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RO][야마가타나 남매] 다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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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촬 꽃말 합작에 제출한 글입니다.
2. 동인 설정이 있습니다.
공백 제외 4,022자
칸타이에는 늘 하얀 바람이 불었다. 어렴풋한 달빛만이 겨우 길을 비추는 숲, 바람을 타고 흐르듯 부드럽게 날리는 옷이 달빛을 먹고 더욱더 새하얗게 빛났다. 검은 밤의 배경에서 홀로 두드러지는 백색의 그림자가 숲을 거닐고 있었다. 무결하게 벌어진 어깨 위로 놓인 장식과 하얀 등과 허리의 한가운데에 박힌 문양만큼은 까맣게 그늘진 밤의 녹음 아래에서도 붉은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온갖 초목의 숨이 뒤섞인 밤공기를 마시며, 남자는 허리를 더욱 곧게 세웠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조차 그는, 야마가타나 츠바사는 자신이 짊어진 이름에 걸맞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 걷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의 다리와 함께 땅을 딛곤 하던 훤칠한 봉도 그의 다리 옆에 무겁게 찍히며 멈추어 섰다. 그의 등 뒤로 밤보다 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무슨 일이냐.”
힘 있는 목소리가 나직하게 숲을 흔들었다. 언제나 그랬듯 단단한 음성이었으나, 듣는이에 대한 적대감이나 경계심은 없었다. 숲의 그늘에 섞여 있던 인영이 그림자에서 떨어져 나왔다. 단정하게 한 갈래로 묶어 올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가느다란 목 옆으로 은은한 방울 소리가 울렸다.
“린, 밤의 숲은 위험하다는 걸 알 텐데. 어서 돌아가라.”
“괜찮아. 나도 이제 어린애가 아닌걸.”
“린!”
창대의 끝을 덮은 금테가 재차 땅을 찍었다. 야단 섞인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오라비를 향해 린은 은근한 미소를 웃었다. 달의 모양과 닮은 눈매는 츠바사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양새였으나, 달빛처럼 맑게 빛을 발하는 눈동자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형제와 똑 닮아 있었다. 린은 자신의 말마따나 이제 ‘어린아이’라 칭하기에 몸은 훌쩍 커 버렸고, 마냥 보호만 받기에는 이미 훌륭한 마계법사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호러의 기척도 없지 않느냐, 츠바사.”
“입 다물어라, 고르바!”
“그리고 놀러 온 것도 아닌걸.”
가벼운 발걸음이 츠바사의 옆으로 바투 다가갔다. 린은 츠바사의 옆에 서고도, 보다 앞으로 뻗은 길을 따라 몇 발짝을 더 걸어, 헤쳐진 흙길 옆으로 우거져 있는 풀을 치워 냈다. 린의 키만큼이나 자라 있는 풀이 비켜 서자, 좋다고는 하지 못할 향이 밤공기를 흠뻑 적셨다. 린의 손가락 너머에서는, 아이의 손바닥처럼 활짝 개화한 꽃송이들이 숨쉬고 있었다. 채 잎을 펴지 못한 봉오리 몇 개는 바람개비처럼 몸을 웅크린 모양새였다. 꽃 따위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으나, 몇 가지, 이름과 쓰임새를 알고 있는 식물도 있었다. 린의 손길로 달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풀도 츠바사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종류 중 하나였다. 츠바사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의 말을 대신 하듯 고르바가 달그락거리며 턱을 움직였다.
“흰독말풀인가. 약이라도 만들려는 게냐?”
“집에 약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아서.”
“과연……. 그래서 이런 밤중에 나온 거였구먼.”
“응. 독말풀은 밤에만 꽃을 피우니까.”
고르바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린은 꽃의 키에 맞추어 그 앞에 다리를 오그려 앉았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얄쌍한 마도필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 사람의 손을 타 온 탓에 꽤 허름한 행색의 노옹이었으나, 린이 한시도 떼어 놓지 않은 채 늘 소매 안에 품곤 하는 물건이기도 했다. 뻣뻣한 붓촉이 먹을 찍는 듯 부드럽게 잎을 쓸어 주자,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던 꽃잎이 달빛을 먹은 듯 하얗게 빛났다.
“다투라.”
