸타이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사람들의 말소리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의 속삭임이 더 큰 마을이었다. 칸타이를 둘러싼 무림이 마을 한가운데보다 더 요란스러울 정도였다.
좀처럼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적막한 숲속, 붉은 장식을 단 백색의 마법의가 바람결에 나풀거렸다. 나무들은 누군가가 숲에 발을 들일 때마다 반갑다는 듯 그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어떤 손님이 되었건 그 본인에게는 절대 달가울 수 없는 환영이었다. 고요한 숲속에 남자의 기합이 울려 퍼졌다. 늘 그의 손에 자리한 봉이 기괴하게 움직이는 나뭇가지를 쳐냈다. 나무들은 저를 거부하는 움직임에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더 저돌적으로 남자를 향해 팔을 뻗었다. 나뭇결이 뒤틀리는 소리가 숲을 채웠다.
“츠바사, 조심해라!”
연륜 있는 목소리가 츠바사의 손목에서 울렸다. 하늘 높이 솟은 나무들의 그림자 아래에서도 반짝이는 팔찌가 달그락거리며 턱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츠바사는 그의 말을 그리 귀담아듣지 않는 듯했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고르바.”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목소리였다. 자신만만하게 대답을 내놓은 입술은 언뜻 웃고 있는 듯도 보였으나, 미소의 기미는 금세 사라졌다. 츠바사의 손이 봉을 고쳐 잡자, 봉의 한쪽 끝에서 날카롭게 벼려진 창날이 솟았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을 에워싼 가지들이 뎅강 잘려 나갔다. 돌풍이 불어 닥쳤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마찰음과 나무들이 바르작거리는 소리가 꼭 비명을 지르는 듯 거슬렸다. 한 나무의 기둥 위로 츠바사의 발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세상을 뒤집어 놓은 듯한 숲에서도 그는 여유로웠다. 기괴하게 뒤틀리던 나무줄기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고목들도 더 이상 침입자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화두의 숲이라……. 오랜만이구먼. 츠바사 네가 백야기사의 칭호를 계승했던 때 이후로 처음인가.”
칸타이의 땅이 마계법사의 마을로 선택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마계의 기운이 닿는 여러 지역들 때문이었다. 칸타이에는 출입이 금지된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언젠가 코우가가 아몬 법사의 부탁을 받고 발을 들였던 마계의 숲, 그리고 레귤레이스와의 싸움이 있었던 나락의 숲이 그랬다. 그리고 지금 츠바사가 딛고 있는 땅은 인간의 성장을 돕는다는, 그러나 숲의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나락과 다름없는, ‘화두의 숲’이었다. 고르바의 말대로, 츠바사가 한 명의 어엿한 마계기사가 되기 위해 들른 적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화두의 숲에도 마계수가 한 그루 있었다. 마계수란 늘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환영을 보여 자신에게로의 접근을 막곤 했다. 호러가 인간의 마음을 파고들듯 마계수 역시 인간의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그것이 무의식의 영역에 잠들어 있는 심연일지라도. 본인조차도 알 수 없는 어둠을, 숲의 마계수는 주인보다도 더 잘 안다는 듯 끄집어내어 눈앞에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베어 없앰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의 약함을 극복한다. 마수와의 싸움에 마계의 갑주를 이용하듯, 마계기사와 마계법사의 양성에도 마계수의 힘을 이용해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백야기사의 칭호를 받고 난 후에는 찾을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이 숲에 츠바사가 다시 발을 들인 것은 가라이 법사의 말 때문이었다. ‘츠바사여, 오늘 밤에는 화두의 숲으로 가 보거라.’ 그의 말에 츠바사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가라이 법사의 눈에 자신의 흐트러진 기와 가장한 평정 따위는 뻔히 보였을 테다. 칸타이를 지키는 이름 있는 마계기사라고 해도, 연륜 있는 법사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스스로도 이유 모를 불안과 열병으로 답답한 참이었으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지금 츠바사는 화두의 숲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숲의 중앙에 다다르자 빽빽한 나무들이 사라지고 초록 풀만 무성한 공간이 드러났다. 마계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 이곳에 뿌리 박은 채 지켜보고 있으리라. 그리고 곧 환영을 내보일 것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츠바사.”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곳에는 그리운 얼굴이 있었다. 다소 두께감 있는 검을 들고 있는 남자가 츠바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떠나고 나서도 여전히 너는 나에게 태양인가, 친우여. 태양이 없는 숲에 사라진 태양이 떠올랐다.
