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특촬

[전국남사][우에스기 주종] 190309

Snailer 2019. 3. 9. 22:13


공백 제외 1,401자




   구름이 붉게 물들었다. 요사이의 며칠은 날이 영 거무죽죽해서는 노을다운 노을을 볼 수가 없었으나, 오늘은 재수가 좋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습관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우연히 보게 된 하늘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붉게 물들어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는 교복만큼이나 새빨간 빛깔이었다. 그 주인의 얼굴까지는 시선이 닿지 않았으나, 굳이 이목구비를 뜯어 확인할 필요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늘, 적어도 두어 걸음 밖에나 있던 녀석이 코앞까지 와 있는 것은 몹시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러니 그 표정을 못 본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면 아쉬운 일이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러고 보면 몇 년을 빡빡하게 살아왔더랬다. 그 몇 년 치의 피로가 오늘에야 기어이 찾아온 것이다. 꼭 빚더미처럼 불어나 있는 피로감이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무겁게 몸을 짓눌렀다. 온종일 머리카락 끝까지 신경을 곤두세운 채 하루를 보내고 난 후, 두 다리가 겨우겨우 끌고 간 몸이 침대에 누웠을 때의 감각과 비슷했다. 그렇지만 마음만은 편안했다. 내일은 줄곧 기다려온 안식일이었다. 아니, 일몰은 이미 시작되었으므로 지금이 바로 그 휴식의 날이었다. 시간을 확인할 필요도, 업무 메일을 받을 필요도 없다. 방전된 노트북을 충전하지 않아도 되었고, 자꾸 느려지는 시계를 손보지 않아도 된다. 부서진 전화기의 수리도 필요 없다. 모든 일상에서 물러나 완전히 고립될 수 있음에 카네츠구의 목울대가 울렁이며 소리를 내었다.

   또 얼마만큼 장막이 내려앉은 시야에 묵직한 구두 굽 소리가 걸어 들어왔다. 발등 위로 내려앉은 하얀 흙먼지가 검은 구두의 광택을 죽이고 있었다. 흐릿하게 얼핏 보아도 그의 발은 꽤나 큰 사이즈였다. 그럼에도 보기 좋게 너무 답답하지도, 널널하지도 않게 발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맞춤 신발이리라. 구두 위로 가볍게 걸쳐 있는 바짓단에도 먼지가 묻어 있었으며, 더러워지지 않은 천에는 은은하게 광택을 내는 듯한 세로줄 무늬가 잘게 늘어서 정장 바지에 희미하게 패턴이 비치고 있었다. 피로의 장막이 걷히질 않아 두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어도, 분명 정장 재킷에도 같은 무늬가 그려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같은 무늬의 베스트를 받쳐 입고 있을 것이며, 너무 답답하지 않게 조여 맨 검은색 넥타이는 짙푸른 줄무늬가 그어져 있다. 온통 검은색투성이인 착장은 온 시야를 뒤덮은 노을의 검붉은 빛에도 물들지 않은 채 카네츠구의 옆에 서 있었다.

   몇 년 동안이나 부르지 못했던 이름이 폐에서 기어 올라와 굳게 닫힌 목구멍을 두드렸다.


   “우…….”


   아무렇게나 덧칠해 놓은 시멘트 표면 같은 목소리는 의미를 가진 단어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잘게 부서졌으나, 찰랑, 시야의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소리는 대답을 해 준다. 호수에 일어난 작은 파도 같은 소리였다. 구두의 앞코는 삐딱하게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으나, 그 발끝이 바라보는 두 갈래 시선의 사이에는 카네츠구가 있었다. 눈앞의 사물들은 모두 흐려져 갔으나, 잠자코 지켜보고 있을 뿐인 그의 존재만큼은 또렷했다. 언어는 없는 자리에 의미는 있었다.


   쉬시는데 걸음 하시게 해 죄송합니다.

   신경 쓸 거 없어.

   그럼 슬슬 갈까요? 우에스기 씨.


   흐트러진 셔츠의 깃을 바로잡았다. 서늘하고 빳빳한 섬유의 감촉이 기분 좋게 양 목선을 스친다. 언제나 그랬듯 그의 왼쪽에 서서, 걸음을 옮겼다. 양손은 가벼웠다.


   유키무라는 조금 걱정이네요.

   마음에 안 들어 하던 거 아니었나?

   그날 이후로 제가 일단 보호자였으니까요.

   저 녀석이라면 괜찮아. 히데요리 도련님도 곧 돌아올 테고, 그 애송이들이 계속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모양이고.

   그렇습니까.


   언어 없는 말소리가 멀어져 갔다.

   붉게 젖은 눈은 굳게 닫혀 있었다. 게으른 시계의 시침은 3시를 향해 걷고 있었다.