이제는 뜻조차 지워진 옛 마계어를 읊조리는 목소리가 밤의 적요 위에 한 방울 점을 찍는다. 꽃잎이 삼킨 빛과 목소리로 그린 주문이 순식간에 줄기를 타고 뿌리까지 흘러내렸다. 단단하게 다져져 있던 흙이 부슬부슬 갈라지고, 토양을 움켜쥐고 있던 뿌리가 땅을 버리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숲이 가꾼 화초 서너 포기가 린의 손 위에 살포시 떨어졌다. 실뿌리 한 가닥조차 상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린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츠바사에게 부탁해도 되지 않느냐?”
“으응, 오빠에게는 오빠가 해야 하는 일이 있잖아. 이건 마계 법사인 내가 해야 하는 일이고.”
린은 고개를 저어 보이곤, 흙에 끌린 옷단을 툭툭 털며 몸을 일으켰다. 츠바사를 향헤 돌아선 린의 얼굴에는 제법 어른의 티가 나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줄곧 말없이 린과 고르바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츠바사도 처음과는 달리 제법 분위기가 누그러들어 있었다.
“그럼 가 볼게, 오빠!”
제 할 일을 마친 마도필이 다시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어린 시절의 활기와 똑 닮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린은, 츠바사의 앞에 나타났던 때와 똑같은 발걸음으로 가볍게 걷기 시작했다. 미련 없는 듯 츠바사를 지나쳐 가는 걸음걸이는 무척이나 경쾌하면서도, 당당하고 또 늠름하기까지 했다. 걸걸한 노인의 목소리가 조용히, 그러나 시원스럽게 웃었다.
“츠바사, 린도 꽤 믿음직해지지 않았느냐?”
“…….”
수풀의 그림자 안으로 사라지는 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츠바사는 노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발을 뗐다. 걸음이 향하는 곳은 자신이 지나왔던 방향이었고, 린이 나타난 방향이었으며, 린이 다시 사라진 방향이기도 했다.
“린!”
벌써 저만치 앞을 걷고 있던 린은 자신의 발을 붙잡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린의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 츠바사에게 보였던 웃음기는 사라지고, 대신 적잖게 놀란 표정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오빠?”
망설임 없는 두 다리가 성큼성큼 린을 향해 다가섰다. 그러나 린의 옆자리에 멈추어 서는가 했던 두 발은 그를 지나쳐서는 앞서 걸어 나갔다. 제 오라비를 빤히 바라볼 뿐이던 린은 자신의 앞으로 걷기 시작하는 등을 보다가, 이내 놀란 눈을 거두고 간질간질한 웃음을 터뜨렸다. 츠바사의 걸음은 눈에 띄게 속도가 줄어 있었다.
“뭐 하는 거냐, 린. 어서 움직이지 않고.”
“응!”
몇 걸음 앞에서 걷고 있는 츠바사는 볼 수 없겠으나, 린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밝게 웃었다.
*
밤의 숲은 태양 아래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어서, 무섭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따스한 잎을 두르고 있던 고목들의 손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고, 높이 날아오를 듯하던 동물들의 울음소리는 땅을 파헤쳐 초목들의 뿌리를 긁어 댔다. 낮에는 그리도 선명하게 뻗어 있던 길도 밤에는 좀처럼 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호러의 위협과는 별개로 밤의 숲은 숲 그 자체로 무서운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빛이 있었다. 칸타이의 밤을 비추는 백야의 빛은 한낮의 그것보다도 밝았다. 그렇기에 더 이상 밤은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아이도 어른도 밤을 몰아내는 빛이 있음에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달랠 수 있었다. 눈앞에는 하얀 등이, 하얀 등 위로 수놓인 붉은 상징이 있었다.
숲을 걷는 남매는 마땅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으나, 조용한 숨소리와 흙을 헤치는 발소리, 그리고 귓볼에서 길게 늘어져 있는 장신구의 청아한 울림만으로도 충분히 말을 대신할 수 있었다. 밤중의 짧은 산책도 야마가타나 남매에게는 좀처럼 없을 시간이었다. 짧을 수밖에는 없기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시간인 것이었다. 평소보다 걸음을 늦췄음에도, 입을 벌리고 있는 숲의 출구는 금세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났다. 야속한 일이었다.