“카즈마.”
츠바사가 창을 고쳐 잡자, 카즈마도 검을 들어 보였다.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숲에 쩡 하고 울렸다. 확실히 카즈마는 자신의 마음 어딘가에 빛으로, 또, 어둠으로 남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를 츠바사는 이미 한 번 벤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베어낼 것이다. 친우의 음아가 아닌, 자기 자신의 마음속 사념으로서 나타난 친우를. 몸 안쪽으로 파고들려는 검을 쳐낸 창이 카즈마의 몸을 스쳤다. 츠바사의 등 뒤에서 카즈마가 단말마를 맞았다.
그러나 츠바사는 제 친우를 채 보내지 못한 순간 다시 창을 휘둘러야 했다. 부피감 있는 바위가 금테를 두른 하얀 자루에 맞아 부스러졌다.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알았다. 츠바사가 아는 이들 중 이런 술을 쓰는 인물은 한 명뿐이었다.
결이 잘 정리된 붓털이 츠바사의 시야 가장자리에 걸렸다. 붓촉도, 필대도, 그리고 그것을 가볍게 쥐어 잡고 있는 손도 츠바사에게는 무척이나 낯익은 모습이었다.
“린인가.”
대답을 하지는 않았으나, 저를 향해 돌아선 츠바사를 향해 그녀는 웃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서 이제는 어린아이의 티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두 손으로 감싸 잡아야 했던 마도필도, 지금은 한 손에 거뜬히 쥐고 법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봤던 모습임에도, 이렇게 보니 새삼스럽게도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츠바사가 누구보다도 지키고 싶었던 아이는 이제 얼마 후면 자기 자신의 몸쯤은 거뜬히 지킬 수 있을 만큼 자랄 터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 정도로 성장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칸타이의 어린 마계법사들을 봐 주고 있다고 하니, 누군가를 지켜낼 수 있을 만큼 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린이 츠바사가 지키고자 하는, 하나뿐인 가족임은 변함없었다.
“츠바사, 이건…….”
“알고 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것은 츠바사가 지켜야 할 그 아이가 아니었다. 고르바의 말을 단박에 잘라낸 츠바사는 다시 눈앞의 이를 향해 창을 겨누었다. 마계기사는 제게 아무리 소중한 인간이라고 해도 호러가 되는 순간 베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가짜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기다란 봉이 허공을 가르자, 린이 크게 물러섰다. 조금 전까지 만면에 머금던 미소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오빠…….”
꼭 상처받은 듯 슬픈 얼굴이었다. 린의 얼굴로는 보고 싶지 않았던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은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어 전시한 것에 불과하리라. 츠바사의 두 다리가 크게 도약했다. 줄곧 츠바사를 바라보던 린도 마도필을 휘둘렀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를 바위들이 불길을 휘감은 채 떠올랐다.
“쟈비의 법술을 섞은 모양이구먼.”
고르바가 말을 보탰다. 그 말대로라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츠바사의 키를 훌쩍 넘는 창이 허공을 가르자, 그를 가로막던 바위 몇 개가 불꽃과 함께 부서져 흩어졌다. 곧이어 방울 소리가 마주 울렸다. 린과 츠바사의 귀걸이가 각자의 손가락 끝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단단한 암석들이 서로 부딪혀 쪼개졌다. 마지막 바윗돌이 산산이 조각나기 무섭게 날 선 창끝이 린의 모습을 가장한 환영의 배를 꿰뚫었다. 고통에 신음하는 린의 목소리가 뇌리에 파고드는 듯했으나, 눈을 돌릴 수는 없었다. 창의 자루를 감싸 쥔 손이 크게 움직였다. 창날의 끝에서부터 묵직한 저항감과 함께 무언가를 베어 내는 감각이 선명히 느껴졌다.
린의 모습이 흩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창을 땅에 찍은 채 츠바사는 린의 마지막을 지켰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사라지자, 츠바사는 몸을 돌렸다. 그 앞에는 이제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마계수가 하늘 높이 가지를 뻗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일 리가 없다. 눈앞에 나타난 사념들을 모두 베어냈으나, 정작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무언가는 전혀 해소된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마계수가 나타나자 오히려 더욱 가슴이 죄이는 듯했다. 분명 무엇이 더 남아 있을 터다.
그런 생각에 대답하듯 또 하나의 그림자가 마계수와 츠바사의 사이에 나타났다. 순간, 숲이 고요해졌다. 바람 같은 것은 불 리가 없는 숲임에도 꼭 사납게 휘몰아치던 바람이 멈춘 것만 같은 적막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찰나, 돌연 귀울림이 시작됐다.
기시감이 들었다. 이 장면을, 이 순간을 겪은 적이 있었다. 정확히 기억이 되살아나지는 않았으나,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마계수를 등에 지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츠바사는 분명 본 기억이 있었다.
“쟈비?”
그 이름을 부르자 쟈비는 조용히 고개를 기울이며 웃어 보였다. 그 순간 쟈비에게 손을 뻗는 자신의 모습이 뇌리에 파고들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 앞뒤의 일도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츠바사는 본 적이 있었다. 쟈비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모습과 제게는 들리지 않는 말을 해 오던 쟈비의 얼굴, 마계수를 향해 걷는 쟈비와 그를 향해 손을 뻗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숲의 정적을 뒤덮는 이 소리를. 꿈이었다. 오늘 새벽 내내 그를 괴롭혔다고 하는 그 꿈의 내용이 분명했다.
허나, 무의식으로 넘어간 기억을 되살려 재현해 놓은들, 저것은 어차피 가짜에 불과했다. 어떤 모습이든 베어내고 마음의 동요를 잠재우리라. 츠바사는 창을 들었다. 그러나 쟈비는 그가 하고 있을 생각도, 제게 드러내는 적대감도 상관없다는 듯 츠바사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츠바사가 팔만 뻗으면 창날이 그의 몸을 꿰뚫을 수 있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쟈비가 입을 열었다.
“츠바사.”
츠바사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봉을 쥔 손에 힘이 더해졌다. 어떤 말을 하든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 생각하고, 츠바사가 창을 내지르려던 때였다. 쟈비의 손이 쇠촉이 박힌 자루를 잡아채었다. 그 드센 힘에 츠바사의 몸이 창과 함께 끌려갔다. 제 눈앞으로 바투 다가온 츠바사를 향해 쟈비는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결혼할까.”
시끄러운 귀울음을 뚫고 쟈비의 목소리가 닿았다. 이게 아니었다. 츠바사가 겪었던 것에 이런 장면은 없었다. 쟈비의 행동도, 그가 던진 말도 꿈과는 전연 달랐다. 어쩌면 이명에 가려져 듣지 못했던 말이 이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예상하지 못한 내용임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무어라 대답다운 것을 내놓지도 못한 채 츠바사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런 츠바사를 바라보는 쟈비의 모습만은, 그가 아는 쟈비와 똑같았다. 실체 없는 잡음이 멈추지를 않았다. 아니, 이제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보다 쟈비의 한마디가 더 요란하게 머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츠바사를 향해 다가가던 쟈비의 얼굴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지나쳐 귓가 앞에 멈추었다.
“츠바사, 너랑 자고 싶은데.”
고르바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속삭임이었으나, 츠바사에게만큼은 확실히 들렸다. 황급히 몸을 떼어 내는 츠바사를 보며 쟈비가 소리 내어 웃었다. 조소와 같은 웃음소리였다.
“역시 혐오스러워? 이런 더러운 마음으로 너를 품고 있었다는 게.”