숲의 밖으로 나가기까지 몇 발짝 남지 않은 때에, 돌연 고르바가 턱을 움직였다. 인간이 아님에도 오랜 시간 인간의 틈에서 지내온 탓일까, 늙은 마도구는 눈치가 빨랐다.
“그렇지만 린, 굳이 흰독말풀을 사용하는 이유가 있느냐? 숲 밖에서 구할 수 있는 다른 약초도 많을 터인데.”
“그 꽃들은 내가 심은 거거든.”
“네가?”
린은 대답을 대신해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였다. ‘어린 시절’이 끝나고 어른이 되어 가면서 알게 된, 밤의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밤이란 무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의 무서움보다 더 괴로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곳보다 안락할 집에서조차 피할 수 없는 무서움이었고, 이곳이 세속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칸타이이기에 더욱 사무쳤으며, ‘야마가타나’이기에 받아들여야 할 무언가였다. 그러나 그조차도 백야는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것은 백야이기에 달랠 수 있는 것이었고, 백야의 하늘을 나는 날개밖에는 달래어 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밤은…… 외롭잖아.”
느릿한 걸음을 더욱 잡아끄는 목소리였다. 줄곧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걸어 나가던 츠바사가 돌아섰다. 숲의 출구에 다다랐기 때문인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누이의 음성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적당히 거리를 둔 채 그를 따라 멈추어 선 린은 가만히 제 손 위의 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마가타나의 밤은 언제나 고독을 두르고 찾아왔다. 추위에 움츠러드는 목조 건물의 신음을 자장가 삼아 자야만 했던 시간이었다. 백야는 자신만의 빛이 아니었기에, 린은 언제나 이불만을 꼭 붙잡고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그러면 쓸쓸한 시간도 눈을 떴을 땐 어떻게든 끝나 있었다. 그것이 야마가타나 린이 보는 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백야는 백야이기에 언제나 밤을 온전히 지새워야 했다. 그렇기에 그는 고독했다. 고독했을 것이다. 백야의 이름이 야마가타나였기에 린은 알 수 있었다. 야마가타나의 밤은 언제나 고적한 것이었다. 달빛을 받아 피어나는 꽃을 심은 것은 외롭고 쓸쓸할 그를 위한 것이었다. 밤에 피어나 아침에 지는 백화는 달과 함께 시작하여 태양과 함께 끝나는 백야의 박명과도 닮아 있었다. 그러니 달을 맞이하는 이 꽃은 백야에 바치는 헌화였다. 그것은…….
“린.”
부드럽게 누이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사유가 끊어진다. 손 위에서 떼어내어 급히 들어 올린 시선 끝에는, 오라비의 다정이 사뭇 녹아 있는 얼굴이 있었다. 츠바사의 눈을 올려다보던 린도 이내 다정한 미소를 보였다. 좀처럼 보여 주지 않는 눈을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손에 쥐어진 꽃은 약초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우거진 수풀의 밖으로 빠져나가 넓게 트인 길 위에 섰다. 츠바사를 향해 밝게 웃어 주며, 린은 이번에야말로 잠시간의 이별을 알리는 인사말을 건넸다.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이는 츠바사를 뒤로하고 린은 마을을 향해 돌아섰다.
“아.”
그러나 헤어짐의 시간을 미루는 외마디의 느낌말이, 다시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던 츠바사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다시 눈길을 돌린 곳에는 린의 두 다리가 몇 걸음을 채 떼지 못하고 멈추어 서 있었다.
“아까 이 아이들 앞에서 외웠던 주문, 무슨 뜻인지 알아?”
어느새 츠바사를 향해 다시 뒤돌아서 있는 린은 손에 쥔 것을 들어 보였다. 땅에서 뿌리 뽑힌 후로 어지간히 시간이 지났음에도 화초는 여전히 숨이 죽지 않은 채 생기를 띠며 잎을 펼치고 있었다. 하얗게 빛을 받으며 하늘을 향해 열린 큼지막한 꽃은 멀찌감치에서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말의 의중을 헤아리려는 츠바사에게, 린은 금세 답을 주었다.
“옛 마계여로 ‘경애’라는 의미래!”
꼭 11살 때의 시절로 돌아간 듯, 린은 밝게 웃었다. 꽃과 함께 백야에게, 야마가타나에게 바치는 술법이었다. 야마가타나 츠바사에게 있어 그것은 그 어떤 웃음의 술법보다도 강한 주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