츠바사의 입이 열렸으나, 그 입이 내놓는 것은 어떤 대답이 아니었다. 절규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츠바사의 창이 쟈비의 손을 뿌리쳤다. 날카로운 창이 쟈비의 몸을 스쳤으나, 쟈비 역시 빠르게 거리를 벌린 탓에 큰 상처는 남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츠바사의 두 손이 창을 붙잡았다. 저건 마물이 만들어 낸 사념에 불과하다. 당장 베어 없애면 그만인 가짜였다. 그를 벤다면 이 동요도 모두 소거되리라. 백색으로 주름진 마법의가 마구잡이로 뒤얽히며 나부꼈다. 츠바사의 창이 쟈비를 향해 휘둘렸다. 그러나 그 서슬은 좀처럼 쟈비의 몸에 닿지 못했다. 춤을 추듯 휘날리는 검은 마법의에 이따금 스치기만 할 뿐이었다. 쟈비는 츠바사가 다가오는 만큼 뒤로 물러나기만을 반복했다. 마도필은커녕 그가 상용하곤 하는 붉은 기도 꺼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왜 도망만 치는 거냐!”
“너와는 싸울 생각이 없으니까.”
또 한 걸음 멀어진 목소리를 츠바사는 필사적으로 쫓았다. 쫓고 쫓기는, 싸움 아닌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 사이에 고르바가 무언가 외치는 것도 같았으나, 츠바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츠바사가 잠시 발을 멈추었을 때, 쟈비가 딛고 서 있는 곳은 마계수의 뿌리 위였다. 어느새인가 쟈비의 등 뒤로는 마계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문득 의식 뒤로 미뤄 놓았던 새벽녘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츠바사의 다리가 땅을 박차고 나아간 것은 의식의 의지가 아니었다.
“츠바사, 정신 차려라! 이 이상 마계수에 다가가서는 안 돼!”
팔목의 마도구가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외쳤으나, 그의 달음박질을 멈출 수는 없었다. 다가오는 츠바사를 피해 쟈비가 몸을 옮긴 곳은 마계수의 고치 안이었다. 그러나 꿈과는 달랐다. 쟈비를 향해 뻗은 손이 그 손끝을 잡아 낸 것이었다. 놀란 듯 제 손을 돌아보던 쟈비가 고개를 들어 츠바사와 눈을 마주했다. 그와 동시에, 마계수의 틈이 닫혔다.
*
무겁던 몸이 물속을 흘러가듯 가벼웠다. 열병을 앓는 것처럼 달아오른 몸도 기분 좋게 식어 가고 있었다. 시원한 공기에 손끝이 식다 못해 차갑게 어는 듯도 했지만 불쾌한 감각은 아니었다. 손가락의 끄트머리에 걸쳐 있던 무언가가 굴러떨어진 듯했다. 그러나 주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수면의 파동처럼 번지는 소리가 윙윙거리며 귀에 울렸다.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인 듯했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파원이 어딘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곳곳에서 퍼지는 물결처럼 귓가에 와 부딪히고 사라질 뿐이었다. 꼭 백색 소음처럼 거슬리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한 줄기의 이명 음이 시끄러웠다. 그리고 고막을 뚫을 듯한 그 소리에 섞여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시끄러웠다. 잘 아는 이의 목소리였고, 들은 적 있는 말소리였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울리면 울릴수록,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그의 말은 더욱 선명히 뇌리에 새겨졌다.
‘결혼할까.’
‘츠바사, 너랑 자고 싶은데.’
솔직하다 못해 욕망에 충실한 음성이었다. 그 목소리로 듣고 싶은 말은 결코 아니었다.
‘혐오스러워? 이런 더러운 마음으로 너를 품고 있었다는 게.’
쟈비가 물었다. 솔직히, 그랬다. 적나라하게 욕구를 드러내는 그 행동도, 그리고 그것의 내용조차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마계기사로서의 신념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감출 수 있다면 감추어야 할, 보지 않을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욕정이었다. 그 말마따나 ‘더러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굳게 내려앉아 있던 속눈썹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 자신의 사념, 자기 자신의 마음, 마계수가 끄집어 올린 나의 더러움이자, 화두의 숲이 그 이름에 걸맞게 수행자에게 던진 실마리였다. 한 점 더러움도 없어야 할 백야기사의 칭호를 받았음에도, 나는 어느새 이렇게나 타락해 있었다. 그리고 나약해져 있었다.
잃는 것이 두려웠다. 두려워졌다. 아니, 처음부터 두려움을 버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 괴로움으로부터 도망치려 무정(無情)을 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정조차 버리지 못했다. 그 결과가 이 꼴이었다. 백야기사의 영령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분명 분개하리라. 그렇다고 해도.
츠바사의 속눈썹 아래로 눈동자가 드러난다. 검게 광택이 도는 눈동자가 눈꺼풀을 밀어내고 미약하게 차오르는 빛을 반사해 내고 있었다. 몸은 무거웠고, 뜨거웠다. 그러나 움직여야만 한다. 손가락 아래로 굴러떨어졌던 것을 손안에 쥐었다. 저를 걸친 이의 움직임이 느껴지자, 고르바가 입을 열었다.
“정신이 들었느냐, 츠바사!”
“……그래.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군.”
제가 품고 있던 이의 의식이 돌아오자, 마계수의 안에 동요가 일었다. 쉬이 내보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고치의 벽면이 기분 나쁜 모양새로 울렁거렸다. 츠바사 위로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이 내려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림자가 걷히고 드러난 것은 츠바사가 손을 잡았던 이, 쟈비의 얼굴이었다. 츠바사의 몸 위에 올라탄 쟈비는 아까의 그 웃음을 웃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고여 있는 것은 츠바사에게 속삭였던 바로 그것이었다.
“츠바사.”
“쟈비…….”
쟈비의 손이 불에 달군 듯한 얼굴을 감쌌다. 이대로 눈을 감는다면 분명 좋은 꿈을 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렇게 안일한 생각까지 하게 될 줄은. 조소가 나왔다. 그렇다고 해도 편하게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제 볼을 매만지는 손을 향해 떨구어졌던 시선이 다시 쟈비의 눈을 향했다. 끌어올린 눈망울에 빛이 깃들었다.
“미안하다. 너는 내가 자신의 욕망에서 눈을 돌린 결과겠지. 나의 추악한 마음을 너에게 돌리고 말았어. 정말 미안하다.”
츠바사는 손에 쥔 창의 끝을 쟈비에게 겨누고, 이내 그녀의 몸을 꿰뚫었다. 쟈비의 얼굴 위에서 웃음이 한 꺼풀 벗겨졌다. 그러나 그것이 걷히고 난 아래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남아 있었다. 노골적인 욕구가 아니었다. 쟈비의 손가락 끝이 츠바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소중한 것에 혹여나 상처라도 날까 몹시도 조심스레 매만지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쟈비는 그의 눈을 내려 보며, 천천히 얼굴을 떨어뜨렸다. 츠바사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 이불을 덮자, 그 위로 쟈비의 입술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미미한 압감이 사라지고 츠바사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쟈비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모습과 함께 귀에 울리던 잡음도 사라졌다.
*
숲을 거슬러 나오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숲의 초목들도 그를 방해할 생각은 없는 듯 잠잠했다. 마지막 나무의 기둥을 밟아 올라 숲을 빠져나왔을 때는 여전히 어두운 밤이었으나, 새벽의 어스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칸타이의 마을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지체하지 않고 츠바사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는 다시 발을 멈추었다. 익숙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츠바사도, 고르바도 알고 있는 향이었다. 몇 걸음 앞에 익숙한 인물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흙길을 문대는 소리가 츠바사를 향해 다가오며, 그 얼굴에 진 그늘이 걷혔다. 발소리와 함께 향취도 짙어졌다.
“화두의 숲에서 오는 길이지? 꽤나 애먹은 모양이네.”
“쟈비…….”
츠바사는 잠시 놀란 듯 쟈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내 멈췄던 걸음을 계속했다. 쟈비도 별말을 보태지 않고 익숙한 듯 그의 뒤를 따라 발을 뗐다. 그러나 츠바사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쟈비에게도 다소 의외인 일이었다.
“그래. 덕분에 나 자신의 사념도 마주할 수 있었다.”
“웬일로 답지 않게 솔직하시군.”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지.”
츠바사가 발걸음을 멈추고 쟈비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숲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의 약함, 그리고 두렵고 도망치고 싶은 와중에도 선명하게 그를 쫓아오는 욕망, 인간으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음아. 마계기사가 아닌, 야마가타나 츠바사가 품고 있는, 아니, 지금껏 줄곧 품고 있었을 마음, 바람. 언젠가 친우가 그 몸으로 가르쳐 준 것이기도 했다. 그것이 자신에게도 없을 리가 없었다. 츠바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하는 이의 죽음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에게서 떨어지려 하기도 했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새벽의 여명에 젖었기 때문일까,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에 지쳤기 때문일까.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을 말들이 쉽게도 쏟아져 나왔다. 츠바사는 재차 쟈비의 이름을 불렀다.
“쟈비.”
“왜 그래?”
조금 거리를 둔 채 츠바사를 따라 걸음을 멈춘 쟈비가 츠바사의 눈을 바라보았다. 쟈비의 눈동자를 향해 올곧게 뻗어 나오는 시선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언제나 말 보태는 것을 좋아하는 고르바였으나, 지금만큼은 눈치껏 입을 다물기로 했다.
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모든 인간을 지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힘이 없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수호자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는 지금조차도 끝끝내 지켜 내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그때 지키지 못하는 것이 제게 소중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사실에 겁을 먹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하여 가족의 정도 버린 채 마계기사의 사명에만 매달린 적이 있었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약한 마음과 감정을 받아들인 지금도 자신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언젠가 자신이 누군가를 제 마음속 깊은 곳에 들인 것을 후회하게 된다고 해도, 그것이 너라면…….
“나와 결혼해 다오.”
흔치 않게 쟈비의 감정이 표정 위로 선명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입이 벌어질 뻔했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을 번갈아 바라보던 쟈비는 이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방식’이라고 할 것도 없는 청혼이었으나, 과연 츠바사다운 방식이라고 쟈비는 생각했다.
“화두의 숲에서 뭘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바람이 분 것 같네.”
츠바사는 웃지 않았다. 아니, 웃을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하리라. 츠바사는 표정을 굳힌 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좀처럼 느낄 일도 없고, 그렇기에 드러낼 일은 더 없는 감정―초조함이 그 얼굴에 뻔히 떠올라 있었다. 쟈비는 츠바사를 조금 지나쳐 몇 걸음 걸어 나갔다. 등을 보인 채, 쟈비가 다시 입을 뗐다.
“뭐, 확실히 마계기사는 누가 됐든 깊은 관계를 만들지 않는 게 좋지. 본인에게도, 주변 사람에게도 말이야. 너 같은 성격이라면 더욱더 그렇겠지.”
츠바사는 여전히 쟈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대답이 되었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사실 준비 따위를 한 적은 없다. 그러나 받아들여야 한다. 츠바사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말없이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고르바도 내심 촉각을 곤두세웠다. 바람 한 점 없었으나, 어딘가에서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말을 고르듯 잠시 시간을 두던 쟈비는 다시 츠바사를 향해 돌아섰다. 그 얼굴에 웃음기는 없었다.
“어쩌면 그러는 편이 네게 행복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안 됐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네 손을 잡을 거거든.”
쟈비가 츠바사의 손을 감싸 잡았다. 뜨거운 체온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가까이 다가서자, 기쁨과 안도감에 츠바사의 동공이 떨리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으나, 눈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쟈비의 또 다른 손이 츠바사의 볼을 감쌌다. 쟈비의 눈동자에 여명이 깃들어 빛을 발했다. 그 눈이 말하고 있는 것을 츠바사는 본 기억이 있었다. 그런가. 자신만이 품고 있던 마음이 아니었나. 제 손을 잡은 쟈비의 손을, 츠바사도 마주 잡았다. 츠바사가 고개를 낮추자, 쟈비가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곧, 쟈비의 입술이 츠바사의 입술로 가 닿았다. 두 사람의 시야가 천천히 닫혔다. 눈이 보지 못했어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어도, 진하게 감도는 향내가 쟈비의 존재를 생생하게 그려 주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심장이 고동쳤다.
검게 차단된 시계(視界) 밖으로 태양이 떠올랐다. 아침을 알리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빛이었다. 죽여 왔던 감정이 약동을 시작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